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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산 증인들 (눅 2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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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한번 나서 살다가 때가 되면 죽게 됩니다. 그래서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삶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 인생이란 말입니다. 사람이 나서 자라고 늙어가는 것이 모두 결국은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죽지 않은 장사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을 치며 죽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결국에는 다 죽어 이 세상에서 사라져 가게 마련입니다. 물론 흔적이야 남겠죠. 우리네 기억 속에 남기도 하고 무덤으로 남기도 하고 요즘에는 영상으로 남기도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이야말로 우리 죄악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 사는 인생이 감당해야 할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이 아닌 죽음을 딛고 다시 사는 인생에 대해서 이 시간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무덤에 장사지냄으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왜요?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로 인해서 죽을 수에 없는 인생이 주님 안에서 다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먼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오늘은 그 주님 부활의 첫 증인들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부활의 첫 중인으로서의 여인들이 있습니다.
사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실 것으로 믿고 무덤을 찾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의 죽으심을 슬퍼하면서 예수님의 시신에 유대인의 풍습을 따라 향유를 부어 드리기 위해서 무덤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그 큰 무덤 문을 옮겨줄 사람이 없어 염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갈릴리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가지 줄 곳 주님을 따라왔던 여인들입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여인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 가운데 그 누구도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그들은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시고 또 야이로의 딸이라든가 과부의 청년 아들 등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주셨지만 그 신비한 능력도 결국은 살아있을 때 이야기지 죽은 다음에는 소용이 없지 않느냐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부활하신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 죽은 자로서의 예수의 시체에 향유를 발라드리기 위해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이레의 첫날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됩니다.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무덤에서 굴러져 나간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싶어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있어야 될 시신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누군가가 시체를 다른 데로 옮긴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도 듭니다. 그렇다면 시체가 없어졌으니 향료를 발라드릴 수도 없습니다. 아니 향료를 발라드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것이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들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눈부신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앞에 나타납니다. 여자들은 두려워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그들이 여인들에게 말을 합니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아라. ‘인자는 반드시 죄인의 손에 넘어가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다.”
그때서야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덤에서 돌아와서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알립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한분이 다시 사신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다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주님의 부활의 생명이 저와 여러분 모두의 것이 되어 우리 역시 주님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부활을 주님의 무덤을 찾았던 이 여인들이 최초로 목격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서 당황하기도 하였지만 천사들의 전하는 말을 통해 예수님이 일찍이 주셨던 말씀을 그들은 다시 기억하게 되었고 비로소 주님의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요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기에 우리도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부활은 주님 한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믿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영원한 생명과 연결이 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도 이 예수님을 믿어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던 죄의 굴레로부터 이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죽음은 우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살겠고 또 영원히 살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처음 여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죽음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죽음으로만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들여다보며 울고 있을 때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여자여 왜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하기를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 그 마리아는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의 생각이 온통 예수님의 죽음으로만 가득했지 다시 살아나실 것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예수께서 묻습니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셌습니다.”하고 말합니다. 다시 예수님이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니 그제야 그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선생님!” 하고 부릅니다. 이 요한복음의 설명을 통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어떤 생각에 빠져 있게 될 때 그것이 얼마나 우리를 사로잡는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 예수님은 죽으셨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거기서 멈춥니다. 예수님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증거를 해도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이 생각이 났어도, 다시 사신 예수님이 눈앞에 있어도 죽은 예수님의 시체만 찾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죽음에 매여 있습니다. 죽음을 슬퍼합니다.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입니까? 아닙니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일 뿐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지라도 이미 예수님을 믿어 부활의 생명을 지닌 우리들에게는 더 이상 죽음은 심판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이어지더란 말입니다. 이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다시 사신 생명은 이제 예수님 한분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앞에서 다시 살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오르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신 것같이 우리도 하나님 나라로 들림 받아 들어가게 됩니다. 이 하나님 나라에 나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분들을 초청하여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생명의 사람들 부활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려서 믿지 못하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이제 여인들은 무덤에서 돌아와서,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알립니다.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인 마리아였고 이 여자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도, 이 일을 사도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는 이 말이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렸으므로, 그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어찌 믿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죽음으로 모든 것은 끝인데 말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일어나서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굽혀서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는 시신을 감았던 삼베만 놓여 있었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시체는 어디 가고 예수님의 시신을 감았던 삼베만이 놓여있는 것일까요? 그는 일어난 일을 이상히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여기 제자들의 반응이 당연합니다. 분명히 십자가에서 죽었던 예수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니 어찌 믿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나중에 자기들을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보기 전까지는 이들은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말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다니요?

그러한 혼란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모든 사람들의 눈에 보인 것처럼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 역시 그들의 눈에 확실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나보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정말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을 수가 있었는데 하물며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야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누구도 예수를 다시 사신 분이라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만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 안에서 우리는 예수를 나의 생명의 주님으로 고백할 수가 있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원히 죄 가운데서 살다가 죽어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의 굴레로부터 벗어났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죄에 매이지 않습니다. 죄가 우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죄에는 형벌이 따르지만 우리의 죄는 이미 다 용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멸망이 아닌 새 생명의 출발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는 것도 내게 유익하다고 바울 사도가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바로 나의 죄 때문인 줄 믿으십니까? 이것이 믿어진다면 그래서 믿는다고 고백하게 될 때 예수님의 죽음은 헛된 죽음이 아닌 나의 모든 죄를 멸하기 위한 죽음인 것이요 그 안에서 우리 역시 다시 살게 된 것입니다. 즉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주님과 함께 죽은 자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 자리에서 나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살아나실 때 나도 함께 다시 살게 된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우리가 죄의 삯을 다시 치를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죄 값을 예수님께서 다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겠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이미 예수를 주로 믿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라고 하는 사실을 믿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죽으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앞에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지닌 자로서의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며 또한 이 영광과 생명의 자리로 주위 사람들을 이끌어 들이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죄 가운데서 태어나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당할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 죽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 값을 다 치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당당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 될 수 있는 것도 역시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영원히 멸망당할 우리를 예수님이 용서하시고 사랑하여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보배롭고 존귀한 자로 삼아주셨는데 그런 우리가 작은 세상일에 매여 미워할 이유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도 주님 안에서 존귀한 자요 상대방도 주님 안에서 존귀한 자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디시 살아나셨습니다. 그 주님 안에서 우리도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의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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