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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함없는 아버지 품(눅 15: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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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눅15:20-24
제목: 변함없는 아버지 품

현시대를 가리켜 ‘고독의 시대’, ‘상실의 시대’ 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혼자 모든 일을 해결하기 위해 힘쓰는 시대를 표현한 말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전 세계인이 집안에서 컴퓨터채팅을 통해 세계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핸드폰을 들고 언제든지 통화하고 싶은 사람과 대화 할 수 있는 최첨단의 커뮤니케이션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오히려, 인생의 고독의 문제를 해결하기가 더 어려운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 외에 우리의 이웃을 잃어버린 상실의 시대에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부모 자식, 부부간에, 이웃 간에, 형제간에,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제대로 모르고 평생을 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불쌍한 남편>
어느날  부터 아내가 뜨개질을 합니다.  한뜸 한뜸 정성껏 뜨개질을 합니다.
평소에 뜨개질한 옷을 입고 싶었는데 드디어 아내가 뜨개질을 합니다.
아내의 마음과 정성이 담긴 뜨개질 옷을 저는 오래오래 아껴가며 입을 것입니다.
아내의 정성스런 뜨개질이 드디어 끝납니다.
그런데 아니!  정성스럽게 뜨개질한 옷을 개에게 입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부모 자식간에 너무나 모르고 지내는 한 가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 아버지와 두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두 아들은 아버지가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본문은 15:11부터 보아야 합니다. 이 본문을 일명 “돌아온 탕자” 약자로 “돌탕”이라고 부릅니다. 탕자라는 이름은 성경에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둘째 아들의 삶은 탕자의 삶이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탕자는 둘째 아들만을 위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첫째 아들은 유대인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둘째는 죄인을 비유로 하신 말씀이다.

탕자는 누구인가?
첫째아들- 특별히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나지 않는다는 착각 속에서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을 이해지 못하며 그저 주어진 생활 속에서 살아가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지 못하는 탕자.
둘째아들-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 하여 자신의 육신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제멋대로 인생을 허비하는 말 그대로,  세상을 향하여 죄악의 삶을 살아가는 탕자라 하겠다. 오늘은 둘째 아들에게 초점을 맞춰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지 품을 떠나기 전에 둘째 아들의 마음-
(1) 신 21:17에  나오는  재산 상속의 율법을 잘 알고 있음을 나타낸다. 신 21:17에는 재산 상속시 장자에게 전  재산의 2/3를, 차자에게 1/3을 나누어 줄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의  이 같은 요구는 사실상 관례에  어긋난 것이었다.  왜냐하면  재산의  상속은 아버지의  임종(臨終)이 임박할 때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돌아가시기 전에 분배를 미래 해달라는 것이다. 이는 “아버지 빨리 돌아가시면 좋겠는데, 지금 분배해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내가 있던 자리는 속박의 자리라고 생각했다.
둘째는 자유롭고 싶었다.  내 맘대로 지내고 싶었다. 경제적으로 자유롭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 보다 부유하게 지내고 싶었다. 예수를 믿는 것을 속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참된 자유는 무엇인가?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눅 4:18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3)아버지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다.
이 말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옳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품을 떠난 후의 상태
  (1)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마음대로 다 탕진해 버렸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를 소진하고,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을 소진해 버린것이다. (2)허랑 방탕한 삶을 살았다.(13절)  (3) 영적인 빈곤-(15절) 부정한 짐승과 접촉했다. 쥐엄열매(가난한 사람이 먹었으나 대개 돼지나 짐승의 사료. 콩과의 상록수로, 팔레스티나 어디에서든 생육한다)조차도 얻어먹지 못하는 피폐한 삶을 살게 되었다.(비천한 자리) 이러한 죄를 범하면서 그는 아버지에 대해 불효, 불순종, 불충, 불성실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토록 자상하고 사랑이 많은 아버지를 주신 하나님께 범죄 했음을 겸손히 시인했다.

(2)그는 자기 아버지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며 독립하려고 달아났으나 먼 나라에서 그는 가장 나쁜 형태의 속박으로 떨어지게 하는 영향권 내에서 살게 되었으니 그것은 치명적인 올가미로 그를 묶고 있는 죄의 속박이었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는데서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죄 된 방탕의 노예 생활과 바꾸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서 선물로 받은 소중할 재물과 함께 그의 신분마저 상실했다.
이처럼 죄와 허물된 생활은 가장 깊은 본질에 있어서 인간의 삶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는 반역적인 행위임을 우리 주님은 이 비유에서 가르치신다. 소위 자유라는 것에 대한 거짓된 동경 때문에 작은 아들과 같은 사람은 죄악의 먼 나라로 가서 그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소중한 선물을 거기서 이기주의와 방탕으로 낭비한다.
사람이 죄 된 생활을 하면 그는 하나님에게서 선물로 받은 모든 것을 낭비하고 파괴하게 된다. 그는 그 선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생활 가운데서 진정한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창조자 외에 인간에게 신체적이고 지적이며 영적인 역량과 능력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가? 인간에게 최대의 행복이 되도록 자연의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 그밖에 누구인가?
그는 어찌 할 바를 몰라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할 수 없이 가장 천하고 하기 싫은 노예의 일을 받아들인다. 그는 그 먼 나라의 시민 중 어떤 사람의 돼지를 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아직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비참한 불행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치는 돼지보다도 더 못한 대우를 받는다. 다시 말해서 그는 말할 수 없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돼지가 먹는 먹이마저 충분하게 얻어먹을 수 없었다. 잘못에 빠진 인간이 가서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죄악의 먼 나라에서 그는 조만간 가장 잔인하고 가장 증오할 만한 노예적인 속박과 영적인 기근에 빠지게 된다. 그는 수치를 당하고 치명적인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는 영혼과 육체가 말 할 수 없는 큰 상처를 받게 된다.

-레일위의 기차
-지뢰밭- 휴전선의 GOP, GP

어떻게 둘째 아들이 돌아오게 되었는가?
(1)스스로 돌이킨다.(17절)
하나님은 우리들이 스스로 돌이키실 때까지 기다리신다. 참고 또 참고 기다리신다.
시51:17...“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어거스틴의 회개(참회록)-
“욕망이 육체에서 명하면 곧 따르지만 영혼이 육체에서 명하면 듣지 않습니다. 마음이 손더러 움직이라고 하게 되면 명령과 행동이 구별할 수 없으리만큼 일치합니다. 그러나 영혼과 육체는 전혀 상반되어 있습니다.”
“주여, 어서 우리를 깨우쳐 주소서, 마음에 불 질러 주소서”  “롬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려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하나님은 죄를 지을 때 마다 천둥치고, 번개가 번쩍거리지 않게 하신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다. 연약한 육신을 그대로 보신다.

(2)아버지의 품을 생각했다.(17절)
아버지에겐 진정한 양식이 풍족한 분이다.
암8:11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3)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동을 실천했다.(20절)

아버지의 주도적인 사랑(initiative love)
의외의 아버지의 반응, 더럽고 추악한 죄악으로 누더기 옷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을 그대로 안아 주시는 하나님의 품.
(1) 아직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아들을 먼저 알아보았다는 사실을 미루어 그가 매일갈이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먼 거리를 살펴보았음을 알 수 있다. 
(2) 회개의 말을 듣기도 전에 힘들고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에 측은(側隱)한 마음을 느끼게 된다. '측은히 여기다'의 뜻인 '스플랑크니조마이'란  도와주지 않으면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아들의 참회 고백 이전에 아버지의 불쌍히 여기는 느낌이 선행한다.
(3) 나이 많은 동양인의 경우 아무리 급할 때에라도 달려 나가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이 비유의 아버지는 그 자신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행동하고 있다. 이는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그분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이다. 또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달려갔음은 아버지의 용서 행위가 아들의 사죄  행위보다  우선한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하나님께  천천히 다가가지만 회개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급히 달려 오셔서 그의 은혜를 베푸신다.
(4) 입맞춤은 삼하14:33에 의하면 아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를 뜻한다.

<예화>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충남 서산 골짜기에서 살다가 외가가 포천이기 때문에 서울을 경유하여 포천으로 올라가야 했다. 어머니와 단둘이 포천으로 가던 중 서울 한 복판에서 길을 잃고, 경찰의 도움으로, 밤늦게 포천의 외할머니 댁에 도착했다.  할머니라고 부르는 순간, 어머니께서 그 추운 겨울에 맨발로 뛰어나와 나를 꼭 안아 주셨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셨다.. 나를 너무나 찾으셨다고 했다. 그때 어머니의 사랑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하나님도 우리를 너무나 찾고 계시다.
그 어머니의 애타는 마음과는 비교도 안되는 아버지의 애틋한 사랑으로 안아주십니다.

참된 회개로 향하는 첫 단계는 사람이 죄악의 먼 나라에서 그가 처해 있는 불행을 의식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실질적인 그의 빈궁과 수치스러울 만큼 더럽혀진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삼상 15: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민 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여러분 모두를 죄인으로 몰아가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품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지켜보고 계신 하나님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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