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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전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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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를 읽으며 깨닫는 것은 청년들이 읽어야 하고 시대를 이끌어 가는 한창 왕성한 장년세대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아니 아직 희망을 노래하고 내일을 계획하는 모든 이들이 읽어야 할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전도서는 인생의 종착점에 이르게 된 한 사람이 부르는 회한의 노래가 아닙니다. 다시금 세월을 돌이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그리할 수 없는 까닭에 부르는 염세적인 노래도 아닙니다.
솔로몬처럼 부귀영화를 누려본 사람이 있습니까?
솔로몬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아내로 맡아들여 낳은 아들입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세 번째 왕으로 등극하였고 다윗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성전을 짓고 봉헌하는 영광도 누렸던 사람입니다. 또 그의 지혜는 어떠했습니까? 처음 왕위에 오르면서 그가 드린 기도는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열왕기상3:7∼10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줄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한 솔로몬의 지혜와 명성은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원근각처에서 그의 지혜를 듣고자 달려왔습니다. 스바의 여왕이 그의 지혜를 듣고자 보물을 가지고 찾아오기도 하였습니다.
솔로몬의 시대처럼 이스라엘 왕조가 막강했던 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가장 막강하고 화려한 왕국의 시대가 열리자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신하들의 아부와 권력이 가져다주는 쾌락에 몸을 맡긴채 인생을 허비하였습니다.
그는 주변 이방국가들에서 수 많은 여인들을 궁녀로 받아들여 여인들의 치마폭에서 인생을 허비하였습니다.
좋은 말로 하면 해보고 싶은 것 누리고 싶은 모든 것을 누려본 사람이 솔로몬입니다.
전도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하지 말아야 하고 넘지 말아야 할 선 까지 넘나들며 살았던 전도자 솔로몬이 우리 인생들에게 주는 준엄한 인생의 지침서라는 것입니다.

한 해가 시작 된 1월에 말씀을 나누기엔 무겁게 느껴지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또 희망을 노래하고 기대에 부푼 1월에 들어야 이 한해를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고도 거룩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1)
전도자 즉 솔로몬은 인생의 황혼에 대한 두려움이나 인생의 결국에 대한 회의, 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하지 아니하고 창조주에 대한 인식을 명령한다는데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피조성에 대한 인식은 우리의 삶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바르게 즐길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유한한 인생으로 지으셨습니다.

쉽게 깨뜨려지고 언젠가 반드시 종착점이 있는 유한한 인생임을 기억하면 겸손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노년세대는 참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오직 자녀들만을 위한 세대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녀들만을 위해서 살다가 노후를 준비하지 못하고 노년에도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가는 쓸쓸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장년세대와 젊은 세대들의 많은 사람들이 노후를 생각하며 준비한다고 합니다. 연금을 들고 각종 노후보험을 통해서 불편하고 초라한 노후를 보내고 싶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래서 현대를 보험시대라고도 이야기하는 것을 듣습니다.

이 것은 로마의 우르반 대학 대강당에 새겨져 있는 글입니다. 오래 전 로마법대 졸업반에는 고학생이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감당할 길이 없어 필립 네리란 부자 노인을 찾아가 재정상의 도움을 청원했습니다.
네리 노인은 그의 요청을 들어주기로 허락한 후 다음과 같은 문답을 했습니다.
노인: 그런데 이 돈으로 무엇을 하겠소?  학생: 우선 법대를 마쳐야겠습니다.
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학생: 변호사가 되렵니다.
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학생: 돈을 벌어야겠지요.
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학생: 집을 짓겠습니다.
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학생: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학생: 결혼을 해야죠.
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학생: 자녀를 낳아서 교육을 시켜야죠.
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학생: 점점 늙게 될 것입니다.
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학생: ............

젊은 법학도는 대답을 못하고 다음과 같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엔가 내 피는 식게 된다. 나를 위한 장례식이 있을 것이고 공동묘지에는 무덤 하나가 더 늘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영원한 망각이다. .........
아무 대답이 없는 그 대학생을 향해서 네리 노인은 이제 엄숙히 입을 열었습니다.
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사망이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심판이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원이요.
비록 그 음성은 부드러웠으나 그의 마음속에 강렬히 와 닿는 그의 말은 결코 지워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자나깨나 어디서나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원이다." 이 말이 그에게는 큰 고통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현명한 결단을 내려 로마법대에서 우르반 대학으로 옮겨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성경과 신학, 역사 그리고 철학을 공부한 후 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거룩하고 경건 된 삶을 살아갔습니다.

희생의 세대 노년세대를 거울삼아 현재의 장년과 젊은 청년의 세대가 노후를 준비한다면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노후를 준비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 다음은 어떻습니까?
그 다음은 영원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음의 길은 영원을 바라보며 가는 길입니다.

희한하지요 담임목사님이 떠나시면 장례도 더 자주 납니다. 하나님이 저를 참 많이도 사랑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금주에는 이명구 권사님의 어머니 집사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장례를 집례하다가 김은덕 권사님의 어머니 권사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전갈을 받고 금요일에는 강릉을 다녀왔습니다. 이 분들은 하나님의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안에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인도하는 자가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오늘 성경은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젊은 때에 내 인생의 황금기에 하나님을 모시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곤고한 날이 노년만을 의미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 곤고한 날이 이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 가는 것에는 순서가 없습니다.  대학병원의 아동병동에 가 보십시오. 각종 소아암으로 인해 고통받는 아이들이 그렇게 많을 수 없습니다.
순서가 뒤집힐 때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너무 자주 태연하게 우리 주변에서 보는 일들입니다.
남의 일 같지만 내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들입니다.

전도자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 것에 유심하리로다."(전7:2)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을까요?
죽음 앞에서는 교만할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다 숙연해지고 겸손해집니다. 나도 가야하는 길이구나 하는 생각이 퍼득 드는 까닭에 삶에 진지해집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곤고한 날은 죽음을 앞에 둔 노년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도 때도 없이 다가오는 각가지 삶의 어려움과 문제들까지도 아울러 이야기하는 것을 통칭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 일 수 있습니다. 

그런까닭에 더욱 영원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데 이 땅에서의 삶이 마치 영원할 것처럼 사는 사람처럼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믿음의 가치를 붙들고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의 붙들어주시는 은혜를 간구하며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분 뜻이라면 이 땅의 모든 일들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준비하며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2. 인생의 황금기를 하나님께 드리며 살아야 합니다. (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2)
세대마다 다르겠지만 한번쯤은 분명히 인생의 황금기가 지나갑니다. 여름 한 낮의 해처럼 높고 뜨거우며 밤하늘의 달과 별들의 반짝임처럼 주목받는 시기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때가 하나님을 더 바라보며 그 분을 위해 여러분의 모든 것을 드리며 살아야 할 시기입니다. 인생의 황금기는 매일 반복되는 낮과 밤 같지 않습니다. 일생을 통틀어 한 두 번 경우에 따라 서너번의 기회를 주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인생의 황금기는 대부분 젊음과 지성이 가장 왕성한 때 함께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젊음은 좋은 것입니다. 연세 드신 분들의 한마디는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젊음의 시기가 방종과 육체적 정욕을 만족시키는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 때에 힘과 능력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시기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각자가 자랑하는 재능과 능력이 다 다른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리 잘하는 사람, 노래 잘 부르는 사람, 외모가 뛰어난 사람, 눈 썰미가 좋은 사람, 말 솜씨가 좋은 사람, 손 재주가 있는 사람, 저 같은 사람은 내어 놓을만한 특별한 뭔가가 없으니까 다른 사람의 사랑을 입도록 하는 하나님의 배려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음의 시간, 인생의 황금기는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시간처럼 빠른 것은 없습니다. 시간이란 녀석은 기다려주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기다리시지만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곤고한 날은 쏜살같이 온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해는 금방 동에서 떠 서로 기울고 달과 별들까지도 어둡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둡기 전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지나간 뒤에 손을 들면 소용이 없습니다.
지나간 버스도 손을 들면 멈추어 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나간 세월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아차 하고 후회할 때에는 우리의 귀는 어두어져있을 것이고 우리의 재능은 세월에 밀려 과거를 추억하는 것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그 때는 일 하고 싶어도 일 할 수 없고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자녀와 가족만을 위하며 살다가 인생을 마무리합니다.
내일해야지 내일 하며 미루다가 인생을 끝내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인에게 주신 시간은 오늘입니다. 준비해서 주님께 헌신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것은 착각입니다. 준비가 미비하지만, 또 준비하는 중의 그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제가 몇 번 말씀드렸는데요.

원주제일교회 김명기 감독님이 한 이야기입니다.  은퇴하고 노후를 보내고 있는 절친한 교수님과 함께 목욕탕에 들어갔더니 이 분이 하시는 말씀이 "성욕도 가고 물욕도 가고 명예욕도 가고 목욕만 남았네"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목욕도 결국에는 가지 않습니까? 목욕도 싫고 먹는 것도 싫어서 눈만 껌뻑이다. 그 것도 힘들어 숨만 간신히 쉬다가 그조차도 끊어지면 생명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황금기는 언제였습니까?
인생황금기를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주목하는 까닭에 너무 바빠 정신 못 차린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때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할 시간입니다.
능력을 인정받고 일에 가장 재미를 느끼고 있을 때가 바로 그 때입니다.
오늘 4절 말씀에도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 질 것이며"(4) 라고 말씀합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주목받고 수 많은 사람들의 환호성에 주목받던 스타중의 스타도 결국에는 사라지고 맙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반드시 새로운 스타가 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목하고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내는 때를 드리십시오.

이제 전도자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전도자는 죽음이 사람에게로 다가오는 모양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서술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모든 기능의 상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 질 것이며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 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4∼5)

손이 떨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때가 옵니다. 허리가 구부러져 세 개의 다리 즉 지팡이를 의지해야 할 때가 옵니다. 이빨이 없어 잇몸으로 먹어야 할 때가 옵니다. 귀가 어두워져 보청기를 끼어도 잘 듣기 힘든 때가 옵니다. 잘 듣지 못하는데도 새벽녘 새 소리가 들려 아침 일찍 일어나 앉아 할 일 없이 창을 내다보는 때가 옵니다.
그 때는 원욕이 그칠 것입니다. 모든 욕망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옵니다.
이 것이 유한한 인생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명구 권사님의 장례를 집례하면서 느낀 것 한가지는 시대가 돈 밖에 모르는 시대가 되긴 되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명구 권사님의 선산이 서산에 있었습니다. 이미 이명구 권사님 조차 알 수 없는 때부터 그 산은 조상들의 시신을 모셨던 곳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손들이 모두 그 동네를 떠났습니다.
50여기가 묻힌 선산에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선영에 갈 수가 없습니다. 왜 동네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을 발전기금 명목으로 후원금을 주고 동네사람들을 고용하여 장례를 준비하므로 장례를 모실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연결시키는 모습이 씁쓸한 마음이 들게 했습니다. 죽은 자에 대한 조금의 배려도 없고 그 마을에 이미 오래전 살던 이들에 대한 예의도 안중에 없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것이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사십니까? 무엇을 바라보며 달려가고 계십니까?
궁극적인 인생의 목적과 목표를 잃어버리고 달려가다 노년에야 비로서 제 궤도를 찾은 전도자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 이것이 내일을 계획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세대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라고 미리 포기하시는 분들이 있으시다면 절대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 때가 시작할 때입니다. 젊음은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때가 젊음의 때입니다. 시작하고 계획하고 도전하는 사람이 청년입니다. 젊음은 아니어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새로운 전성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기를 간구하며 신앙의 삶을 집중하여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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