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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젠 일어나십시오 (민 35:9-15, 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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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운동경기에서 돈을 받고 직업적으로 하는, 소위 프로선수가 아닌 사람을 가리킵니다. 본래 이 말은 라틴어 ‘amour’에서 나왔는데 그 말의 뜻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즉 사랑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사람이 아마추어입니다. 돈 때문이 아니라, 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 경기를, 그 일을,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마추어입니다. 그렇기에 아마추어 정신이란 참으로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진짜 아마추어라고 요한 서신은 말합니다.

요한일서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죄인 된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어떤 대가를, 어떤 상급을 바라셔서 하시는 것 아닙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구원 할 테니 넌ㄴ 내게 무엇을 줄 거냐?”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냥 사랑하시기 때문에, 죄인이지만 긍휼히 보셨기 때문에,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가 너에게 영생을 줄 테니, 넌 나에게 얼마를 주겠느냐?”고 하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천하보다 귀한 것이 생명이라고 보면 더더욱 구원 받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가집니다. 얼마를 내 놓을 건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실 구원 받는 대가를 우리가 지불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구원 받아야 하니까. 내가 죄인이니까…….
간혹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무조건 사랑하셨다는 생각에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라 그냥 넘어가시지 않으십니다. 죄악에 대해서는 감싸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죄의 삯인 사망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망만 남았습니다. 죄인이니까…….
그런데 우리가 무슨 재주로 죄를 없이 할 수 있을까? 돈 가지고 생명을 살 수 있어요? 학식가지고 연구하면 생명을 소유할 수 있어요? 돈이나 학식으로 육신의 생명을 연장 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10년 살 사람을 20년 살게 했다고, 100년 살 사람은 200면 살게 했다고, 살고 죽는 문제가 해결 되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심판 받아야 하는데, 우리가 생명 얻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우리는 도저히 그 심판 받을 수도, 그 대가를 지불할 수도 없습니다. 그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이 생명 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고, 이제 그 생명은 죄인의 생명이기에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구원 받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이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 죄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대가로 드려서 여러분과 저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로우신 하나님’, ‘은혜로우신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냥, 사랑한다는 그 하나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신약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고, 이 구약의 사랑은 곧 신약에서 행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에서 완성되어 집니다.

이걸 아셔야 합니다. 지금 가진 여러분의 생명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생명 가지고 살았는데, 예수님을 믿고 난 뒤도 그냥 그 생명인데, 그런 생각이 들다보면 지금 가진 이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을 내 놓아서 주어진 하나님의 생명인 것을 우리가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 여러분과 저의 생명은 태어날 때의 생명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나님의 생명인 것을 믿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생명은 태어날 때 가지고 태어난 생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편에서 선 사람들입니다.
링컨이 변호사로 있을 때, 한 사람이 찾아와 재판에서 자기를 변호해 달라고 했습니다. 링컨은 그 사람으로부터 사건 내용을 듣고 난 뒤,
“듣고 보니 당신의 잘못입니다. 나는 변호할 수 없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변호사란 무엇이나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닙니까?”
링컨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거절하겠습니다. 내가 평생 먹을 것을 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미 약속해 주셨으니 아버지께서 원치 않으시는 불의를 옹호 할 수 없습니다.”
링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셨고, 그래서 자신의 전 생애는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책임지시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렵고 힘들 때는 “내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겠지”라고 하면서도, 사는 것은 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내 생명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나는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그들은 구원 받은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도피성에 관한 것입니다.
도피성. 실상 세상사는 데는 도피성 보다는 감옥이 필요합니다. 보세요. 어느 나라든지 감옥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도피성은 한 곳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을 도피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에, 죄인은 반드시 잡아서 죄에 대한 벌을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도피성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도피성은 6개를 만들었는데 어디서든지 가까운 곳에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마을에든지 하룻길, 약 32km 이내였습니다. 그곳까지 가는 길은 넓었습니다. 보통 폭이 14m이었고, 걸림돌이 없었다고 합니다. 또 찾기 쉽도록 도피성(미클라트)이라는 표지판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높은 성벽도 없었습니다. 쉽게 들어 갈 수 있었고, 그 안에는 도피해 온 사람들이 지낼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생활필수품들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구약은 그야말로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인한 자는 살인 당한 가족이나 친척에 의해 살해 달 할 수 있었습니다. 살인한 자를 죽이는 것은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살인했을 경우는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 예로, 도끼로 나무를 하는데 그만 도끼 자루가 빠져서 그 도끼에 사람이 맞아 죽은 것입니다. 이런 실수로 인해 살인한 경우를 위해 도피성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도피성이 있다고 다 사는 것 아닙니다. 나는 죽을 수 없다고 도피하는 사람만이 살았습니다. 말하자면, 도피성까지 죽어라 하고 뛰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 뒤도 안돌아보고 뛰어야 했습니다. 아버지를 장사하러 갈 사이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복 자에게 잡히면 그냥 죽을 테니까. 가족들에게 작별하러 갈 사이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복 자에게 잡히면 그냥 죽을 테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양쪽의 강도.
하나는 살려는 의도가 없었습니다. 그는 “당신을 구원하고 나도 구원하라”고 예수님께 말했지만 그것은 조롱이 썩힌 해 본 소리였습니다. 진실이 없는 한번 해 보는 소리입니다. 가끔 그런 사람 있어요. 진실이 없는 소리……. 또는 남들을 웃기려고 하는……. 특히 교회에서 회의할 때도 그럽니다. 물론 유머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 가지고는 농담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한 사람,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달리 표현한다면, “주님, 당신이 하나님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도 가게 하옵소서.” 이것은 조롱이 아닙니다. 한번 해본 소리도 아닙니다. 그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영생을 얻고 싶었습니다. 평생에 한 거라고는 강도 밖에 없지만,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생을 얻고 싶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피성이 어디 있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 도피성으로 도망해야 합니다. 그 도피성을 향해 뛰어야 합니다. 보세요. 도피성이 6개가 아니라, 천개, 만개 있다 하더라도 그 도피성으로 피한 사람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죄 가운데서 그냥 앉아 계십니까? 이젠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도피성을 향해 뛰십시오. 죽음이 당신들을 잡으려고 달려오고 있습니다. 그걸 왜 모르십니까?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삽니다. 누구든지, 어느 민족, 어느 시대, 어떤 사람 즉 죄를 지었든 안 지었든, 잘났든 못났든, 공로가 있든 없든, 누구든지 에게 열려있는 구원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도피성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누구에게나 구원의 길은 열려 있지만, 그 길로 나아가는 사람이 구원을 얻습니다.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은혜는 준비되어 있지만, 그 은혜를 받고자 일어서서 나아가는 사람만이 그 은혜를 체험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에게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겁니다.

이제 도피성에 들어간 사람은 밖에 나오면 안 됩니다. 만약 나와서 돌아다니다가 보복 자가 그를 죽여도 죽인 사람은 죄가 없습니다. 도피성에서 나와 돌아다닌 사람이 잘못입니다. 그렇기에 그 도피성에 들어간 사람은 생명을 부지하고 살아있기는 하지만 진정한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 도피성에서 나올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하나, 그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을 때뿐입니다. 그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으면 도피성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도피성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비로소 그들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언제나 한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막 근처에서 살았습니다. 도피성에서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리면 6개의 도피성에 있는 모든 죄인들은 다 해방되었습니다. 그들은 완전한 자유이므로 여행도 자유롭게 하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죽음은 죄인들을 풀어주는 순간이 되게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신기하지 않나요? 대제사장이 죽으면 도피성 안에 도피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누군가가 죽어야 누군가가 산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아벨의 재물을 열납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믿음으로 드린 제사, 가인보다 나은 제사, 그것은 생명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구원도 그래요.
히브리서 9:11-12,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신 겁니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 역시 구원을 얻기 위해 생명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뭉그적거리면서 “주님 나를 도와주세요.” 혹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이래가지고는 구원이 없는 겁니다. 이젠 일어나야 하고, 이제는 주님께 생명을 드려야 합니다.

생명 드린다는 말이 무슨 말 입니까? 자신을 죽이는 겁니다. 그 동안 이게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 그러나 그것을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 붙잡고 “이거 아니면 난 못 살아”가 아니라 “예수님 당신 아니면 난 못 삽니다”로 바뀌는 것이 생명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때까지 끌어안고 있던 것 그것 버리는 것은 힘듭니다. 이때까지 살아온 삶의 습관, 그것 버리는 것도 힘듭니다. 그렇기에 그것을 끊어 버리는 것은 마치 죽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래야 합니다. 죽어야 합니다. 그런 것에서 죽어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 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에서 죽어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으십니까?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그러한 사실을 믿는 다는 것이요, 동시에 여러분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세요. 대제사장이 죽으면 도피성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이젠 자유인이 됩니다. 그런데도 못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입니까? 대제사장이 죽었다는 사실을 못 믿는 사람입니다. 대제사장이 죽었다는 것을 못 믿기에 혹시라도 밖에 나왔다가, 만약 대제사장이 죽은 것이 아니라서 보복 당해 죽으면 어쩌나 싶은 마음이 도피성에서 나올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너무도 많아요. 분명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서도 그 권세가 없어요. 무슨 말이냐면 아직도 도피성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겁니다. 분명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죄인에게 자유를 주셨는데도 아직도 도피성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죽으신 것을 믿으면서도 아직도 “내 죄 사하소서.” 그러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죽으셔서 내 죄를 사하셨음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죄 짓고 있습니다. 자유를 주셨는데도 여전히 죄의 노예로서 삽니다. 생명 주셨는데도 여전히 죽음의 삶을 삽니다. 마치,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도 눈 감고 다니고, 걷도록 해 주셨는데도 여전히 기어 다니고 있습니다. “나오너라.” 그렇게 나오게 해 주셨는데도, 여전히 무덤 속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의 뜻이 무언가를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뭐라 말씀하실지 그 응답을 기다립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사랑하셨습니다. 이미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내가 응답할 차례입니다. 그 말씀에 내가 어떻게 할 것이냐는 내 대답이 있어야 하고, 그 대답에 따른 내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갈림길에서 지팡이를 세웠다 놓았다 합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이 물었습니다. “무얼 하느냐?” 그 사람이 말합니다.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가야할 지 몰라, 지팡이가 넘어지는 쪽으로 가려고 한다.”고. “그렇다면 한 번이면 되는 데 왜 계속하십니까?”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대답합니다. 내가 원하는 쪽으로 넘어갈 때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음에도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사람은 마치 자기가 원하는 응답을 듣기 원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믿음은 “믿습니다.” 정도가 아닙니다. 믿음은 곧 삶입니다. 눈뜨게 하셨으니, 눈 뜨고 똑바로 보세요. 걷게 하셨으니 이제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세요.

보세요. 대제사장이 죽으므로 도피성에서 나왔어요. 그런데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넌 나를 죽이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살려주셨다. 난 도피성으로 도망쳤고, 또 대제사장도 죽었다. 그렇기에 하나님 말씀대로 난 자유인이다.” 이렇게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 중 크게 두 부류를 봅니다.
한 부류는 “살았다”고 감격만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살아나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늘 “주님 절 살려주세요.” 그리 기도합니다. 흙구덩이에 앉아서 소리만 치고 있습니다. 일어날 생각은 안합니다. 이들은 도피성에 들어갔다는 것으로 그만입니다.

다른 한 부류의 사람은, 은혜를 깨닫고 헌신을 다짐하는 사람입니다. 도피성에 있었음에 보복 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았고, 대제사장이 죽음으로 이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이제 제가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겠습니다. 도피성이 없다면, 대제사장이 죽지 않았다면, 난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이제부터의 삶은 주님 위해 살겠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줄 믿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애쓰고 수고해서 번 돈으로 구원을 얻었다면, 굳이 주님께 헌신 할 필요 없을 겁니다. 만약 길가다가 주웠거나, 공부 많이 해서 구원을 얻었다면, 역시 주님께 헌신할 필요 없을 겁니다. 그런데 아니잖아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죽으심으로 구원을 얻은 거잖아요. 그렇다면 이제부터의 삶은 그분께 드리는 삶이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보세요. 도피성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고 해서 모두 다 영원한 생명인 구원을 얻는 게 아닙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헌신을 다짐해야 합니다. 그리고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29에서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면 빼어 내버리라.” 30절,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어요? 꼭 그래야 한다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눈이 뽑히고, 우리 손이 찍어져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대신하셨습니다. 그분의 눈이 뽑히셨고, 그분의 손이 잘라졌습니다. 그분이 그 생명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멀쩡한 눈, 이 멀쩡한 손, 아직도 살아있는 이 생명으로 그분을 위해 일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분”, 곧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분을 위해 가장 먼저 헌신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이 없으면 교회 밖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교회 밖에서 아무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헌신하지 아니하고서는 교회 밖에서도 헌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일어나십시오. 죽음이 여러분을 몸을 안고 있습니다. 죽음이 여러분의 목을 조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 길은 도피성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가는 그 길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십시오. 대제사장이 죽으므로 도피성에 피해있는 사람들에게 자유가 주어졌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여러분에게도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이제 죄와 사망은 더 이상 여러분을 어찌하지 못합니다. 이제 그 무엇도 여러분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셨는데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뭉그적거리시렵니까?  이젠 일어나십시오.
이제 여러분 스스로의 삶을 사십시오.
이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사십시오.
이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십시오.
언제까지 죄 가운데서 죽음에 잡혀 있으렵니까?
언제까지 도피성 안에 머물러 계시렵니까?
이때까지 살아온 미련과 집착의 삶에서 일어나십시오.
이건 아니다 싫으면서도 어쩌지 못한 삶에서 일어나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생명을 경험하십시오.
(이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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