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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에 봉사하라 (고전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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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이 한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한 사람을 소개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람은 노벨상을 수상한 물리학자였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가 물었습니다.“당신은 이름난 물리학자인데 왜 교회 청소를 하고 계십니까?”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내 안에 계신 그분이 청소하게 하십니다.”방문객은 다시 물었습니다.“당신은 어떻게 물리학자가 되셨습니까?”그는 또 이렇게 대답합니다.“내 안에 계신 그분이 나로 물리학자가 되게 하셨습니다.”말할 때마다 자기보다 하나님을 내세우는 신앙 앞에 이 사람은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람의 모습입니다.

어떤 교회를 짓기 위해 기초 공사를 할 때 하루 종일 걸려서 축대를 쌓아 올렸는데 일을 마칠 무렵이 되니까 하늘에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세차게 쏟아질 것만 같았습니다. 현장에 나와 있던 목사님과 여러 성도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비가 내리게 되면 하루 종일 쌓아올렸던 축대가 무너질지도 모를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교회 장로님 한 분이 슬며시 현장에서 사라지더니 잠시 후 이부자리를 가지고 건축 현장에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장로님은 다른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금방 쌓아올린 축대 밑에 이부자리를 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시더니 그 자리에 이부자리를 덮고 누워버리시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장로님의 뱃심 좋은 데모에 놀란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교인의 대표로 기름부음을 받은 장로가 죽음을 각오하고 축대 밑에 자리를 폈는데 비를 막 내리시려던 하나님께서도 웬만하면 계획을 바꾸지 않으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역시 그날 밤에 비는 내리지 않았고 축대도 무너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장로님의 생명에도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지 않으신 것은 순전히 그 장로님의 데모 때문이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 장로님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확실하게 고백하는 철저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존경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충성된 종들은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노벨상을 받은 한 물리학자는 자신의 존재는 오직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을 고백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큰일을 맡기심도 하나님으로 인한 것임을 고백합니다. 축대 밑에 이부자리를 펴신 장로님도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알지 못하고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충성된 종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먼저 생각하고 생활 속에서 본을 보여 주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도 나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고백하기를“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딤전1:12)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도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으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임을 알고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하는데 그러기위해서는 깊은 명상과 기도의 시간을 가지면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가 자신의 정체성 파악입니다. 내가 누구냐는 겁니다. 나의 존재에 대한 정체성이 확실해지고 이것이 크게 느껴지면 그 다음에는 다른 어떤 일들도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 자기 정체성 파악이 시원치 않기 때문에 별의 별일로 휘청거립니다. 사느니, 죽느니. 조금 뭘 됐다고 해서 교만했다가 좀 안 된다고 해서 자살한다고 야단입니다. 이게 뭡니까? 왜 이렇습니까? 정체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내가 누구냐”하는 것이 아직도 확실치 않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위치파악입니다. 하나님 앞에, 교회 앞에, 이웃 앞에 그리고 모든 관계 속에서 언제나 내 위치가 어디냐를 아는 겁니다. 세 번째는 사명파악 입니다. 내게 맡겨진 사명이 뭐냐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왜 세상에 나를 냈으며 내 일생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기를 원하시는가?’하는 이 절대적 이면서도 개인적인 사명, 이것을 알고 여기에 내 충성을 다하되 생명을 바칠만한,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그런 확실한 사명의식을 가지고 출발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먼저 정립되어지고 그 다음에 행복이 무엇이냐를 생각해야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실해졌다면 이제 여러분은 행복해야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디에서 행복을 찾습니까?
일반적으로 가장 보람 있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누구냐고 말할 때는 세 가지를 늘 생각합니다.

첫째는 자기가 꼭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말은 무슨 일을 하든지 즐거운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일은 피곤합니다.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은 모든 능력을 다 소진시킵니다. 자기의 능력을 극대화 할 수 있는 길은 기쁨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아 속에 행복이 있다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해서는 아니 될 일을 즐겨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후회가 없습니다. 피곤도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마지막 일을 하는 자가 행복합니다. 자기의 마지막 할일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 일을 위해서 일하다가 여기서 끝내는 것, 그가 행복합니다. 후회 없이 여기까지 달려왔고 이제 곧 골인 지점이 보이는 마지막 코스를 뛰고 있는 행복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런 진정 행복한 일들을 찾아서 그 속에서 행복을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종으로 평생을 마지막처럼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를 위해 봉사한 사도바울이 이 시대의 우리에게 교회를 위한 진정한 봉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종종 표현하기를“예수그리스도의 종 된 나 바울”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바울은 사도인 동시에 종입니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자기의 정체성입니다. 그러한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1절입니다.“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겨라.”여러분,<그리스도의 일꾼>된 것과<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정체성입니다.

이 정체성을 알고 이제 생각해 봅니다. <일꾼>이라는 말은 헬라어로<휴페레테스>라는 말인데<밑>이라고 하는<휴퍼>에<노를 젓는다>는 뜻의<페레테스>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일꾼의 원래 뜻은“밑에서 노를 젓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옛날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칠 때 만들었던 거북선이나 혹은 영화를 보면 노예선 같이 큰 배 밑 2층, 3층에서 노를 젓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들은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릅니다. 알려고 묻지도 않습니다. 다만 말없이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노만 저을 뿐입니다. 이렇게 충성하는 일꾼입니다. 그리고<비밀을 맡은 자>라는 말은<청지기>라는 의미의<오이 코노모스>라는 말과<비밀>이라는 뜻을 가진<무스테리온>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말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권리도 있고, 능력도 주어지고 상당한 권한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기도 하고, 자기가 일을 만들면서 자발적으로 자율적으로 일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오직 주인을 위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는 하나님이 주장하는 대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면서 받들어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자<일꾼>이나<비밀을 맡은 자>에게 기본은 무엇입니까?<충성>입니다. 오늘 바울이“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는 기본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충성이 무엇입니까? 충성은 지식이 아니요, 말이 아닙니다. 충성은 행동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충성은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있는 충성은 과연 어느 정도의 것입니까? 우리는 다 나름대로 받은바 직분만큼 봉사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위해 하는데 까지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내가 나름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충성과 헌신과 봉사는 과연 어느 정도로 평가 받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충성의 평가 척도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 방면으로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평판>입니다.‘남들이 나를 뭐라고 하나’하는 것입니다. 늘 다른 사람들이 신경 많이 쓰입니다. 기준이 다른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불행해서 슬픈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잘 살아서 내가 불행한 겁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많은 신경을 쓰는 타율적이고 타인 주도적 체질이 있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가끔씩 사무실에 전화가 와서 여론조사 한다고 협조해 달라고 합니다. <여론>이라는 것이 가만히 보면 참 무서운 것입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나귀를 타고 아들이 고삐를 잡고 가는 것을 보고 동네사람들이“아이고, 아니 어린아이를 저렇게 고삐를 잡게 하 고 자기가 떡 타고 가면 되나”하소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 다음에는 애를 태우고 아비가 고삐를 잡았더니“저런 불효자가 있나, 제가 타고 아버지를 저렇게 고삐를 잡게 하다니”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할 수 없이 둘이 다 나귀를 탔더니“저런 나쁜 부자가 있나, 저 어린 나귀를 두 사람이 타고 가다니”하더랍니다. 할 수 없이 나귀를 둘러메고 갔다고 합니다. 남의 여론에 놀면 이 꼴이 되는 겁니다. 그런고로“다른 사람의 평판도 중요하지만 내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또 하나는“내가 나를 판단 한다. 그러나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노라”내가 가진 기준이 있는데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가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도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요? 내 판단, 내 고집, 내 주견에 빠지는 순간 독선자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내 판단이 다 옳은 게 아닙니다. 우리가 가끔씩 실수하는 것은 내가 최선을 다한 고로 후회가 없다고 합니다만 사실은 이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다한 최선은 단지 내 마음뿐이요, 나의 최선의 성격은 결국 하나님이 분석하실 것입니다.

자 그래서 바울이 하는 말입니다.“오직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하나님이 판단하시는 대로 그것만이 옳다. 거기에 기준을 두고 충성을 다한다고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정체성을 안다면 이런 충성 자, 이런 봉사의 자세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의 평판에 귀를 기울일 것이 아니요, 내가 스스로 만족하여 자만하지 말 것이며, 오직 하나님께 그 평가를 맡기고 겸손히 충성만 할 것입니다. 묵묵히 봉사만 할 것입니다.

어디에 보니까<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일군의 자격표준 급수>라는 재밌는 표가 있습니다.
먼저, ①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깨닫고 일하는 사람은 특급입니다.
②그 다음 눈치가 보이면 곧 알아차리고 즉시 일하는 사람은 1급입니다.
③남이 이야기해주니까 아차하고 즉시 일하는 사람은 2급입니다.
④주어진 범위 안에서만 일하는 사람은3급 일꾼입니다.
⑤재차 지시를 받고서야 일하는 사람은4급,
⑥두세 번 책망 받고서야 겨우 움직이는 사람은 쓸모없는 자요,
⑦누가 뭐라 하든지 자기 고집, 제 멋대로 하는 사람은 위험한 자
⑧일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게으름과 무관심으로 자기 개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⑨일할 분위기를 만들지 않고 불평불만으로 일을 그르치는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교회를 위하여 스스로 충성 자가 되고, 봉사자가 되어서 자기 일을 다 하는 봉사자를 찾고 계십니다. 2006년에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그리스도의 일꾼>이요,<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특급 봉사자의 삶을 사시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철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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