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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어나 가서 선포하라 (욘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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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 가치관의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2년 전인 2004년도에 유행했던 큰 풍조는 메트로 섹슈얼이라고 하는 남성들의 화장, 패션과 외모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남성, 가꾸는 남성들의 이미지가 시작이 되어졌습니다. 지난 해에는 리버 섹슈얼이라고 해서 강한 남자들의 이미지를 그런 것들이 유행이 되었었는데, 올해 들어서면서 특별히 최근에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왕의 남자라고 하는 영화에서 여장광대역을 하고 있는 공길이가 주는 크로스 섹슈얼이라고 하는 남자이면서도 여성의 이미지를 선호하고,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싶어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회의 가치관의 급격한 변화가 우리를 때때로 혼란스럽게 하고, 이게 옳은건가 그런 질문을 던지고는 합니다. 젊은 남성들의 이런 양성현상은 남자이면서 여성이었던 선호, 그러면서도 여성같은 남자는 아닌 그런 특별한 현상들이 요즘 우리 사회의 중심에 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왕의 남자라는 영화를 보셨을 텐데, 아직도 안 봤다면 사회적인 흐름에 많이 뒤쳐져 있는 것이고요. 그 내용이 교훈적이던 아니던, 국민의 거의 성인들의 많은 퍼센테이지가 5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영화를 봤다면 사회의 어떤 주류된 관심사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은 우리가 옅보는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제가 상담대학원을 다닐 때 하버드대,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던 그 교수님이 어느 날 갑자기 질문을 던져요. 그 때 한 참 무슨 영화가 유행했느냐 하면 친구라는 영화가 유행했었는데, 친구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거기 한 15명쯤 되는 대학원생들이 손을 드는데, 저하고 한 두 사람 손을 들었는데, 그게 상담대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아직 그 영화도 안 보고서 무슨 상담대학원을 하느냐고 얼마나 신랄하게 책망을 하는지 모르더라구요,

그게 제가 갑자가 스타가 됐지요. 시대가 앞서가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물론 교훈적인 내용도 있고, 역기능적인 부분도 있기는 합니다만은, 이 왕의 남자 같은 경우도 역기능적인 면도 있고, 또 시대를 엿볼 수 있는 계기도 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문화평론가들은 왜 이런 현상이 그 이미지들을 선호할까라고 하는 평가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취업의 부진이나 혹은 불황으로 인한 불안한 심리를 보상받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의 심리가 그렇게 크로스 섹슈얼로 표출이 된다. 그렇게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평균 50군데 정도에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봐야 겨우 취업이 될까한 정도로 무척 취업의 문이 좁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대학을 나와서 취직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이제는 누가 더 남들보다 뛰어난 달란트를 가지고 있는가? 어느 뛰어난 개성이 있는가? 그런 부분들이 경쟁의 요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도 신앙의 가치관의 변화는 급격합니다. 뭐가 옳은건지, 또 교회에서 선포하는 메시지도 천차만별이 되어서 혼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어느 책을 서점에서 그렇게 보니까 현대인들에게 권하는 매너 중에 하나가 이런 제안이 있었습니다. 어떤 모임의 초대를 받거든 5분 정도 늦게 가라. 5분 정도 늦은 것에 대한 핑계는 적당히 둘러대라. 차가 막혀서, 트래픽이 심해서, 오다 보니까 뭐 길이 막혀서 거의 99%의 핑계가 자동차 교통 트래픽이지요.

적당히 둘러대고 그러나 당신이 5분, 10분 후에 가면 이미 도착해 있는 사람들이 당신을 주목할 것이다. 주목받는 사람이 되려면 모임에 5분, 10분 늦는 것이지요. 그런 제안을 보면서 저는 놀랐습니다. 우리가 책을 마음의 양식이라고 그러는데, 기준이 되어있지 않은, 가치관의 정리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그런 책을 보면 ‘아, 모임에는 늦게 가야 되는 구나.’ 그런 가치관으로 정착이 되지 않겠습니까?

정말 책방에 쌓여있는 책들은 많은 것들이 독약 같은 것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예배도 습관적으로 한 3분에서 5분정도 늦는 사람들이 죄송하지만 많은 퍼센테이지를 차지합니다. 자리가 많이 비었는데, 송영하고, 첫 번째 기도하고 나면 그 자리가 거의 차요. 그 기간은 길어야 3분에서 5분을 넘지 않습니다.

이게 매주 계속되는 상황이예요. 습관적인 사람들이 있어요. 주목받으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이들은 그런 이들을 터치하기 위해서 주보에 스템프를 찍는대요. 지각하셨습니다. 스템프를 찍어서 정각이 지난 후에 들어온 성도들에게는 스템프가 찍혀진 주보를 드린대요. 그게 한 방법이겠지요. 작년, 재작년은 규장각에서 나온 지각하지 않기 운동 큰 포스터를 붙이고, 대한민국 온 교회들이 몸살을 앓았습니다만은 그게 잘 지켜지는지 모릅니다.

습관이 참 무서운거 같아요. 3분에서 5분. 제가 차를 빙빙 돌다보니까 늦었습니다. 그러면 5분 먼저 출발하셔야지요. 차가 2~ 3바퀴 돌 것을 가정하고 떠나셔야지요. 그런 준비된 모습들, 그런 것들이 아주 심각하게 요청되는 모습이다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말씀은 동사가 3개가 연결된 주제입니다. 일어나라. 가라. 선포하라. 사실은 이 말씀은 요나서 1장 2절- 3절에서 말씀되어졌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여호와께서 두 번째로 요나에게 말씀하셨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말씀과 두 번째 말씀은 펴놓고 보면 1장 2- 3절 오늘 말씀은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쳐라. 똑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두 번째 말씀도 너는 일어나서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똑같습니다. 첫 번째 주님께서 주셨던 말씀은 얼마나 복잡하고, 다사다난한 일들이 많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오늘 본문 3절을 보면서 한 편으로는 허탈한 느낌을 가졌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이렇게 간단한 일을 왜 요나가 그렇게 복잡하게 했을까? 우리는 생각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믿음이 생기면 문제가 될 것도 문제가 안 될 줄로 믿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혹은 믿음이 떨어지면 문제가 안 될 것도 문제가 됩니다. 우리가 본문 읽은 마지막 3절 제일 마지막에 보면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임으로 요나가 있는 곳으로 욥바에서 거기까지 3일이나 걸어서 가야하는 수고와 땀이 필요한 것입니다.

전에는 3일길이 되는 이 환경적인 어려움이 너무 우리를 힘들게 했어요. 함께 가십시다. 저는 못갑니다. 왜요? 거기는 3일이나 걸리잖아요. 함께 가십시다. 저는 못 갑니다. 저기는 너무 멀잖아요. 여러분 교회가 뭔가요? 요즘 우리 한국사회는 한시간 자동차 거리는 기본적인 생활권으로 개편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여기서 한 시간이면 어느 정도인가요? 분당이 35분 밖에 안 걸립니다. 일산 30분이면 됩니다. 일산도 이 쪽 100번 고속도로 입구 쪽에 있는 부분은 20분도 안 걸려요. 시흥, 인천, 안산 30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고, 열정이 있을 때에는 3일길이 문제가 되지 않는데, 믿음이 없으면 그게 자꾸 문제가 되요. 목사님, 조금 먼 것 같아요. 저녁에 못 나와서 그렇고, 언제는 저녁에 나왔나요? 그럼 저녁에 다 이사가야 되겠네요.

다 교회를 옮겨야 되는거 아닙니까? 3일길이라고 하는 이 부분을 많이 생각해 보았어요. 믿음이 있을 때는 3일길이 문제가 되지 않는데, 믿음이 떨어지고 나니까 사명이 떨어지고 나니까 이 3일길이 최고의 핑계거리가 되는 거예요. 그러나 요나에게 있어서 이 3일길은 문제가 안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오신 성도의 가정의 사위였는데, 그 분이 완전히 한국에 귀국하기 전에 대학에 Apply를 하고서 기분이 좋아서 대학에 돌아온다고 하는 것이 시간강사도 어려운데, 전임강사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그러면서 그 지역이 천안이었어요.

목사님, 제가 이제 열심히 나오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미국에서 한국에 와서 열심히 했거든요? 제가 그랬지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제가 그랬거든요? 천안에서 여기 오기가 쉽지 않을텐데요. 아유, 목사님 제가 가 보니까 천안 1시간, 1시간 10분 걸립디다. 제가 얼마든지 올 수 있지요. 천안 쉽지 않을거요? 목사님, 제가 미국에서 미국교인들 1시간에서 2시간 하이웨이로 오는 거 기본이거든요. 천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셔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달이 정작 한국에서 교편생활 하면서 천안 주변에, 대학 주변에 방을 얻고 조금 교회를 나오다가 얼마 후에 목사님, 좀 뵙시다. 저는 이미 알고 있었어요. 목사님, 조금 먼 거 같아요. 미국에서 한 시간은 옆집인데, 한국에서 한 시간은 먼 거 예요. 사고가 달라지는 거예요. 미국에서는 박사가 되도 나한테 닥터 김이라고 불러. 그래서 닥터김, 닥터김 그래도 기분이 안 나쁜데, 한국의 큰 병원에 와서 나를 닥터 김이라고 불러라. 그래서 간호사들이 닥터김, 닥터김이라고 해서 기분이 좋았는데, 한 달 조금 지나니까 건방지게 나에게 닥터김이 모야? 박사님이라고 불러야지. 이렇게 달라지는 거예요.

지금 요나에게 있어서 삼일길이 왜 그렇게 멀었던지. 왜 그랬습니까? 우리는 지난 1장과 2장에서 많은 시간동안 그 우여곡절을 말씀을 통해서 깨달았어요.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 3절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너무 간단해요. 믿음이 들어오고 나면 간단한데, 믿음이 떨어지면 왜 그렇게 복잡하고, 말이 많고, 이유가 많은지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우리 환경을 바꿔야 할 일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사명을 강건하게 하고, 든든하게 하고 옳게 세우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 주보를 하려고 몇 군데 주보를 잘 하는 인쇄소를 알아보았는데, 거기서 나오는 주보를 보았어요. 그 교회 주보를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였는데, 인천, 김포, 파주, 이런 곳 까지 차량이 운행되는데, 운행시간을 보니까 그 도착시간을 보니까 1시간 20분이 걸려요. 야, 대단합디다. 보통 1시간, 1시간 20분 코스로 자기교회까지 가기 위해서 교회차를 타면 1시간, 1시간20분을 타야되는 거예요,

그거를 1년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 매주일, 새벽기도 나오는 사람은 매일일 것이고, 야, 대단하다. 이런 마인드를 가진 교인들이 있다니. 뭐가 문제입니까? 환경이 우리에게 문제가 되기 이전에 우리는 그래서 요나서를 통해서 우리가 돌아봐야 할 우선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마음이 있는가? 주님의 말씀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것이 먼저 체크되어야 할 그런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나에게 있어서 주님의 첫 번째 말씀은 너무나 짜증나는 거예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해도 못 다할 일인데, 유대인들에게 원수 같은 북왕국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했던 그 북왕국 앗수르와 이스라엘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쓸만한 사람들은 다 포로로 끌려갔고, 여자들은 정조를 짓밟혔고, 온 나라의 귀한 것들은 다 빼앗겼고, 그런 철천지 원수같은 나라에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전해서 어떻게 하란 말이란 말이예요?

그들을 회개시키고, 은혜의 길로, 축복의 길로,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우리나라의 역사적으로 원수 같은 나라는 중국과 일본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이런 노래를 불렀지요?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저 중국을 오랑캐라고 부르면서 그 날을 잊지 말자고 그랬어요. 하지만 지금은 중국과 우리의 인적 물적 교류는 최고입니다. 일본, 우리나라를 36년동안 지배하며, 우리의 이름을 갈며 우리의 국권까지도 찬탈했던 그 일본에 이를 갈지만, 우리가 지금 일본 없이 가능합니까?

지난 70년대 이후에 어쨌든 우리는 일본으로 인해서 많은 유익을 얻었습니다. 그 일본을 선교하자고 그러면 알레르기가 생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 하필 일본입니까? 마치 요나가 왜 하필이면 앗수르냐고 저항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피해서 다시스로 가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오

늘 우리에게 무엇이 요청됩니까?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주님, 과거에는 도망하려던 요나, 과거에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던 요나, 과거에는 사명의 자리에서 이제는 멀리멀리 떠나려더 요나, 그래서 다시스로 가려던 요나, 그러나 한층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겟세마네동산에서 구했던 주님의 고백이 우리에게 요청되는 줄로 믿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할 때는 우리의 생각과 뜻대로 있다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없는 분들이 누가 있겠습니까? 자기의 주장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신앙이라고 하는 아주 근본적인 물음으로 우리가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이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양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의 목적이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살아야 한다는 가장 중요한 목적, 그 순수한 우리의 삶의 의미로 돌아가보면 아, 왜 우리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라고 해야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우리라고 하는 부분들 때문에 요나처럼 살지 않았는가 그렇게 반성하고 이야기했습니다. 어느 사람이 등산을 하다가 실족하는 바람에 절벽 밑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도 용케 절벽 중간에 소나무 가지를 움켜 쥐었습니다. 간신히 목숨을 구한 그 사람은 절경위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람살려! 위에 누구 없습니까?’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염려마. 내가 여기 있어.’ ‘누구신데요?’ ‘나는 네 하나님이야.’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저 위험한 곳에서 구해 주세요. 구해 주신다면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위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그렇다면 내가 시키는대로 해라. ‘어떻게 해요?’ ‘그 나무를 놓아.’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지금 낭떠러지에 떨어지다가 간신히 나무를 붙잡았는데, 그 나무를 놓으면 저는 죽습니다.’ ‘아니야. 네 믿음대로 될거야.’ ‘믿음을 가지고 그 나무를 놓아.’ 한 동안 침묵이 흘렀습니다.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다시 또 크게 소리칩니다. ‘그 위에 누구 다른 분 없습니까?’ 우리는 종종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겠다고 말을 하지만 구호에 그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거 붙잡고 있는거 놓으면 죽는데, 주님은 그것을 놔야 산다고 하는데 나는 도저히 못 놓겠다고 하다가 결국은 주님을 제껴 놓고 다른 분 찾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주님의 말씀대로 니느웨로 가기 전에 요나의 모습이기도 하고, 우리의 모습이기도 해요.

제가 요나서를 설교하니까 많은 분들이 힘들어했어요. 왜 하나님 요나서를 하나요? 왜 요나서는 성경이 아닙니까? 어떤 분은 저와 식사를 하는데, ‘목사님 요나서를 하시니까 제가 어쩔 줄 모르겠어요. 나한테 하시는 말씀 같아요.’ 그렇게 들으셨으면 참 감사하네요. 설교라고 하는 저 말씀이 나에게 하는 말씀이라고 여겨질 때 복된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은혜 받는 것과 시험드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예요.

아휴, 저거 또 교구장이 가서 고자질 한 거 아냐? 저거 또 어떻게 알지? 누구누구만 아는데, 그거 또 일러바친 거 아냐? 그런 생각에 가지에 가지를 치면서 설교시간을 다 보내는 거죠. 끝나기만 해 봐라. 내가 삼자대면 하리라. 은혜받는 것과 시험받는 것은 종이한장 차이예요. 사실 요나서를 선택한 것은 저를 위해서 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저 때문에 한 것입니다.

그런데 권사님도 집사님도 저도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면 이거 얼마나 수지맞은 거예요. 꿩먹고 알먹고, 도랑치고 가재치고, 누이 좋고 매부좋고, 또 없습니까? 저를 위해서 한 것인데, 제가 먼저 요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고, 새로워지기 위해서 한 건데, 성도들이 나를 위해서라고 했다면 이거 얼마나 감사한 일이예요? 그 날이 바로 오늘이지. 그런 은혜로 주님, 나를 위해서 말씀을 준비하셨군요. 그리고 그날이 오늘이 되는 날이예요.

요나서가 나를 위한 말씀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2005년도에 많이 힘들었는데, 2006년도에는 아주 많이 생기가 넘쳐요. 사실 저는 고기를 못 먹지 않습니까? 이제 안 먹는 것이지요. 그래도 하나도 억울하지 않아요. 다니엘서를 보니까 채소만 먹어도 늘 얼굴에 생기가 넘쳤다고 했잖아요. 우리 친구 목사님들이 얼마 전에 만났더니 ‘얼굴에 광채가 나네.’ ‘나 고기도 안 먹는데..’ ‘다니엘처럼 되나.’ 이런 위로의 말씀을 해 주시더라구요.

제가 아주 용기백배고, 힘이 나요. 지난 첫 주에 기획위원회 헌신예배 하면서 기획위원분들이 작정을 해 주셔서 제가 얼마나 힘이 나는지 몰라요.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요나의 전의 모습, 자기와의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대로 요나가 도망치려던 모습,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던 모습, 그래서 다시스로 떠나던 요나,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요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요나가 필요하셨기 때문에 요나가 환란과 역경과 시련을 통해서라도 다시금 요나를 붙잡으시고, 세우시고, 일으키셔서 이제 요나는 3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다시 가던 발걸음 돌려서 니느웨로 가더라. 여러분의 발걸음이 니느웨로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어나라라고 하는 것은 지금 있는 우리의 자리가 주님께서 마음이 안 드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그 길이 주님이 기뻐하는 길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순종의 길이 아니고, 그것은 사명자의 길이 아니고, 그것은 헌신의 길이 아니라는 거예요.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자리정돈 할 때 다시 일어나서 해야 되지 않습니까? 일어나라는 거예요. 주님께서 가라라는 것입니다. 어디로? 니느웨로... 사명자로....

그 자리, 죄악이 관영하는 자리, 더러운 자리인데요. 그래도 가라는 거예요. 오염되지 않은 자리, 우리 가까운 목사님 한 분이 파주에서 사역을 하시는데, 파주는 1사단 주변에 유명한 윤락여성들이 사는 용주골이라는 지역이 있어요. 마을 한 복판에 교회가 있어요. 유혹하지 않을까, 타락하지 않을까, 교회의 그 여성들이 많이 나온답니다. 전도하면 대략 주민들은 알지요. 전도하면 교회 나온다는 거예요. 그리고서 감사헌금을 드린데요. 십일조를 드린데요. 십일조 드리면 어떻게 기도해 주지? 사업 잘 되게 하옵소서. 그렇게 축복하나? 하루에 두명 만나는걸 세명 만나게 하옵소서. 아휴, 그건 아니지요.

그건 무슨 프로그램에 하느냐면 새로운 직업을 알선해 주는 그런 프로그램을 해서 교회에서 말씀으로 신앙의 기초를 쌓으면서 새로운 직업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삶의 모습으로 바꾸어주는 그런 역할들을 합니다. 니느웨가 더럽다고, 죄악이 관영한다고, 악독이 심하다고 우리가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로마시인 데노톨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햇빛은 하수구까지 고루 비추지만 햇빛 자신은 더러워지지 않는다. 우리가 어둠 속을 향해서 죄악의 세상으로 향해 가지만 하나님의 자녀들, 빛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염되지 않습니다. 오염된다면 그건 빛이 아니었지요. 빛을 가장했을 뿐이지 빛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은 사명의 자리로 가라는 말입니다.

2006년도 여러분에게 주신 많은 사명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요나처럼 엉뚱하게 다시스로 피해가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신다면 그냥 두지 않겠지요.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꺾어서라도 쓰시겠지요. 저는 이번에 다시금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이제 주님, 내 생각 접고, 내 방법 접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당신 뜻 대로 달려가겠습니다. 그 니느웨가 사흘길이나 되는 고단하고 피곤한 길이지만 그 전에는 그 길이 사흘길이라 이런 저런 이유가 많았어요. 이제는 기쁨으로 한 걸음에 달려가요.

2006년에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사명의 자리, 한 걸음에 달려갈 수 있는 평안의 사명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가치관에 극심한 변화로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무엇이 주님의 사람들이 가야할 길인지 헷갈리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주의 말씀을 붙잡고서 살기 원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고백했던 믿음의 선진들처럼 이 혼탁한 시대에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주님의 말씀대로 사명의 자리로 가기를 원합니다. 가면서 불평하고, 가면서 원망했던 우리들이 있다면 이제는 가면서 기뻐하며 기쁨으로 달려가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사랑하시기에 많은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붙잡아 주셨고, 일으켜 주셨습니다. 오늘 하나님, 주님의 말씀으로 힘입어 새로운 사명으로 달려가는 요나처럼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새힘을 가지고 달려갈 수 있도록 독수리와 같이 날개치며 올라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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