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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광의 하나님, 나타나시다 (행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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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 두 조상을 낳으니라. 사도행전 7:1-8.

  최근에 미국에는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에 대한 큰 논쟁이 일고 있습니다. 지적 설계론이란, 우주와 생명체는 저절로 생겨날 수 없고, 고도의 지적 존재가 디자인하여 생겨났다는 학설입니다. 우리의 눈을 봅시다. 그 생김새나 각막구조를 살펴보면 최고의 기술로 만든 그 어떤 렌즈보다 더 뛰어납니다. 시간이 아무리 오래 흐른다 해도 눈과 같은 정교한 조직이 우연히, 또는 저절로 생겨날 수 있을까요? 어느 학자는 확률적으로 볼 때 이런 세밀한 구조가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우주와 자연과 생명체에는 엄청난 디자인이 들어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뛰어난 설계는 오직 지식과 지혜로 과학을 꿰뚫고 있는 능력 있는 디자이너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도시 도브의 교육위원회에서 이 학설을 과학교과서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논쟁 후 투표에서 져 축출을 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지난주에 미국의 CNN 뉴스 등 여러 매스컴을 통해 큰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한편 부시 대통령은 우주의 시초에 대해서는 본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과학교과서에 두 학설의 과학적 증거를 모두 실어 학생들이 함께 볼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며 지적 설계론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지적 설계론을 종교로 보고 왜 과학교과서에 종교를 넣으려 하느냐며 전국적으로 재판을 신청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진화론과 지적 설계론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물론 도저히 알 수 없고,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다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도 있지만, 주된 입장은 이 두 가지입니다.

  진화론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가스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태초에는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가스로 충만해있었으며, 이 가스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압축되고 폭발(Big Bang)하여 물질들이 흩어짐으로써 하늘에 수십억 개의 별들이 생겨났고 지구도 그때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또한 원시대기의 부글부글 끓는 화합물의 혼합체(primordial soup)에 번개가 내리치니 거기서 유기물질이 생겨났고, 우연히 단세포생명체가 생겨나더니, 하나가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되더니, 어느 날 암컷과 수컷으로 나뉘었다는 것입니다. 기적이 많이 일어났지요. 이처럼 진화론이 내세우는 증거들이 서로 잘 연결되지 않고 그 과정들이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에, 요즘 수많은 과학자들과 지성인들도 진화론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진화론을 믿느냐는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미 중부지방인 인디애나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이 주제로 토론회를 열기 위해 지적 설계론을 주장하는 과학자 한 분을 초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지적 설계론자와의 토론회에 나서는 진화론 학자를 찾기가 아마 힘들 것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인디애나에 있는 대학들과 과학관련 연구소들의 과학자들에게 토론자로 참석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과연 그의 말처럼 아무도 나서지를 않아 결국 토론회가 아닌 초청강연회가 되고 말았지요.

  지적 설계론이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벽돌 수백만 장을 공중에서 떨어뜨린다고 저절로 할렐루야 교회 건물이 지어질 수 있을까요? 건축에 대한 설계사의 아이디어와 계획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아이디어는 사람의 머리에서 나오는 거죠. 또 설계를 이해하고 그대로 시공할 수 있는 각 분야의 엔지니어들이 있어야 됩니다. 원숭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아무리 오래 자기 맘대로 두드린다고 해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나오겠습니까? 셰익스피어라는 지적인 천재가 있었기에 리어왕 같은 작품도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주와 생명체와 우리 인간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것입니다.

  진화론과 지적 설계론이 있어서 우리가 선택해야 하듯이, 우리의 인생에도 매순간 선택해야 할 대상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교회에 오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교회에 온 것입니다. 골프치기로 선택한 사람은 골프장에 가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선택하며 삽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스데반이 선택에 대해 말하기 위해 먼저 이스라엘 역사를 얘기합니다. 대제사장은 “이것이 사실이냐?”(행7:1)며 사실을 확인하려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6장 뒷부분을 보면, 유대교 지도자들은 나사렛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헐고 다시 짓는다고 했다느니, 모세 율법을 다 고치겠다고 했다느니 하며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겠다고 하신 적은 있으며, 모세율법의 참 뜻을 바로잡아 설명하신 적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거짓 고소하여 죽였던 그들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스데반마저 죽이기 위해, 없는 말은 만들고 있는 말은 왜곡하였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거짓으로 만들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참과 거짓 중에서 거짓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며 무엇을 선택할지 스스로 결단해야 합니다. 진화론자들은 우주가 시작되던 순간에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진화에 필요한 오랜 기간 동안 지켜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사실은 그들도 모릅니다. 그들은 그저 진화론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기는 싫으니 하나님 없이 우주를 설명해야 했고, 그래서 그저 생명이 저절로 생겨나 오랜 시간에 걸쳐 이렇게 저렇게 진화되었다고 믿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선택입니다. 우주만물에 대해 설명한 것 중 어느 쪽이 더 설득적인 학설인지를 보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물리적 세계는 진화론자들에게만 열려있는 것도 아니고 창조론자들에게만 열려있는 것도 아니며,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우주와 생명체가 우연히 저절로 생성되었다는 해석을 선택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해석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바늘 끝보다 작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 합쳐지고 거기에서 무려 206개의 뼈가 생성되는 일이 어떻게 저절로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몸 안에 미국전역을 세 번이나 왕래할 정도로 긴 핏줄과 오장육부(五臟六腑)가 너무도 절묘하게 연결되도록 디자인이 되어 있는데, 어찌 이를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주가 생성되던 자리에 우리 중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확실히는 모르지만, 두 주장 중 더 합리적이고 현실적 설명을 한다고 판단되는 지적 설계론에 정당성을 실어주기 시작하자 진화론자들은 반발하고 나섭니다. 결국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스데반은 “이것이 사실이냐?”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고, 그 대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삭, 야곱, 열두 지파, 요셉, 모세 및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람들, 솔로몬의 성전건축과 할례 등 장구한 역사 이야기를, 예수님을 죽이고 지금 자기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해줍니다. 그 긴 설명의 요점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과 만나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과 못 들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순종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 두 갈래의 인류역사의 흐름을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긴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순종한 사람과 불순종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2절). 여기에서 “부”는 어른들이요, “형”은 형제들입니다. 즉 동족과 친척과 동창생들을 말합니다. 그 중에는 하나님을 선택하여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은 공부를 못했거나 무식하거나 옛날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 현대인들입니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필라델피아 템플대학에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책에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무식한 사람들이다. 현대인이라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썼습니다. 그것을 읽고 제가 속이 상해서 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만 현대인이냐? 우리도 현대인이다. 당신이 커피 마시고 자동차를 타는 것처럼, 우리도 커피 마시고 자동차를 탄다. 어떻게 현대인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할 수 있는가? 받아들이고 싶은 사람은 받아들이고 당신처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뿐이다. 현대인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옛날 사람은 받아들인다는 말인가? 내가 구식이란 말인가? 당신처럼 나도 박사학위가 있으며, 오히려 당신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처럼 당신의 학위가 내 학위보다 더 오래 됐다.’ 이렇게 썼습니다.

  신앙도 개인적인 선택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섬기며 순종하며 삽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 그 음성을 듣고도 순종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삽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1-3). 이 이야기를 듣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이 될 것이지만,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한 말이지 나와는 상관없어’ 하는 사람들은 그 축복과도 아무 상관이 없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고 순종하여 따르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믿음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행7:4).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창12:4). 75세에 옮기라면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분당에서 수지로 옮기라면 괜찮겠지만, 한국을 떠나 저 케냐로 가라 한다면 보통 곤란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26년을 살다가 51세에 한국에 돌아오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미국에 대해서는 손바닥처럼 훤히 알고 있는데 막상 한국에 와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저의 그 때 사진을 보며 웃기도 하지만, 제가 아직 젊었던 51세에 한국에서 재출발하라 했을 때도 결정을 내리기 힘들어 2년2개월이나 걸렸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75세에 떠나라고 했는데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는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주로 노인들이 “아멘!”하시는 것 같네요. 최근 60을 바라보는 어떤 집사님의 출판사 개업예배를 드리면서 제가 신이 났습니다. 나이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언제나 떠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바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이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듣고 순종하는 사람과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될지 여러분이 선택해야 합니다.

  둘째로, 노예들과 노예들을 핍박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400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6절) 하였습니다. ‘그 씨’는 야곱의 후손들을 가리키고, ‘다른 땅’은 애굽을 가리키는데, 과연 하나님의 말씀대로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왕이 나타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고생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고생을 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생을 시키는 사람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고생을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는 누가 여러분을 고생 시킵니까? 나는 고생을 시키는 사람이 되지 않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구해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일평생 모든 일에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때를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의 선과 의와 섬김을 선택해서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의 은총이 풍성히 임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있고 축복의 대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또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7절)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던 애굽은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듣지 않다가 열 가지 재앙을 다 받고 마지막에 모든 장자가 죽는 비극까지 당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을 고생시키는 사람들이 절대로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많은 선택을 통해 결정을 해야 되며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이여, 나도 아브라함처럼, 일평생 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복을 얻게 하옵소서.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사 예수 믿게 하신 그 목적이 내 삶에서 현실적으로 이뤄지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가 우리 입술에 선택되어야 합니다.

  넷째로,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않은 자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전에는 할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8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아브라함 때부터 할례를 시작했습니다.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8일 만에 할례를 하여 몸을 깨끗하게 해줬습니다. 할례란 ‘이 아기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사랑하시는 아들인 줄을 내가 믿습니다’라는 하나님과의 약속의 표시입니다. 오늘날 유아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아기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영원히 축복하신 아기인 줄로 우리는 믿습니다’라는 표현입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좋은 것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할례도 받지 않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아들에게 할례를 시행함으로써 자기의 신앙을 표현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분이 계시면 주저하지 마십시오. 세례는 간단한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거나 완전하다거나 부족함을 극복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는 죄인인지라 나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영생의 선물을 고맙게 받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혹시 담배를 끊지 못해서 세례를 안 받고 계십니까? 담배는 몸과 상관있지 세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에 결단하여 예수님을 믿기로 선택하고 세례 받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금연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섯째로, 죽이는 사람과 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할례 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가 있고, 아브라함의 집안에 사라와 하갈이 있으며, 이삭이 있는가하면 또 이스마엘이 있습니다. 언제나 두 길입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났기 때문에 지난주에도 수십 명이 폭탄테러로 죽었습니다. 이스마엘의 후손인 아랍인들이 세 개의 호텔에서 폭탄을 터트려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죽이고 어떤 사람은 살립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근본이신 하나님과 함께 생명을 살리는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어떤 세계관을 갖고 살 것인지 직접 선한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있는가하면 에서도 있었습니다. 아랍사람들은 에서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안에도 두 그룹이 섞여 있습니다. 요셉이 있는가하면 요셉을 팔아넘긴 형들이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처럼 동생을 죽이려 하다가 노예로 팔아넘기는 등 사람을 죽이는 부류가 있고, 요셉처럼 고난을 받으면서도 자신과 가족과 부모형제들과 애굽과 이스라엘을 살린 것처럼 자신이 속한 세계를 살리는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과 뜻을 선택한 우리들은 요셉과 같이 언제나 사람을 살리는 선택을 하며 살기 바랍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맘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새롭게 선택하십시오. 영원한 천국의 축복인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선과 의와 사랑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결국, 매일 매일이 선택입니다. 여호수아가 “오늘날 택하라” 하는 자기 질문에 스스로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대답한 것과 같이, 여러분 모두에게도 이런 선택과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김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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