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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곱 번의 승리 (눅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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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어 가면서 그 만남이 아름다운 관계로 이어지기를 모두가 바랍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살면서 부딪치는 많은 사연들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기도 하고 더욱 밀착되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돈이나 권력 때문에 만나는 사이라면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고 들기에 결국에는 이해 관계에 따라 서로 갈라서기도 하고 서로 밀착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계속 이어지면서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 싶으면 가까워졌다가 손해가 된다 싶으면 멀어집니다. 하지만 멀어졌던 사람도 상황이 바뀌어서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 싶으면 또 다시 가까워지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가까웠던 사람도 자기에게 더 이상 유익이 되기보다는 손해가 된다 싶으면 슬그머니 멀어지고 맙니다.

하지만 믿음 안에서의 만남은 다릅니다. 주님 사랑 안에서 만났기에 때로는 실망하여 넘어지기도 하지만 은혜 안에서 다시금 일어서고 하나가 되는 모습을 주위에서 흔히 보게 됩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과 사랑을 나눌 수 있겠는가 싶은데 은혜와 사랑이 나를 사로잡게 될 때 지난 상처는 언젠지 모르게 다 씻겨 나가고 아픈 상처가 있었기에 더욱 사랑이 귀하고 더욱 은혜가 귀하고 서로 하나가 되는 감격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 이야기에 이어서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주시는 말씀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고 어떻게 사랑을 나누면서 살 수 있는지 어떻게 은혜로 승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들이 생기지 않을 수는 없다”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일년을 살아도 사시사철이 있고 금방 비가 퍼붓다가도 언제 그랬냐 싶게 햇빛이 비쳐들기도 합니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나가다 보면 별별 일을 다 만나고 겪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에 나 혼자 사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함께 살아갑니다. 좋든 싫든 우리는 매일 같이 많은 사람을 직접 간접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함께 만나게 되고 함께 지내는 동안에 그만 상처를 받게 되는 일들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가장 잘 안다 싶고 가장 가깝다 싶은 부부 사이에도 왜 그렇게 다른 것이 많은지요? 생각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똑같지를 않습니다. 행동하고 말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실제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적극적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내다 보니 그것이 오히려 상대방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너무 자신을 표현하지 않고 안으로만 안으로만 품고 있다 보니 또한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서로 코드가 맞지 않다 보니 그것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내 자신이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물론 그 상처가 드러나기도 하고 속으로 감춰지기도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상대방에게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서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면서 살아가더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아픔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왜 상대방으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것일까요?
우리는 흔히 이건 상대방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모든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깁니다. 반면에 모든 책임을 자기 혼자 떠맡는 그런 사람도 혹간 있습니다. 어떤 쪽이든 간에 우리가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느 쪽의 책임이든 간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따집니다. “무엇 때문이냐? 왜 그랬느냐?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느냐?”를 따집니다. 하지만 이럴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원인과 결과를 먼저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말하기 전에 내 안에 있는 나에게 모든 원인이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내 안에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던지요?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이 제물을 드릴 때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셨지만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을 반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몹시 화가 나서 얼굴빛이 달라졌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빛이 달라지는 까닭이 무엇이냐?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결국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 제물을 반기지 않으셨던 것은 그가 올바른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반기시도록 드리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요나를 보세요.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셔서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할 때 요나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도 싫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하시는지 그 이유를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자기 생각에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역하고 멀리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결국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것입니다.

반면에 호세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순종합니다. 방탕한 아내를 끝까지 감싸 안습니다. 심지어는 돈까지 주고서 다시 되찾아 옵니다. 그뿐입니까? 불륜을 통해서 낳은 자식까지 자기 자식으로 받아들여 키웁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결과를 말하지만 그러나 그 모든 원인은 내 안에 있었습니다. 내가 죄인이요 내가 교만한 자요 내가 불순종하는 자입니다. 나는 말씀대로 산다고 하지만 어느 순간에 돌아보니 내가 판단하는 자요 내가 심판하는 자요 내가 외면하는 자요 내 안에는 온갖 추하고 더러운 것으로 가득하더란 말입니다. 주님은 사랑하라고 했는데 과연 나는 얼마나 진정한 사랑으로 감싸 안았는가? 겉으로는 사랑을 말하면서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저런 인간 차라리 나가 죽었으면 좋겠다 싶지는 않았습니까? 아니 나는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던 주님의 사랑을 과연 얼마나 실천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돌이켜 보니 모든 원인은 내 안에 있는 나에게 있었습니다. 왜 상대방이 넘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아니 그걸 생각하려고 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먼저 비난하고 외면하였습니다. 그리고 반쯤 죽어 쓰러지고 난 다음에야 무슨 큰 인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비로소 감싸 안지는 않았는지요?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버려두고 갔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치료해주고 데려다가 살길을 마련해준 사마리아 사람을 이야기하면서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누가 참된 이웃인지를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지를 않습니까? 우리도 이렇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들이 생기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러한 일들을 일으키는 사람은 화가 있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기 목에 큰 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그로 인한 화를 하나님께로부터 당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래서 내가 걸려 넘어졌다고 해서 나 역시 똑같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금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나를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것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스스로 조심하십시오. 그리하여 내 안에 있는 나 자신을 먼저 바로 잡으시고 다른 사람들을 바로 세워나가는 참 사랑의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반면에 승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가 아니라 승리하는 자가 되는 비결을 우리들에게 알려주십니다.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 주어라. 그가 네게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서 ‘회개하오’ 하면, 너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승리의 비결은 바로 사랑과 용서입니다. 감싸 안아주는 것입니다.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짓거든”이라는 말씀은 믿음의 형제도 얼마든지 잘못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죄를 지은 사람을 꾸짖어 바로 세워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세워주는 비결이 바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라는 말씀입니다. 아니 회개하였다고 하면서 어떻게 일곱 번씩이나 죄를 지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따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끝까지 감싸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요 그것이 바로 승리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어디 잘못도 한두 번이라야지 자그마치 하루에 일곱이라니 그것이 말이나 됩니까? 그것이 똑같은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각각 다른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루에 일곱 번이나 죄를 짓고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그가 찾아와서 자기가 회개한다고 말할 때 그 진심을 따지기보다는 끝까지 감싸주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감싸안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살아가면서 전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자동차를 몰면서 아무리 교통질서를 잘 지키고 법규대로 운전한다고 하지만 나도 모르게 속도를 위반하게 될 때도 있고 신호를 위반하게 될 때도 있고 원치 않는 사고를 내게 될 때도 있지를 않습니까?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딴에는 바르게 산다고 하는데 어느 틈에 보니 내 안에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시기 질투하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말씀대로 살아나가다 보면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서 저를 불쌍히 여기고 저를 위해서 중보기도하면서 바르게 살도록 이끌어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나도 모르게 “저런 놈은 차라리 죽는 게 더 낳아” 할 때가 있지를 않습니까? 아니 내가 바르게 살고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나도 모르게 나의 의가 되고 나의 자랑거리가 되는 때가 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도 모르게 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시지만 그래도 나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 안에 가득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그것을 자랑하고 있는 나를 볼 때가 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모습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고 그들을 걸려 넘어지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조차 우리는 모르고 살아가고 있지를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저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하고 십자가 위에서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지금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고는 그 밑에서 서서 지켜보면서 조롱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그들을 위한 용서를 비는 기도를 주님이 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도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가운데 죽어가고 있으면서 말합니다.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생각할 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아주 불경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죽어 마땅한 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누군지 잘 압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죄와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랑으로 감싸안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먼저 그렇게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릴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날마다 기도하지만 참으로 마음으로부터 그렇게 용서해주고 오히려 감싸 안아주고 있습니까? 입으로는 용서한다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멀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는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외면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저 사람 언제 또 그럴지 몰라 하면서 경계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아닙니다. 진짜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믿어주는 것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씩 잘못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다시 와서 회개한다고 말할 때 그를 용서해 주라고 하는 것은 다시 잘못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더 이상 상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더 그 사람을 붙들어 주고 그 사람을 믿어주고 그 사람을 위해서 축복하며 기도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혀 쓸모 없는 사람,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전해주게 될 때 그리고 그 사람을 감싸 안아줄 때 내가 주님으로부터 그 사랑을 받게 되고 내가 더 복된 인생을 살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욥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심하게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낼 때 그래도 가장 가깝다는 친구들이 찾아와서는 계속해서 돌아가면서 욥을 비난합니다. 위로해 주어도 모자랄 판에 비난만 해대는 친구들이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내가 친구라고 사귀었나? 이런 것들을 내가 지금까지 믿고 함께 살아왔던가?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 뵙게 될 때 저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그래 욥이 하나님께 친구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났더니 하나님께서 욥을 회복시키시는데 그것도 지금까지 저가 지녔던 모든 것의 갑절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모른 체 하고 지내던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전부터 저를 아는 친구들이 다 그를 찾아와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기뻐하면서 먹고 마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리신 그 모든 재앙을 생각하면서 그를 동정하기도 하고 또 위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저마다 그에게 돈을 주기도 하고 금반지를 끼워주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욥이 그런 형제 자매 친구들에게 어떤 섭섭한 말 한마디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기뻐합니다. 이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 사랑을 실천해 보이셨습니다. 주님께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면 이보다 더 큰사랑이 없다”고 친히 말씀하신 대로 그 사랑을 실천해 보이셨습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실천할 수 있습니까? 바로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서 ‘회개하오’하면 너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조건이 없습니다. 아무런 요구가 없습니다. 그냥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냥 안아주는 것입니다. 그냥 믿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승리의 비결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런 사랑의 실천자요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때때로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그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정말 그럴 수가 없는데 하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건 상대방이 볼 때도 그렇고 내 자신이 볼 때도 그렇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 땅까지 와서는 가뭄이 들어 살기가 힘들어졌다고 해서 애굽에 내려간 일이라든가 그것에서 목숨이 위태로울까 염려해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그런 일들이라든가 나중에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러고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수가 있는가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아브라함을 감싸 안으십니다. 오히려 그런 그를 더욱 복되게 이끌어가시는 것을 보면서 고개를 꺄우뚱하게도 됩니다. 그것은 비록 저가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을 하였으나 그러나 그 중심이 여전히 하나님께 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더 어처구니없는 사람은 모세입니다. 저가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전합니다. 그랬던 그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왜 구스 여인을 데려다가 함께 지냈는지 그 이유를 우리는 모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모세를 책망한 미리암과 아론의 행동이 오히려 당연합니다. 분명 모세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오히려 미리암과 아론을 책망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 일을 똑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요 또한 하나님께서 모세의 중심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때로는 실망스러울 때도 많을 것입니다. 때로는 속상할 때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나도 똑같이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를 끝까지 용서하며 위해서 중보하며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넘어뜨리는 자가 아니라 세워나가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한번 두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일곱 번 잘못한 사람이라도 일곱 번 용서하여 줌으로 한두 번의 승리로 그치고 실패자로 남는 것이 아니라 일곱 번이라도 승리할 수 있는 참된 사랑의 사람이요 참된 승리자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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