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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이 원하시는 지도자상(1) (눅 11:3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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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기독교에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 여러 종파가 있습니다. 이처럼 당시 유대교에는 세 개의 종파가 있었습니다.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세네파는 현실 도피적인 종파였습니다. 수도원처럼 엄격한 규율과 폐쇄된 공동체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학자들은 세례요한을 에세네파 출신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종파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토라, 곧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믿었습니다. 이들은 아주 정치적인 집단이었습니다. 로마 권력과 결탁하였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막강한 권력과 부를 누리던 종파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으며, 천사의 존재도 믿지 않았습니다. 아주 합리주의적인 신학을 근거로 성경을 해석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자유의주 신학에 뿌리를 둔 진보적인 종파였습니다.

바리새파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파였습니다. 이들은 모세 오경을 성경으로 믿었을 뿐만 아니라 시편과 선지자의 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습니다. 이들은 부활을 믿었으며, 천사와 영의 존재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엄격한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기 위해 구전법을 만들어, 확장 전승 발전시켰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만큼 유대교의 사법기관인 공회에서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수적으로도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에게 매우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을 심하게 책망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 점심 식사를 초대받아 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이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보고 동물원에 원숭이 보듯이 이상히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손을 씻지 아니한 예수님이 야만인처럼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거짓을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눈에 박힌 가시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트집 잡아 죽이려고 목을 지키는 살의를 품게 되었습니다(53,54).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책망하시기 위해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를 통해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어떤 지도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며, 어떤 지도자들이 되어야 하는지 방향을 잡아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처음에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을 책망하신 예수님”으로 잡았다가 “예수님이 원하시는 지도자상”으로 바꾸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세 가지 점을 책망을 하셨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지도자상을 마음에 새기고 그렇게 우리 자신을 가꾸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겉보다 내면을 정결케 하라(39-41)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점심 식사에 초대받아 가셨습니다. 그런데 손을 씻지 않고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그 바리새인이 이상한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마도 그는 손도 씻지 않고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아주 형편없는 사람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정결예법을 매우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특히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을 종교적인 의식으로 정해놓았습니다. 손을 씻는 법칙도 까다로웠습니다. 물은 적어도 계란 한개 반에 들 만한 분량을 두 손으로 받습니다. 먼저 손끝에서 손목까지 적시고, 각 손바닥으로 주먹을 닦습니다. 다음에는 두 손목에 물을 부어 손 끝으로 흘러내리게 합니다. 그렇게 아니하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부정한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은 십계명을 어기는 것과 동일한 죄를 짓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랍비는 감옥에서 간신이 목을 축일 만큼의 물을 얻었는데, 그 것으로 손을 씻고 나니 마실 물이 없어서 죽었다고 합니다. 이만큼 손을 씻지 않는 문제는 바리새인들에게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의 그런 생각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씻지 않고 잡수셨습니다. 제자들도 손 씻지 않고 음식을 먹다가 바리새인들에게 어찌하여 장로들의 준행치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느냐고 책망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막 7:5). 그 스승에 그 제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항상 손을 씻지 않고 잡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손 씻는 것은 위생적으로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손 씻는 규례를 위생적인 규칙 그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규율로 생각하고, 구원받을 수 없는 부정한 사람처럼 이상히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바리새인에게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39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책망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은 배설물을 먹은 것처럼 더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손을 씻지 않으면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시장에서 돌아오면 목욕부터 했습니다.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부지런히 씻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막 7:3,4) 그러나 그들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집 하인이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같이 사람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재물을 미워하게 된다, 하나님을 중히 여기면 재물을 경히 여기고, 재물을 중히 여기면 하나님을 경히 여기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눅 16:14)  또 누가복음 20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켰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눅 20:47)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깨끗한 척했지만 속으로 돈을 사랑하며 과부의 재산을 빼앗는 탐욕스러운 자들이었습니다. 또 그 마음에 악독이 가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40)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그들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속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외모만 보고 신앙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십니다. 내면에 물질에 대한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것을 보시고 슬퍼하십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b)

그러면 우리의 내면을 깨끗이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41절을 보십시오.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바리새인들의 속이 더러운 것은 탐욕과 악독이 그 안에 가득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마음에 있는 탐욕과 악독을 버리고 깨끗이 할 수 있습니까? 탐욕과 악독의 문제는 바로 돈을 사랑하고, 이웃에 대한 자비와 사랑이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길만이 탐욕과 악독을 버리고, 자신의 속을 깨끗이 하는 길입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과 사람들에 대한 악독이 어찌 바리새인들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이 문제는 바리새인들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타락한 본성을 가진 모든 인간의 문제입니다. 음란, 도적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흘기는 눈, 훼방, 교만, 광패 등의 탐욕과 악독이 가득합니다(막 7:21,22).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이런 본성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일까요? 우리 마음에는 이런 재물에 대한 탐욕과 이웃에 대한 악독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돈을 좋아하는 문제가 바리새인들만의 문제일까요?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요즘은 어린아이들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명절에 무슨 선물을 가장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현찰로 돈을 주는 것을 가장 선호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헌금 문제만 나오면 신경이 곤두섭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아침부터 밤까지 진이 빠지도록 일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일주일에 한번 교회 다니는 것으로 때우고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돈을 벌까? 어떻게 하면 손을 보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 때문에 날마다 회개해도 늘 마음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해결책으로 네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것이 깨끗하리라.” 구제한다고 우리 속이 깨끗해지겠습니까? 날마다 마음에 가득한 죄악을 회개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의 마음이 정결케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제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은 이기심과 탐욕스러운 본성을 물리칠 수 있는 좋은 길잡이가 됩니다. 우리가 손을 부지런히 씻고, 길게 기도하는 바리새인들처럼 외적인 경건에 힘쓰기보다 우리의 내면을 주님 앞에 내놓고 회개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함으로 적극적으로 탐욕과 악독을 물리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경건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는 위선자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II.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42)

42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정통파 유대인들이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려야 할 소제물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땅에서 난 처음 열매 일곱 가지가 있었습니다.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 꿀 등이었습니다. 또 모든 과목의 처음 익은 열매 오분의 일을 드려야 했고, 땅에서 나는 모든 먹을 수 있는 것의 십일조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례에 없는 정원에서 가꾸는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까지 구별하여 드렸습니다. 이것은 좋은 일이었습니다. 자발적으로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이들은 십일조만 넘치게 드리면 자신의 신앙이 아주 좋은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이들에게 빠진 것이 무엇입니까? 공의와 사랑을 버렸습니다. 사람들에게 공의를 행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입니다. 또 사람들에게 공과 의와 인을 행하는 것이 둘째 계명입니다(눅 10:27). 그러나 이들은 계명의 근본정신을 저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십일조는 꼬박꼬박 바쳤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형식적인 신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십일조를 드리는 근본정신이 무엇입니까? 십일조에 대한 근본적인 정신은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 레위인들의 기업으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레위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는 전임 사역자들로 하나님께서 구별하셨고, 이들을 위해서 나머지 열 한 지파에서 십일조를 내어서 먹고 살도록 했습니다(민 18:24). 이런 의미에서 십일조는 공평하게 하시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도록 하신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서 매년 정기적으로 성전에 내는 십일조 외에 삼년에 한 번씩 각 성에서 십일조를 더 걷어서 성 안에 있는 레위인들을 포함한 과부들과 고아들,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도록 명하셨습니다(신 14:28~29). 이는 가난한 이웃에게 공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십일조의 기원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돌라오멜 동맹 연합군을 물리치고 돌아와서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모든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바쳤습니다(창 14:20). 이는 전쟁에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신앙 고백의 표현이었습니다. 또 야곱은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밧단아람으로 도망갈 때 서원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 주시고, 먹여주시고 입혀 주시고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창 28:20-22). 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십일조만 드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십일조는 형식적인 제물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막 7:6)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모든 채소의 십일조까지 드리면서 정작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저버렸습니다. 형식주의, 율법주의에 빠져서 율법을 주신 근본정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그들의 의가 되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못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한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면 그들의 의가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6:11,12) 이들에게 화가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주님께서는 십일조도 드리고, 공의와 사랑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요,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자 하는 사랑의 표시로 드려야 합니다. 어떤 분은 십일조는 제사제도의 제물의 일부였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전한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십일조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분들이야말로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제사 제도를 폐지하셨기 때문에 제물로서의 십일조를 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나 야곱처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적인 의미에서, 또한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의 의미에서 드리는 십일조의 개념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십일조를 드렸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렇지마는 전 재산을 팔아 사도들 발 앞에 드리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또 초대교회에서는 정규적으로 연보를 드렸습니다. 연보라는 말이 구제비라는 말입니다. 첫 번째 구제의 대상이 전임사역자들입니다. 레위인들처럼 생계 수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일입니다. 바울도“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고후 8:3) 헌금 생활을 하도록 독려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십분의 일이라는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그 이상 드리기를 원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눅 21:1∼4).

이런 의미에서 십일조는 우리가 드리는 헌금의 상한선을 규정하는 기준이 아니라, 하한선을 규정하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는 양면성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만 있으면 되지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 하나? 하는 사람도 잘못하는 것입니다. 또 십일조만 드리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무시하는 것도 잘못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입니다.

III. 하나님의 칭찬을 구하라(43-44).

43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바리새인들은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기 좋아했습니다. 또 문안 받기를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바리새인들이 형식주의자들이 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근본문제는 하나님의 칭찬과 영광을 구하지 않고 사람들의 칭찬과 영광을 구한 것입니다(롬 2:29). 그래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기도할 때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네거리에서 큰 소리로 길게 기도했습니다. 구제할 때도 은밀하게 하지 않고 나팔을 불면서 구제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옷술을 길게 달았습니다. 사람들의 영광과 칭찬에 목말라했습니다. 회당에 가면 상석에 앉기를 좋아했고, 시장에 가면 사람들이 찾아와 문안해 주기를 바랬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 하면 외면적인 일에만 신경을 쓰게 됩니다. 그들의 속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들의 영적 무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44). 예수님은 이들에게 화가 있으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들은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무덤 속과 같이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평토장한 무덤과 같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무덤을 평토장했습니다. 우리나라 무덤같이 봉을 세우지 않고 다른 땅과 같은 높이로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무덤인 줄 모르고 밟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평토장한 무덤임을 알리는 나무나 돌을 세우고 거기에 회를 칠했습니다. 매년 아빔월 15일에 회를 칠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회가 벗겨지고 세워놓은 돌이 넘어지면 무덤인지 아닌지 분간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무덤을 밟을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덤인 줄 모르고 밟았다고 하더라도 그 밟은 사람이 7일간 부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민 19:16). 불정하게 되면 예배에도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바로 평토장한 무덤과 같은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평토장한 무덤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드는 장본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들로부터 온갖 악영향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을 존경하고 그들이 신앙이 아주 좋은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내면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했는데도 표면적으로 볼 때 이들은 경건해 보이고, 신앙이 아주 좋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처럼 이들은 사람들과의 관계는 아주 좋았습니다.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그 일에 만족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부지런히 손을 씻으면서 마음에 탐욕과 악독을 버리지 못했습니까? 왜 박하와 회양과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버렸을까요? 그들이 왜 위선과 형식주의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칭찬을 구하지 않고 사람들의 칭찬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게 되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만 열심을 내게 되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불신자와 똑같이 행동합니다. 이중생활을 하게 됩니다. 교인들이 보는 데서는 헌신적으로 행동하고, 보지 않는 데서는 이기적으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칭찬을 구하는 사람은 모든 삶에 일관성이 있습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한결같습니다.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고, 매사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어떤 분은 자기 남편이 교회에서 하는 말이 다르고, 집에서 하는 말이 다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아내를 무척 사랑하는 것처럼 말하는데 집에만 오면 아내를 무시하고 말을 함부로 합니다. 그래서 남편의 신앙을 마음으로 존경할 수가 없어서 괴로워합니다. 특히 자녀들은 부모들의 위선을 너무나 잘 알아차립니다. 그렇게 되면 평토장한 무덤처럼 자녀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런 신앙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이는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바라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얽매여서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젊은 디모데에게 권면했습니다. “내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사람들의 영광을 구하였던 헤롯은 충이 먹어 죽었습니다(행 12:23).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리의 말씀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저는 존경 받던 유명한 정치 지도자들이 부정과 부패로 얼룩져 감옥으로 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왜 정치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부패할 수밖에 없을까? 개혁을 주장하던 초선 국회의원들이 온갖 비리에 연루되어 무너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드리기를 힘쓰면 사람들이 보든지 안 보든지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가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구하면 사람들이 보는 데서는 긴장하지만 사람들이 보지 않는 데서는 함부로 행동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겸손해야 합니다.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로부터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명예욕에 사로잡히면 목에 힘을 주게 되고, 권위를 부리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칭찬을 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구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표리부동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잠언 기자는 말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바리새인들도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칭찬과 인정을 구하지 않고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사람의 외모를 매우 중요시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얼짱, 몸짱들이 많은 인기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몸짱이 되려고 헬스클럽에 열심히 다닙니다. 얼짱이 되기 위해서 성형수술을 많이 합니다. 요즘은 성형외과가 가장 인기 있는 과가 되었습니다. 방학 때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합니다. 여고생들이 방학 때 성형수술을 많이 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심지어 서울에서는 면접시험에서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성형수술을 받는 청년들도 많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갔는데 천국 문 앞에 한국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고 줄을 길게 늘어섰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문을 지키는 천사에 물었습니다. “왜 한국 사람만 이렇게 줄을 세웁니까?” 그러니까 천사가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의 신분증을 확인하는 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외모를 중히 시대에 그리스도인들마저 경건의 모양만 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경건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마음에 품은 탐욕과 악독을 회개하고, 가난한 이웃을 구제함으로 마음을 정결케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자원하는 마음으로 연보를 드릴 뿐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칭찬을 구하는 지도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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