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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 안에 두려움 없다! (요일 4: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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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늘 주신 말씀에서 사도 요한은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그러나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기만 하면 두려움도, 형벌도 다 몰아낼 수 있다는 거지요. 해서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요, 이 말씀 받은 지 벌써 천년이 두 번이나 지났건만, 아직도 우리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크고 작은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 성도들까지도 온갖 두려움에 쩔쩔 매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두려움을 몰아내지 못하니 사랑도 하지 못하지요, 사랑을 완성하지 못하니 온갖 형벌로 고통을 당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들을 괴롭히는 두려움은 참 많습니다. 질병, 실패, 전쟁, 재난에 대한 두려움, 거기에 인정받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과 이러다 버림받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까지, 온갖 두려움들이 끝도 없이 우리를 엄습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일단 두려움이 내 마음에 들어오면, 그 두려움이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면서, 긍정적인 마음은 사라지고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해진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다가 두려움이 극에 달하면, 과대망상 내지 정신적인 질환으로 악화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온갖 병균에 전염될까 두려워 맨 손으로는 그 무엇도 만지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광장 공포증으로 인하여 자기 집 문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이도 있습니다. 실패가 두려워 아예 아무런 시도도 못하다가 그렇게 무능해진 이도 있는가 하면, 버림받을 것이 두려워 아예 사랑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두려움이 자라나 병이 된 경우들이지요.

그렇다면 그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왜 우리 인간은 두려움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두려워 말라는 복음의 말씀을 받은 성도들조차, 왜 두려워하며 살아야 하는가? 이에 몇 가지 원인을 확인하며 처방도 함께 받으려고 합니다.

# 2
1. 죄가 두려움의 원인입니다.

에덴동산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도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면서,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을 배신한 죄악의 결과로 두려움이 들어와, 그만 사랑도 잃고, 에덴도 잃고, 하나님도 잃게 되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러자 아담이 대답합니다.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움의 첫 번째 원인, 그것은 죄악입니다. 죄를 지어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하나님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요, 죄를 지은 사람,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합니다.

혹시 아내나 남편의 얼굴 보기가 두렵습니까? 혹시 부모님의 얼굴 뵙기가 두렵습니까? 혹시 자녀들 앞에 똑바로 서기가 두렵습니까? 혹시 주님 앞에 나오기가 두렵습니까? 자꾸 숨고 싶으십니까? 누군가 아무도 없는 곳으로만 가고 싶습니까? 자꾸만 혼자 있고 싶어집니까? 만약 그렇다면, 내 안에 무슨 죄가 없는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두려움, 그것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로 인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있습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지어 주시는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 됩니다. 다시 창세기로 돌아가 볼까요? 이제 아담과 하와는 정녕 죽어 마땅한 죄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길 경우, 죽을 것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무한하신 우리 하나님, 아담과 하와를 죽이는 대신, 에덴에서 추방하십니다. 목숨만은 살려 주신 건데요, 이 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구원의 상징인 가죽 옷을 새로 입혀 주십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의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처음으로 짐승을 잡아 가죽 옷을 만들어 주셨던 것인데요,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핸 피 흘림 사건이라 할까요?

그러나 제단에 바치는 짐승의 수가 늘어만 가고, 제단에 뿌리는 피의 양이 늘어만 가는데도, 인간의 죄악은 그칠 줄 모르고 점점 더 늘어만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젠 짐승의 피로는 씻을 수 없는 최악의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해서 우리 하나님, 하는 수없이,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 제단에 내어주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그 피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며, 그리스도로 옷 갈아입기만 하면 구원에 이르는 영생의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여러분, 죄로 인한 두려움을 이기는 힘, 하나님의 사랑밖에는 없습니다. 죄로 인한 두려움을 몰아내고 다시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길, 예수 그리스도로 옷 갈아입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만이 우리의 죄를 씻어, 두려움을 몰아내고, 마침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나의 모든 죄 주님 앞에 내려놓으시고, 그리스도로 옷 갈아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올 한 해,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죄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에게 죄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는 죄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 실수로 죄를 범하시거든, 어두운 곳으로 숨어들지 마시고, 어서 주님 앞에 나와 자복하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 십자가의 은혜로 덮어주시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채워 주시어, 다시 에덴을 회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옆의 분과 신년 인사 하며, 우리 함께 서원합니다.

<죄 짓지 않겠습니다. 오직 사랑으로 승리하겠습니다.>

2. 사탄과 마귀가 두려움의 원인입니다.

살다 보면,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원인 모를 두려움에 쌓여 고통당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사탄과 마귀가 심어 놓은 두려움 때문인데요,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에 원인 모를 두려움이 넘칠 때, 그건 사탄과 마귀의 장난에 틀림없습니다.

디모데 후서 1장 7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런데도 믿음이 약한 자, 사탄과 마귀의 장난에 넘어가, 까닭 없는 두려움과 공연한 공포심으로 고통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에 쌓인 사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치를 떨곤 합니다. 혹시 교통사고를 당하지는 않을까? 불치의 병에 걸리지는 않을까? 오늘 사업이 망하지는 않을까? 혹시 한강 다리가 가라앉지는 않을까? 지하철이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이런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내용들을 면밀히 조사해 보니, 그 중 40%는 지나간 과거에 대한 두려움이요, 그 중 50%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요, 겨우 10%만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었다는 겁니다.

무슨 뜻인가? 내가 두려워하는 10가지 중 네 가지는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불필요한 두려움이요, 내가 두려워하는 10가지 중 다섯 가지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이유 없는 두려움이요, 결국 두려움의 내용 10가지 중 오직 한 가지만 이유 있는 타당한 두려움이었다는 거지요. 그런 사람, 오늘이란 시간의 10분의 9를 쓸데없는 두려움으로 허비하고 있다는 건데요, 해서 오늘 주신 말씀,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한다!>고 하신 겁니다.

두려워하는 자, 온전히 이루지 못합니다. 두려워하는 자, 사랑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일도 온전히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니 살았으나 이미 죽어버린 인생이지요. 바로 이것이 바로 사탄과 마귀가 노리는 결과입니다. 사탄과 마귀는 우리 믿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 어떤 일도 온전히 이루지 못하게 하려고, 두려움을 무기로 하여 집요하게 공격해 오는 것입니다.

아니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탄의 공격 앞에서 겁을 먹는 대신,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해서 우린 이기기로 예정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탄은 대화의 상대가 아닙니다. 마귀는 타협의 상대가 아닙니다. 오직 사탄과 마귀는 대적하여 물리쳐 이겨야 하는 상대입니다. 우리가 자꾸 타협하려고 하고, 우리가 자꾸 뒷걸음질 치고, 우리가 자꾸 되지도 않는 대화를 하려고 하기에, 사탄과 마귀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입니다.

오직 강하고 담대한 믿음과, 하나님 주신 사랑과 능력으로 올 한 해, 사탄과 마귀를 이겨 승리하는 위대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과 능력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3. 때로 환경이 두려움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좋은 환경에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좋은 환경을 주십하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환경을 주어도 그것을 믿음으로 향유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믿음과 감사로 받지 못할 경우, 오히려 그 좋은 환경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복지가 보이는 곳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이제 강만 건너가면 축복의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저들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믿지 못한 저들, 정탐꾼을 보냅니다. 그런데 정탐꾼들의 보고가 하나로 모아지지 않습니다. <저 땅은 틀림없는 약속의 땅이요 저들은 우리의 밥이니 어서 올라가 차지하자!>는 한 편의 보고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것은 맞지만 거기 사는 사람들을 보니 우리는 메뚜기 떼에 불과하니 여기서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다른 편의 보고로 갈라졌던 것입니다. 

결국 부정적인 보고에 겁을 집어먹은 저들, 복지를 눈앞에 두고, 뒷걸음질을 칩니다. 한번 가보지도 않은 채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 길로 광야로 나갔던 것인데, 그렇게 저들은 복지 대신 광야에서 40년 동안 죽도록 고생만 하게 됩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 제1세대들이 모두 광야에서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대신 환경이 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해서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 야기된 두려움엔 반드시 형벌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말씀 대신 사탄의 속삭임을 믿어버린 자, 해서 말씀에서 벗어나 뒷걸음질 치는 자, 응분의 형벌을 치르게 됩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믿음으로 한 순간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 그러나 다음 순간 부는 바람을 보고 두려움에 싸이면서, 그만 물속으로 빠져 들어갔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믿음이 세찬 바람이라는 환경에 지고 말았던 거죠. 그 때 다급한 베드로가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자, 주님, 그의 손을 잡아 건져 주시며, 한 말씀 하셨지요.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그렇습니다. 두려움의 원인, 그것은 믿음 없음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의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그 어떤 환경도 두렵지 않습니다. 아멘? 믿음만 있으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아멘? 그럼요, 환경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두려움 없이 맡은 바 소명을 온전히 이루어 드리는 믿음, 그것이 온전한 사람에 뿌리를 둔 건강한 믿음입니다.

혹시 지금도 두려우십니까?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예화 / 1948년 루마니아가 공산화 될 때의 일입니다. 목사님 한 분이 체포되어 그로부터 10년 이상 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극심한 고문, 무시무시한 지하 독방, 언제 사형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등으로 이 목사님은 점점 더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여러분,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서도 이 음성 듣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이 음성을 들은 목사님, 한 순간 두려움이 물러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 때 비로소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하여 성경책을 일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입니까? 성경을 펼쳐 읽는 곳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해서 그 수를 헤아려 보니 모두 삼백 예순 다섯 번이나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1년이 365일이니, 하루에 한번씩, 이 말씀 붙들고 모든 두려움을 이겨 승리하라 하셨구나!> 귀한 깨달음을 얻는 순간, 목사님의 영혼에 환한 빛줄기가 비추는 것 같았습니다. 그 후로 목사님은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10년이란 긴 세월동안, 가장 혹독한 환경인 옥살이를 이겨 승리하였던 것입니다. 후에 전쟁이 끝나고 자유의 몸이 된 이 목사님, 전 세계를 돌며,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에게 새 용기를 주는 위대한 설교가가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 환경이 두려움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이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경우, 진짜 원인은 내 마음에 믿음이 없기 때문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환경과 믿음이 만나면 축복이요, 환경과 의심이 만나면 두려움일 뿐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올 한 해, 오직 믿음과 사랑으로 나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을 이겨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도 환경으로 인해 믿음을 상실하거나, 환경으로 인해 사랑을 빼앗기지 마시고, 모든 환경을 천국으로 바꾸어 사는 위대한 한 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3
오늘 우리는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이긴다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 두려움을 모릅니다. 왜?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사랑,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 4:10-11 / (읽기) /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리자일 뿐입니다. 내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분의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해서 인간적인 사랑은 그렇게도 변덕이 심한 것, 우린 하늘 아버지의 사랑 아니고서는 사랑도 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한 가지 기억할 것은, 하늘 사랑은 내 형제와 자매를 통해서 완성된다는 사실입니다. / 4:20-21 / (읽기) / 거기 20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다시 말해 예수 믿는다 하고, 교회 다닌다 하고, 나 동광의 교인이라 하고,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는 자, 거짓말 하는 자다!

거짓말 하지 말라, 제9계명이군요. 그러고 보니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는 자, 십계명을 어긴 사람이군요. 계명을 어겼으니, 벌을 받아야지요. 그런데 형벌은 두려움 속에 있다 했으니, 종합하면,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는 자, 하루를 살아도 두려움 속에 살게 된다는 거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또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 받은 계명입니다. 사랑만 하시기 바랍니다. 올 한 해, 사랑만 하시기 바랍니다. 내 가족들, 동광의 하늘 가족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하늘 사랑으로 사랑만 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두려움이 물러갈 것입니다. 두려움이 물러가니 에덴동산이지요. 또한 모든 일이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는 일마다 온전히 이루어지니 형통의 복으로 가득하지요. 해서 하나님은 창립 25주년을 맞은 금년 한 해, 주님 주신 표어대로 <은혜로 사랑으로, 빛으로!> 살아, 모든 죄와 모든 사탄과 모든 환경을 이겨 승리하는 위대한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장 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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