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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결단으로서의 신앙 (마 10:3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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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신앙을 설명하는 말로 “결단(Decision)”이라는 말을 씁니다. 즉 신앙인이란 그리스도를 향해 혹은 위해 결단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결단이란 말은 “선택(Choice)”이라는 말과 비슷하면서도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선택한다는 말은 여러 가지 중에서 하나를 택하는 것을 말합니다만, 결단이란 말은 이것을 택하기 위해서 저것은 버려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결혼을 앞두고 배우자를 선택하는 경우가 그러하다고 봅니다. 이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저 사람은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결단(Decision)과 선택(Choice)의 차이점은 이렇게 하나를 택하기 위해 다른 하나는 버려야 하는 아픔이 있느냐 하는 점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신앙의 사건에는 이러한 결단의 아픔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결단하는 데에 있어서 또 하나 필요한 것은 시기를 잘 맞추어야 하는 이른바 timing을 바로 맞추는 일이 아주 중요합니다. 아무리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택하는 아픔의 결단을 하더라도 시기가 맞지 않으면, 때를 놓치면 아무런 쓸데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결단을 염두에 둘 때 가장 기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이 timing을 맞추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둘 다 사랑할 수 없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의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신학을 마치고 목사 훈련도 받고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부인이 말리더랍니다. “당신이 받는 그 월급으로는 내가 살 수 없다. 당신은 공부도 많이 하고 재주도 많은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 나와 살려거든 목사노릇 하지 말라”고 결사적으로 말리더랍니다. 결국 그는 교회 일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와서 갖은 고생 다 하면서 처자식을 잘 키웠습니다. 그런데 10년 뒤에 부인이 차 사고가 나서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습니다. 부인은 그제야 회개하고 “여보, 목사노릇 하시오” 하더랍니다. 이 목사님은 “이제 다 늦게 나더러 목사노릇 하라면 어떻게 하라고! 나는 장가 한 번 잘못 가서 일생을 망쳤노라”고 한탄하더랍니다. 이것은 미워해야 할 순간에 사랑했기 때문에 빚어진 일입니다. 어느 결정적 순간에는 미워해야만 사랑할 수 있는 순간이 있는 법입니다. 이 때를 바로 아는 사람만이 결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워해야 할 순간에 미워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해야 할 일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선한 일, 의로운 일, 심지어는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까지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든 제대로 하려면 버려야 할 것이 많습니다. 끊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미워해야 할 것은 미워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할 때, 왜 이런 일들이 있어야 합니까? 그것은 생명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 팔, 다리를 잘라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발전이나 성장의 차원이 아니라, 생명의 차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결단해야 하는 엄격함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전반부는 바로 이러한 내용을 말씀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37절의 말씀이 이러한 모습을 대표적으로 표현합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 말씀을 우리는 잘못 적용하면 아니 됩니다. 이 말씀을 부모를 거역하는 일에, 아니면 자식을 팽개치는 일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용하면 그야말로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인이라면 어떠한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향하여 결단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이 사랑하는 것도 포기하고 버려야 할 때가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결단”이란 바로 이러한 경우에 사용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엄격함을 또한 십자가로 표현합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십자가란 “잃어야 얻을 수 있는 진리”를 말합니다. 요 12:24의 말씀이 바로 이러한 모습을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렇게 기독교 신앙에는 잃어야만 얻을 수 있는 그러한 진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때를 알 수 있는 때에 대한 분별력과 결단할 수 있는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십자가를 바로 우리 스스로가 지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십자가의 잃어야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나타납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이렇게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랑, 사랑”이란 말을 많이 합니다만, 자기 사랑이 앞서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때로는 그 사랑이 잘못될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사랑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위해서 자식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참 사랑을 하려면 자기 사랑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얻기 위하여 잃어버려야 하는 고통을 먼저 감당해야 합니다. 이 역시 생명의 문제와 깊은 연관이 됩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 십자가의 법칙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법칙을 잘 깨닫지 못하고 예수를 믿으면, 흔히 말하는 “영적인 질병”에 걸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질병을 앓는 사람들을 성경에서 많이 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많이 발견합니다. 이러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영적질환자들은 성경에만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예수님을 믿노라, 예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 우리도 바로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나를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되지 아니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향해서 결단하기 위해서 내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십자가의 법칙을 잘 간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저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신 선배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이 대학 시절 C. C. C(Campus Crusade for Christ)에서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이 C. C. C에서 한번은 거지 전도 여행을 시키더랍니다. 돈 한 푼 없이 전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발견하라는 훈련이라고 합니다. 의정부 지역에서 전도하다가 밤늦게 배도 고프고 잘 데도 없어서 어느 교회의 문을 두드렸다고 합니다. 목사님께서 나오시길래, “하룻밤 신세를 져도 되겠느냐?”고 말씀드렸다고 합니다. 여차여차한 사정을 말씀드리고 나니, 이 목사님께서도 함께 자자고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시더랍니다. 그 때 이 목사님이 들려주시던 고백이랍니다.

6.25 때, 이 목사님은 인민군들에게 붙잡혀서 어떤 창고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갇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밤중에 인민군 하나가 들어오더니 “이 가운데 예수 믿는 동무 없소?” 하더랍니다. 목사님은 예수를 믿는 게 분명하지만 뒤에 앉아서 죽을까 걱정이 되어 벌벌 떨고 가만히 있었답니다. 한참 후에 인민군이 또 들어왔습니다. “예수 믿는 동무 없느냐?”고 또 묻더랍니다.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한참 후에 또 그 인민군이 오더니 이제는 하나하나 확인하며 물어 보더랍니다. “너 예수 믿느냐, 안 믿느냐?” “너 예수 믿지?” 하면서 한 명씩 확인하더랍니다. 드디어 이 목사님 차례가 되었답니다. 이 인민군은 가슴을 콱 찌르면서 “너 예수 믿지 않느냐?” 하더랍니다. 그 때, 이 목사님은 혼자 생각하기를, ‘사람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느냐?’ 하고 “그렇소. 제가 목삽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인민군은 “너는 예수쟁이 괴수구나. 나와.” 하면서 끌고 나가더랍니다.

그 목사님 자신의 말씀입니다. 인민군에게 끌려 나갈 때에는 마치 지옥에서 천당으로 가는 것 같더랍니다.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답니다. ‘이젠 됐다. 이젠 살았다. 비록 죽으러 가는 것이지만 이제는 승리했다’는 생각에 가벼운 마음으로 끌려 나왔답니다. 그런데 인민군은 밖으로 데리고 나오더니 아무도 없는 곳으로 끌고 가고는 거기서 결박을 풀어 주면서 “목사님 빨리 도망 가십시오”라고 말하고는 자기도 예수 믿는 사람인데, 어느 목사님이 이곳으로 잡혀왔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살려 드리려고 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나오지 않아서 애먹었다고 말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기 위해 나를 포기하는 결단은 결국 나를 살리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 길은 우리가 죽어야만 사는 길이요, 우리가 희생되어야 살릴 수 있는 그러한 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결단하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가 이렇게 나 자신을 비롯하여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있음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엄격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참 생명 곧 영생을 주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을 소유하는 자만이 제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명과 진리로 나아가게 되도록 때에 합당한 결단을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노강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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