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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전케 하는 믿음 (마 21: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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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한 분이 젊었을 때 경험한 일입니다.
그는 젊어서 비교적 성공적으로 사회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는 좋은 회사에 입사를 해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 동기생들에 비해 훨씬 앞서 나가는 편이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의기양양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번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자신의 동기와 친구들은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는데 자신은 크지는 않지만 소형승용차를 타고 달리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승용차가 버스를 앞질러갑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저들은 저렇게 고생하며 다니는데 나는 이렇게 편하다. 내가 저들에 비해 빠르다. 나를 좇아올 친구가 없다’고 마음속으로 은근히 자만했습니다.
그렇게 은근히 자아도취에 빠져 앞서 달려가고 있을 때 한 순간 자기를 앞서가는 차 한 대가 보였습니다.

자기보다 훨씬 좋은 차를 탄 친구였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또 다른 친구가 앞서 갑니다.
그리고 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앞서 달려가기 시작하는데, 그들은 다 중형 승용차를 타고 달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친구는 기사를 두고 달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라는 순간 그는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기를 ‘지금 내가 앞서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절대 앞선 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겸손하지 않으면 내가 더 노력하고 부지런히 일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역전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그 마음으로 일하다 보니 오늘날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언제든지 역전될 수 있습니다
지금이 다가 아닙니다.
지금 내가 잘나간다고 해서 이후에도 잘 나가느냐 하면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조금 주춤한다고 해서 후에도 반드시 그 상태로만 있느냐 하면 또한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일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겸손함과 성실, 항상 꾸준한 노력과 열정입니다.

1.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내가 부족하다고 해서 나중에도 부족 하느냐? 지금 내가 좋은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끝에도 좋으냐?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막 10:31)

오늘 말씀도 이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은 두 아들에게 대해서 비유를 하십니다.
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두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명합니다.
먼저 큰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때 큰 아들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예’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에게 명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싫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예라고 대답한 첫 번째 아들은 포도원에 가지 않았고, ‘싫어요’ 했던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거절했던 것을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역하며 불순종하던 둘째 아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바로 역전의 신앙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자, 보세요. 큰 아들은 작은 아들을.....
큰 아들을  말하자면 경건하다고 하는 유대인들입니다.
저들은 율법을 잘 지키려고 하고 준수하려고 합니다.
제사하고,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 경건한 생활을 하려고 애씁니다.
저들은 나름대로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율법을 논하고 율법을 가르치고.... 그래서 저들은 ‘예’의 사람입니다.
곧 외형적으로 이미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큰 아들에 비해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세리와 창기라고 비유하십니다.
저들에게 있어서 율법의 말씀은 왠지 거북합니다.
자기들의 생활에 방해가 되고 오히려 율법을 지키게 되면 세리들은 세금을 거두는데 차질이 생깁니다.
배를 불릴 수 없습니다.
창기들은 그들의 몸을 파는 것이 생계의 수단인데 그 생계 수단을 잃고 맙니다.
그래서 율법을 싫다고 거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문에 저들은 “싫소이다” 라고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은 세리와 창기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뉘우치고 믿었습니다.
깨끗이 회개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립니다.
그리고 이제 경건한 자로 살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순종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저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습니까?
어쩌면 나는 익숙해져 있는 의식이 되어 있고 형식이 되어 있어 있는 큰 아들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먼 이스라엘의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이미 우리는 ‘예’의 자리에 들어와 있습니다.
순간순간 우리는 ‘아멘’으로 화답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비유상의 큰 아들의 자리에 있지도 모릅니다.

2.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지 자리나 역할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느냐, 어떤 위치에 있느냐, 어떤 직분을 가졌느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의 업적의 문제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업적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력서에 경력을 대단히 중시합니다.
교회의 직분 자를 세울 때도 보면 교회에서 어떤 일을 했느냐,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를 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을 묻지 않으십니다.

또한 경쟁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 먼저 들어가느냐, ‘내가 먼저 들어가느냐, 네가 먼저 들어가느냐’라는 경쟁을 위하여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역전의 원리는 믿음의 문제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떠한 믿음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먼저 된 사람 중에 오히려 뒤 처지기나,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미미하지만, 비록 부족하지만 어떠한 믿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먼저 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경고와 희망이 함께 담겨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성실함과 꾸준한 노력과 열정에 달려 있지만, 우리 신앙에 있어서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어떠한 믿음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삶의 결과, 그 최후의 결과는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외적인 믿음이 아니라, 내용적인 믿음을 말합니다.
곧, ‘믿음의 삶’을 의미합니다.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묻습니다.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믿음입니다.
관념이 아니라 ‘살아있고, 행함이 있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성경에서는 이 믿음에 대하여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생명력 있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심과 하나님의 능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을 내가 믿고, 앞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모든 일들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기에 하나님의 속성을 내가 믿기에 어떠한 상황 속에서라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믿음을 많이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는 대상, 우리가 믿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믿음의 대상과 네용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지요.
이게 야고보서의 주제입니다.
믿음에는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말로서만이 아니라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야 됩니다.
생명력 있는 믿음, 행함이 있는 믿음, 이 두 믿음이 우리 안에 있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극단적인 믿음 생활이 되고 맙니다.
살아있는 믿음, 곧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만을 강조하다보면 신비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행함이 있는 믿음만을 중요시하다보면 반 신앙인, 율법에 종노릇하는 자가 되기 쉽습니다.
영적인 부분은 소홀히 하기 쉽고 봉사, 헌신 쪽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우리는 행함의 믿음과 함께 하나님의 능력도 믿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룰 때 온전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고넬료]에게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그를 만나주십니다.
이방인이지만 이 [고넬료]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의 행함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행10: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행10:2)
그는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알기에, 하나님 되심을 알기에 그는 기도했으며, 경건이 무엇인지 알기에 그는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 [고넬료]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의 집에 성령의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어떤 유대인보다 먼저 나게 하셨습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산 믿음, 행함이 있는 믿음....
그렇다면 우리는 ‘예’와 ‘순종의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예’라고 대답한 후에 포도원으로 가야 합니다.
곧 살아있는 믿음,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작은아들과 같은 사람이라면, 곧 세상에서 죄인인 사람들이라 처음에는 ‘아니오’라고 거부했지만 이제 깨닫는다면 포도원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믿음으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먼저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순종과 행함의 믿음입니다.

3. 이 믿음위하여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십시오.

둘째아들과 같이 행해야 합니다.
둘째아들은 율법에 대해 거부해지만, 다시 들려오는 소리에, 세례 요한의 회개의 외침과 그리스도의 말씀에 그 마음과 양심은 들었습니다.
듣고 포도원으로 갔습니다.
곧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듣기는 들었지만 제대로 듣지 않았습니다.
입만 대답했을 뿐 그 마음은 대답지 않았습니다.
형식만 있었습니다.
곧 그 마음은 듣지 않았습니다.
들을 때 믿게 되고 들을 때 향하게 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그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를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묘한 진리가 있습니다.

한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참 묘하게 지으셨다. 눈과 입은 감고 다물 수 있도록 지으셨다. 보기 싫으면 눈을 감으면 되고 말하기 싫으면 입을 다물면 된다. 그렇지만 귀는 닫고 열고 할 수 없다. 듣기 싫어 귀를 막아도 들린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항상 세상의 소리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생명의 소리, 복음의 소리를 듣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경고와 교훈을 듣게 하시기 위해서다. 세월이 흐르는 소리, 무지와 편견과 교만을 깨우치는 소리,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말이라도 귀담아 들을 줄 아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특별히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되고 먼저 된 자의 자리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그리고 회개하십시오.

들을 때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말씀이기에 바로 듣는다면 심령의 통회를 하게 됩니다.
둘째아들은 회개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뉘우쳤다고 했습니다.
뉘우침과 회개는 물론 다릅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했습니다.
왜냐하면 뉘우침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잘못을 알고 포도원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뉘우침은 회개로 가는 길입니다.
뉘우침에서 행동으로 나아갈 때 회개의 삶이 됩니다.
회개할 때 바로 일하게 됩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누구도 의롭지 못합니다.
때문에 순간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들으면서 깨닫고 뉘우치고 회개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행하는 삶은 회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의 시작은 언제든지 회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기뻐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더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를 받으십니다.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에 ‘임페리얼 뮤지엄’이라고 하는 박물관이 있습니다.
여기에 소장된 그림 중 아주 유명한 이야기의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은 황제가 성당을 들어가려고 하는데 주교가 문간에 나와 떡 버티고 서서 못 들어간다고 막는 장면입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일입니다.
주후 390년에 데살로니가에서 로마의 통치를 반대하는 운동이 있었는데 이것을 막기 위해 1500명을 무참하게 학살해버렸습니다.
그 뒤에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밀라노를 방문했고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그곳 성전에 들어가려고 하는 데 당시의 교부인 성 암부르시우스가 서슬 푸르게 문을 막고 서서 ‘못 들어 갑니다!’ 라고 황제에게 말했습니다.
“왜 못 들어가오?”
"당신은 죄인입니다.”
그러자 황제는 말합니다.
“다윗 왕도 죄인인데....”
[암부르시우스]는 여가서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다윗] 왕을 모방하십니까? 그러면 [다윗]처럼 회개해야지요. [다윗]왕은 회개를 했습니다. 당신은 회개가 없기 때문에 못 들어갑니다.”라고 딱 막았습니다.
유명한 그림이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인, 회개하지 않는 교만한 사람은 진정으로 행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회개하기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매일의 삶을 통해서 회개하는 것을 즐거워하십시오.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씻도록 매일 세숫물을 주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수하고 샤워하는 것이 귀찮지 않듯이 그리고 당연히 하듯이 영혼의 세척, 회개도 당연히 해야 합니다.

회개하는데서 우리는 시작하고 회개하는데서 우리의 삶은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큰 아들입니까?
둘째 아들입니까?
어떠한 자리에 있든 간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믿음의 삶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들으십시오.
그리고 회개하십시오.
거기서 행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때 하나님 나라가 주어집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 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아멘- (박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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