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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진짜 성도인가? (눅 23:5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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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어둠입니다. 절망입니다. 더 이상 무엇도 바랄 것이 없습니다. 모든 꿈도 희망도 다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지경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때때로 부딪치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우리는 몸부림을 칩니다. 하지만 도무지 어떤 길도 방법도 보이지를 않을 때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살아있다고 하는 것이 고통스럽게만 느껴집니다.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이럴 때 죽음을 생각합니다. 차라리 죽는다면 더 이상 그 어떤 고통도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오히려 죽음이 눈앞에 보이기에 더 두렵습니다. 더 절망스런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지금 십자가 앞의 상황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빚어지는 오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가 있겠습니까?

절망 속에 보이는 참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난 직후에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를 장사 지낼 수 있도록 시체를 내어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을 가만히 살펴보면 예수의 시체를 장사지낼 수 있도록 내어달라고 하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는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했다고 해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유대 관원들로부터 고발을 당해 십자가에 달려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가장 큰 죄악이라고 여기는 신성 모독죄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의 가장 잔혹한 처형 방법인 십자가에 못 박도록 요구를 했던 것이요 결국 그들의 아우성에 빌라도가 두 손을 다 들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명령하지를 않았습니까?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대역죄인보다 더 큰 죄인입니다. 그리고 이렇듯 신성 모독죄로 처형을 당하는 사람은 그 자신뿐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도 제대로 머리를 들고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온 가족이 다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죄인을 장사지내도록 시체를 내어달라고 하니 이 사람이 도대체 제 정신이 있는 사람입니까?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요청한 사람의 신분입니다. 이 사람은 공의회 회원이고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공의회 회원이 누굽니까? 우리네로 말하면 국회의원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보통 산헤드린 공의회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최고의 지도층입니다.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자기 온 가족이 다 망할 수도 있는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평소의 살아가는 모습이 많은 사람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인 것을 그가 공의회 의원일 뿐 아니라 그에게 대해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하는 말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누구도 그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존경을 한 몸에 받아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공의회 의원도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지금가지 쌓아온 명성은 어떻게 하고 자기 집안을 또 어떻게 하고 그렇게 무모할 정도로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할 수가 있었느냔 말입니다.

그가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예수는 이미 죽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백성들 앞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던 예수입니다. 그의 말씀이 비록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에게 반감을 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 말씀을 들으면서 요셉의 마음에 어떤 감동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의 상황은 그가 앞으로 나서야 할 상황이 아닙니다. 자칫 예수와 한 패거리로 몰려 같이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자기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명성과 부귀가 하루아침에 다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를 따르던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를 따르며 그 앞에서 배웠던 제자들조차도 다 도망쳐 버리고 몸을 숨긴 상황입니다. 그만큼 죽음이 두렵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지금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장사하도록 내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살아있다면 그래도 무언가 예수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는 기대라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예수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다 끝이 났습니다. 더 이상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금이야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믿고 있지만 그 당시는 전혀 그렇지를 않지 않습니까? 그 누구라도 예수가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믿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사람들이 슬퍼하고 절망했던 것이 아닙니까? 오히려 제자들처럼 지금까지 예수를 믿고 따랐다고 해도 몸을 숨기는 것이 당연할 텐데 거꾸로 누구도 예수를 따르고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모든 것이 끝난 지금 나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요 하고 자기 정체를 드러낸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오히려 당당하게 예수의 시체를 내어 달라고 하여 아무도 장사지낸 적이 없는 새 무덤에다가 예수를 정성껏 장사지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짜 믿음의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무엇이 진짜 믿음입니까? 모든 것이 좋을 때는 참 믿음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전도도 열심히 하고 봉사에도 앞장서고 하여간 모든 일에 본이 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어려운 일이 닥치기라도 하면 그 좋던 믿음의 모습은 다 어디로 간 것인지 모를 정도로 헤매는 사람들을 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어려운 상황에서 오히려 담담히 믿음을 지켜나가는 그런 사람도 보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이 진짜 믿음의 사람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말로는 죽음에 이를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도 버리지도 않겠다고 다짐하던 제자들이 지금 다 어디 있습니까? 그들만큼 믿음이 좋은 사람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계속해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준비가다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하지만 막상 어려운 상황이 되니까 그들은 다 도망쳐 숨어 버렸습니다. 한데 거꾸로 전혀 예수와는 상관도 없는 것 같았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그의 평소의 살아가는 모습만으로도 많은 사람의 본보기가 되었던 그 사람이 이런 어려운 때에 오히려 나는 예수의 제자요 하며 자기를 선전하는 것처럼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표면적인 신앙인이 참 신앙인이 아니라 내면적인 신앙인이 참 신앙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가지고 그 사람의 믿음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여기서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평소에 그렇게 믿음도 좋고 많은 은사와 은혜도 넘치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이 어려운 때를 만나 형편없이 망가지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평소에는 우리 목사님 우리 목사님 하다가 목사에게 어떤 허물이라도 보이고 목사가 어떤 어려운 지경에라도 빠지게 되면 오히려 나 몰라라 하거나 아니면 거꾸로 앞장서서 죽이려 덤벼드는 것이 우리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이 아니던가요?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위험한 사람이라고 하는 말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평소에는 전혀 교회 일에는 관심도 없는 것 같고 전혀 믿음의 사람 같이 보이지도 안았는데 교회가 어려운 때에 목사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오히려 앞장서서 교회를 지키고 목사를 지켜주는 그런 사람들도 봅니다.

그렇다면 누가 진짜 믿음의 사람입니까? 어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을 도와 세워주는 자입니까 아니면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참 더러운 꼴을 다 봤다고 하며 그럴 수가 있느냐고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 사람입니까?

오늘의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소위 코드정치라고 해서 내편 네편 편 가름을 하는 시대가 아닙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좀 잘못되었어도 감싸주지만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라면 내 그럴 줄 알았어! 하고 난도질을 해대는 것이 현실 아닙니까? 아니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고 해도 내게 손해가 닥칠 것 같으면 모른 척하고 돌아서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던 지요? 아니 그냥 모른 척 하고 돌아서는 것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앞장서서 죽이려고 대글지는 않는지요? 그래요 그게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세상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서도 자주 보게 되더란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향남 교회 성도들은 끝까지 서로를 감싸주고 보다듬어주고 베풀어주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분들이 있을 때 서로 도와주려고 하고 약한 분들이 있을 때 서로 붙들어주려고 하고 부족한 분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려고 물심양면으로 돕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도 어려우면서도 앞장서서 주의 일을 하며 다른 사람들을 도와가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주님도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요 그것이 바로 참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사랑을 우리까리만 나누고 그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 사랑을 주위로 두루 펼쳐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압니다.

정망 속에서 희망을 볼 줄 아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때때로 연약한 내 자신을 보면서 참으로 힘들 때가 있습니다. 나 같은 것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시험에 들고 마음 상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아니 실제로 나 때문에 어려움 당하는 사람들을 보게 될 때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나 아니면 저들이 저런 어려움도 당하지 않을 텐데 내가 조금만 더 능력이 있었어도 내가 조금만 더 지혜로웠어도 내가 조금만 더 생각했어도 내가 조금만 더 조심했어도 내가 조금만 더 바로 섰어도 저들이 저런 어려움을 당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면서 가슴을 칠 때도 많습니다. 그러다보면 무언가 내게 기회가 주어져도 자신이 없습니다. 나 같은 것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못해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죽음이 끝입니까? 아닙니다.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를 않는 어두움 속에 있습니까? 어둡다고 하는 것은 곧 밝아진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새벽이 가까울수록 더 깜깜합니다. 하지만 눈 깜짝 할 사이에 밝은 아침이 됩니다.

지금 상황이 절망입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나빠질 것이 없지를 않습니까? 그러기에 우리 앞에는 이제부터는 좋아질 일밖에는 없다고 믿으십시오. 지금 모든 상황이 좋습니까? 그렇다면 계속해서 모든 것이 좋을 것이라고 믿으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없습니다. 죽었기에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이 됩니까? 그렇다면 주님이 그런 나를 더 귀하게 여기신다고 믿으십시오. 나는 약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요? 그렇다면 주님이 나를 강하게 해 주신다고 믿으십시오. 아니 주님이 나의 능력이 되심을 고백하십시오. “지혜가 부족하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요 주님께서는 나의 모든 부족한 부분을 풍족하게 채워주시려고 모든 것을 다 준비하고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그분 앞에 우리는 당당히 설 수가 있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 나처럼 부족하고 연약하고 죄 많은 사람을 위해 주님이 죽어주시지 않았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은 공의회 의원이었습니다. 그는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의회의 결정과 처사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는 그 결정과 처사에 찬성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 결정과 처사가 잘못되었노라고 항변하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입니다. 어찌 보면 그렇게 비겁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마도 가슴을 쳤을 것입니다. 내가 그때 용기 있게 입을 열어 그들의 결정이 부당하다고 항변만 했더라면 결과가 달라질 수고 있었을 텐데 아니 결정이 뒤바뀌지는 않는다 해도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을 텐데 하면서 후회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라도 떳떳하게 자신을 밝히고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후회하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하고 지금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나섰던 것이요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정중하게 장사를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그래서 믿음은 결단이요 용기입니다. 마음만 간절했지 입에서 맴맴 돌기만 하고 그저 집어 삼켰던 사랑한다는 말을 입을 열어 고백하는 것 역시 용기입니다. 사랑하는데 왜 사랑한다고 할 수 없는 것일까요? 베풀어야 한다면 주저 하지 말고 베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단하지 못하고 입을 열어 내가 너를 용서한다고 말할 수 없었던 것도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차마 그것을 결단하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이제는 입을 열어야 합니다. 더 이상 지나 놓고 나서 후회할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 같은 것이 무얼 할 수 있겠느냐고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지명하여 불러 자녀를 삼으셨고 우리에게 아름다운 이름을 주셨으며 우리를 아름다운 보배로 삼으시며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짙은 구름을 거두듯이 없애버리셨고 우리 죄를 안개처럼 사라지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네가 비록 나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는 너에게 필요한 능력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우리를 죄에게 풀어주시기 위해서 내 대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약속하신대로 영광의 자녀가 되었고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도가 되었으며 이제 나의 모든 부족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내게 모든 필요한 능력을 주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나의 약함 때문에 우리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주저하며 나는 못한다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요? 우리는 약속을 따라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기를 위해 간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죄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으며 연약하기에 더 기쁨으로 주님을 섬겨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연약하기에 십자가입니다. 내가 부족하기에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모습 그대로 부족한 모습 그대로 상처로 가득한 나의 모습을 안고 그대로 주님을 따를 때 주님께서는 나를 씻겨주시고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혀 주시며 친히 내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나의 부족하고 연약함을 인해 더욱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더욱 주님을 기쁨으로 섬기며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일에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고백하던 이사야의 고백처럼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고백하며 주님과 교회와 이웃을 섬겨나가는 하나남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은 죽은 예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주님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의 능력이십니다. 그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욱 주님만 바라보시고 주님의 약속을 따라 간구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연약하고 부족하기에 더욱 감사함으로 주시는 사명을 따라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연약해 보여도 비록 부족해보여도 내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며 충성하는 그 모습을 주님은 기뻐하며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내게 필요한 모든 것으로 채우시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요 주님 앞에 충성하고 헌신하는 순종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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