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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교회, 백성의 위로자 (사 40:1~2, 고후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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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새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지난해와는 다른 희망으로 열고 감사로 닫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새해 첫 주일부터 52주일 내내 복된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해 10대 뉴스는 정말 암울한 소식들이 더 많았습니다. 국내 10대 뉴스가운데는 황우석교수 논문 조작 사건이 단연 1위입니다. 그 외에도 불법도청, 사학법 개정 등 3대입법 강행 파문, 유전 행담도 의혹 사건, 전방 부대 총기난사 사건 등이었습니다. 좋은 뉴스로는 청계천 복원, 월드컵 6연속 진출과 박지성 돌풍 등이 있었습니다. 국제적으로는 파키스탄 강진 대 참사, 허리케인 미국 강타, 조류독감 공포 전 세계 확산, 프랑스 호주 인종 폭동 사건, 런던 연쇄 폭탄 테러, 국제 원유가 급 등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좋은 것은 새 교황 베네딕토 16세 선출 등이 고작이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세계는 고통당하고 있고, 세계적인 자연 재해가 많은 해였습니다. 그 가운데서 황우석 교수 논문 조작 사건은 연말을 침울하게 만드는 공공의 적이었습니다. 요즘에는 황 교수를 황구라 박사, 말짱 황교수라고 한다니 이것이 세상 인심인 듯합니다.

  뉴스가 대부분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고, 슬프게 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와중에 이렇게 새해는 밝았습니다. 우리에게 새해는 또 다른 기대를 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모두가 위로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위로받아야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는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구약의 위로라는 단어는 ‘네하마’, ‘탄후밈’이란 말입니다. 처한 곤경을 호전시키거나 슬픔이 변하여 기쁨 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십니다. 나훔이란 이름의 뜻은 위로자입니다. 느헤미야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위로하신다’ 입니다.

  신약의 위로란 개인적인 차원의 위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사역은 위로하심입니다. 위로란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이시스’인데 ‘파라칼레오’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이 말은 불러서 곁에 둔다는 뜻입니다. 불러서 곁에 두는 것이 위로입니다. 신약에 나오는 바나바라는 이름은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위로하다(comfort)는 말은 귀여워한다거나 버릇없게 기른다는 뜻이 아니라 확신을 준다는 의미인데 그것은 그분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내가 하는 일을 기뻐하신다는 확신입니다. 교회가 위로자가 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위로의 확인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확인하고 우리 교회가 신음하고 있는 사회와 국가의 위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이 백성의 위로자이십니다.

  고린도후서 1:3에는 말합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하나님이시요 모든 위로의 아버지이시며”.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위로란 모든 방법을 동원해 위로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지 위로하시려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에 우리가 위로자가 되는 근거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5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의 전달자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위로자이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의 위로자이십니다.

  성령님은 ‘파라클레이토스’이십니다. 위로자이시며, 대변인이시며, 도우미이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위로의 영이십니다. 시편 119:50은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고 합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위로자이시며 그분의 말씀이 위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분의 말씀을 통하여 위로 받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백성의 위로자이십니다 고난과 아픔과 영육의 번민과 모든 고통을 위로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고통당하는 백성을 보시며 가장 안타까워하십니다. 가장 아파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위로자가 되신 것을 감사드리며 우리의 위로의 근거와 힘이 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둘째, 하나님의 교회는 백성의 위로자입니다.

  고린도후서 1:6에는 말합니다. “우리가 위로 받은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우리가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위로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위로의 통로이십니다. 성령님은 위로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자가 됩니다.

  빌립보서 2:1에는 우리의 일 가운데 하나가 위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위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어야 하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내용입니다. 위로는 그리스도인의 필수과목입니다.

  이사야 40:1에는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합니다. 위로가 필수과목이며 하나님의 명령인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세상에 대한 위로는 신적 명령으로서 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아파할 때, 힘들어 할 때, 마음이 상할 때, 희망을 상실할 때 교회는 그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세상이 위로 받을 곳이 없어 방황할 때 교회는 그들에게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백성들이 깊은 절망감 속에 있습니다. 깜깜한 먹구름이 끼어 있습니다. 폭풍을 만나 고장난 배처럼 표류하고 있습니다. 구름 사이의 한 별이 보입니다. 그 별이 위로가 되고, 방향 잡이가 되고, 희망을 안겨줍니다. 교회는 이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내 백성”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위로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지 우리의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우리가 위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할만한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우리가 위로하기를 바랍니다. 성 프란시스의 기도문 가운데는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위로자입니다. 우리도 위로 받고 싶을 때가 많이 있지만 위로해야 합니다. 위로해야 하고, 위로하면 위로를 받습니다.

결론

  하와이 몰로카이에서 나환자들을 위하여 사역하던 다니안 신부는 나병에 걸려 세상을 떠납니다. 1936년 벨기에 정부의 요청으로 다미안 신부의 시신은 그의 고향 땅에 옮겨졌습니다. 몇 년이 흐른 후에 몰로카이 사람들은 사랑하는 신부님의 일부라도 그들에게 되돌려 달라는 요청을 벨기에 정부에 하였습니다. 그들은 다미안 신부의 오른팔을 다시 얻게 되었습니다. 모든 이들이 그들을 배척할 때 그들을 어루만져주고 위로해주며 안아주었던 바로 그 손이었습니다. 위로자는 위로 받습니다. 위로자는 백성의 존경을 받습니다. 위로할 때에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손은 위로하는 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발은 위로하는 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은 위로하는 입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위로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있으므로 백성이 위로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도 위로 받아야 하지만 위로함으로 위로받는 하나님의 위로가 충만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 해 내내 우리의 삶이 위로하는 삶, 위로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위로로 우리 국가와 민족이 다시 치유되고 새 힘을 얻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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