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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날 밤의 조명 (행 2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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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꿈속에서는 슈퍼맨입니다.
슈퍼맨 하니 슈퍼마켓 점원이란 말이 아니고
꿈속에서 항상 날아다닐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그래서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리거나 아니면 절벽에 떨어져도
팔만 흔들면 제가 나는 것 있지요.
다급하면 날아다닐 수 있는 노하우가 있습니다.
이걸 심리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째든 저는 꿈속에서는 항상 슈퍼맨 인 것 있지요.
제가 꿈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사도 바울이란 인물을 가만히 보면 적어도 복음 전하는데 있어서는
어떤 장애물도 뛰어넘는 남다른 노하우를 가진 복음의 슈퍼맨입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 결론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암송하거나 찬송을 부를 때 멋 적을 때가 많지요.
왜? 나의 삶이 말씀처럼 찬송가 가사처럼 살지를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바울은 빌1:20절
[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 라는 말씀처럼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데 담대했습니다.
유대인에게 핍박과 매를 맞고 죽을 뻔 한 때도,
로마 군인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당할 때도 바울은 두려워하지 아니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적어도 복음전파에 있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담대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1. 하나님 앞에 담대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1절)
이제 바울은 로마 천부장의 지시로
유대인들이 무엇 때문에 송사하는지 알기 위하여
제사장들과 공회원들이 모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1절에 바울이 공회원들을 주목하여 하는 말이
[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
고 합니다. 이 얼마나 담대하고 대단한 고백입니까?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담대한 사람이겠습니까?
권력 가진 사람, 빽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 아니지요.
사람들 앞에 큰 소리 친다고 담대한 사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담대한 사람입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습니까?
바로 신앙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런 면에서 여러 곳에서 자신은
[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 고 고백합니다.
롬1:9절에도
[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도신다 ] 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 고백합니다.
양심 따라 살아가는 사람 - 하나님 앞에 담대한 사람입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일생동안 양심의 세미한 소리에 고요한 귀를 기울인 사람입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가 일생동안 지켜 온 양심은
철없던 어린 시절부터 순진하게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소년 알베르트는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게오르크라는 소년과 씨름을 했습니다.
게오르크는 나이도 위였고 몸집도 컸지만 그를 쓰러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게오르크가 하는 말이[ 나도 너처럼 일주일에 고깃국을 두 번씩 먹으면 너 같은 건 문제없을 거야 ] 이 말을 듣는 순간 알베르트는 씨름에 이겼다는 기쁨은 사라져 버리고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후 알베르트는 고깃국만 보면 입맛을 잃고
항상 게오르크의 음성을 생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 이 세상에는 고통과 고난 속에 허덕이는 이들이 많은데
이들을 외면하고 나는 자신의 행복과 건강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일일까? ]
이것은 이미 음악의 대가가 되었고,
신학박사,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30세의 청년 슈바이처 박사의 갈등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양심에 못 이기고 그 모든 부귀와 명예를 포기하고서
검은 대륙을 가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7년 후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1913년 3월 26일 저녁
프랑스 보르도에서 아프리카로 향하는 기선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 배를 우리는 양심의 배라고 합니다.
그후 슈바이처는 [ 양심은 하나님의 음성이다 ] 라고 합니다.
바울이 오늘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 나는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 고 한 고백
의역하자면 [ 나는 내 양심껏 하나님 백성 노릇 다하였노라 ] 는 뜻입니다.
어떻습니까? 내 양심에 거리낌 없이
나는 하나님 백성 노릇 다 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또한 내일교회 교인으로서, 나아가 직분자로서
양심에 거리낌 없이 자기의 자리를 지켰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바울이 오늘 말하고 싶은 이 '양심'은 '선한 양심'(good conscience)입니다.
바울이 전날 자신에게 덮어 씌워진 유대인들의 고발에 대해 무죄함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시민원리와 법규대로 살았습니다.  이 중심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나는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고 한 말은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자존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바울의 입을 처라고 합니다.
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의 입을 치라고 할 때 바울의 반응은 어떠했으며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은 무엇입니까?(2-5절)
이 말을 듣는 순간 바울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3절에 보니
[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려하느냐? ]
바울은 조금도 양보하지 아니하고 반박을 합니다.
바울도 성격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재판정도 법관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불의한 일을 보고는 참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회칠한 담이여 ! 라고 반박을 합니다.
이 "회칠한 담이여!"  회칠한 담은 다른 말로 회칠한 무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에 많이 모이게 되면
평소에는 몇 만 되지 않던 예루살렘 주민들 수백만의 사람들이 몰려오면
예루살렘 시내에 묶을 여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도 자야 되고 사람들이 이렇게 산에서도 잠을 자는데
그 이스라엘에는 산마다 동굴이 매우 많습니다.
그 동굴 중에는 빈 곳이 있는데 서민들에게는 잠자리로서는 최고입니다.
일주일 순례를 하기 위해서는 한 달을 소비해야 됩니다.
오는 시간 가는 시간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들이나 산에서 밤을 새우게 되는 데,
그 동굴 중에는 무덤이 또한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모르고 시체가 누워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하면
문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들어가게 되는 부정을 타게 됩니다.
유대인의 결례의식에 의하면, 부정한 것을 만진 자는
결례의식을 하고서 일주일을 기다려야만 성전에 갈 수가 있어요.  
일 년에 모처럼 순례의 길을 지방에서부터 올라왔는데
실수해서 부정한 곳에 들어가면 일주일 동안 성전 못 가게 되니깐,
그의 순례에 길은 아주 망쳐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을 막기 위해서 예루살렘 시 당국에서 명절 전에는
산을 싹 돌아다니면서 무덤인 동굴 앞에는 회칠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얗게 칠 해 놓았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깨끗해서 좋고
또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저게 무덤이라 생각하여 피해서
빈 동굴에 가서 자도록 하는 예루살렘 당국의 서비스였습니다.
이것이 회칠한 무덤이요, 회칠한 담입니다.
이것이 이제 비유적으로 사용되면
속에는 썩은 시체가 있으면서도 겉은 매끄럽고 화려한 모습이
바로 회칠한 담의 상징적 의미가 됩니다.  
사람에게 적용하면 네 마음속에는 죄와 불의와 탐욕이 가득하지만,
겉으로는 의인인 척 하는 이 외식하는 인간아! 그런 뜻입니다.
굉장한 모독입니다.
대제사장 보고 모욕적인 말을 했으니
이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사람들이 너 누구보고 욕하느냐?
저 분이 누군지 아느냐?  대 제사장이시다. 그랬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듣는 순간
자기 입장을 바꾸고 그 권위에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5절에 [ 나는 그가 대제사장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백성의 관원들을 비방하지 말라고 했는데 제가 잘 못했습니다 ]
바울이 당장 사과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경건입니다.
예수님도 제사장들에게 무척 시달림을 받으셨고
사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붙인 것이 제사장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완악한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욕을 퍼부을 때도
[ 화 있을 찐져 ] 시리즈가 있지 않습니까?  
이 "화 있을진저."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욕을 하실 때에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만 욕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의 단체였기 때문에
그러나 더 죄 많은 제사장들을 향해서는 욕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기름을 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존중히 여긴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못된 명령을 내리는 그 권위에 대해서
도전을 하고 항거를 합니다.
도전하고 항거하는 형태가 데모를 하고 시위를 하면서
심지어 투석 내지 화염병을 던지며 폭력을 휘두르며
안 되면 분신자살을 합니다.
심지어는 학생들이 총장을 강금하고 머리를 깎이면서 정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잘못된 권위, 권위주의의 사람들에 의해서 회생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의 내용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아니했지만
재판 자체를 거부하거나 재판장의 권위에 대해서 도전하지 아니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사도 바울도 5절에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고 하면서
출22:8절의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 너의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 고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심지어 바울은 롬13:1절에
[ 각 사람은 이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
권세에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합니다.

그럼 권세를 가진 자가 잘못을 행할 때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것이 자신의 문제라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는 것입니다.
3. 바울은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합니까?(6절)
바울이 대제사장이라는 말을 듣고는 비록 율법으로 재판한다는 자들이
율법을 어기고 있지만 그 권위에 도전하지 아니하고 다른 말을 합니다.
진리를 선포한 것입니다.
바울이 공회원들을 바라보니
한 부분은 사도개인들이고 한 부분은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6절에
[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 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만약 바울이 체제에 도전하며
[ 회칠한 무덤이여 ! ] 라고 대제사장을 향해 도전할 때
공회원들이 [ 너 지금 뭐라고 했나? 감히 대제사장한테 ] 라고 하는데
[ 내가 뭐 지금 틀린 말 했나 바른 말 했지, ] 하고 항변했더라면
싸움이 바울과 공회원들 간 싸움이 되었을 텐데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고 말하니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간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럼 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습니까?
4. 사두 개인과 바리새인의 다툼이 왜 일어났으며
다툼의 결과가 주는 신앙적 의미는 무엇입니까?(7-10절)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중시했고
부활을 믿으며 천사와 악마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저들은 대단히 종교적입니다.
반면에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보다는 인간의 의지를 중시하고
천사나 악마는 없다고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대단히 종교적이고
사두개인들은 현실적이고 정치적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기가 바리새인의 신분이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싸움이 났습니다.
아마 이랬다고 생각이 됩니다.
[ 나는 바리새인으로써 부활교리 때문에 이렇게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
하고 바울이 말을 던지자, 바리새인들이
[ 바울이 우리의 부활교리를 지지하는데? 맞아, 부활은 있지.
그런데 부활 때문에 왜 저 사람이 고생을 하는가?  그러면 안 되지. ]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자 사두개인들이 [ 부활? 허! 말 같지도 않는 얘기 왜 하느냐? ]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 말 같지 않다니? 뭐가 말 같지 않소. 부활이 말 같지 않단 말이요? ]
이래가지고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사이에 싸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바리새인들 하는 말이
[ 천사나 영이 말씀하셨다면 들어야지! ]
그들의 교리가 모두 나오게 됩니다.
바울이 바리새인으로서 부활을 말하므로,  
바리새인들은 벌써 바울 편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변호하다가 나중에는,
9절에 보면,
[ 크게 훤화가 일어날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뇨? 하여 ]
큰 분쟁이 생겼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바울을 살리라 하고 사두개인들은 안 된다,
우리 교리에 대하여 정면으로 공격하므로 반드시 죽이라.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서로 싸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의인이 악인과 같이 싸우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악인은 결국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한 구조와 부조리한 체제 속에 있을지라도
그 체제에 도전하고 항거하게 되면 더 큰 문제가 생깁니다.
결국은 데모나 시위나 혁명이 해결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 다른 피를 불러오게 합니다.
악인의 손에 악인이 죽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선배 목사님이 그래요
[ 김 목사 ! 하나님은 의인은 절대 악인들과 싸우도록 하지 않는다 ]
악인들은 자기들 끼리 싸우다가 망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천부장이 가만히 보니 양파 싸움 사이에 사람 죽이겠으니까,
바울을 끌어다가 또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바울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밤이 되었습니다.
5. 11절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라는 말씀이 주는
신앙적 의미가 무엇입니까?
바울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 몸은 몰매를 맞아 죽을 뻔한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몸은 부셔졌고 마음은 외롭습니다.
동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온 천지에 기댈 데가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여기서 나갈 수도 없지만 나간다고 해도 다 때려죽인다고 벼르니
예루살렘에 오면 고난이 있다고 각오는 했지만 이런 줄은 몰랐어요.
내가 정말로 계시를 잘못 받은 걸까?
몸도 마음도 영혼도 파김치가 된 상태에서 그는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11절에 조명이 비춰옵니다.
[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
이것이 바로 바울의 복음전파에 어떤 장애물 앞에서도
뛰어넘을 수 있는 복음전파의 노하우요
신앙생활의 노하우인 것입니다.
바울에게 바로 그날 밤에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것을 성령의 조명이라고 합니다.

그날 밤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 첫 째는 담대하라,
바울아!  바울아!  힘내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네 눈에는 안 보여도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2) 그 다음에는 위로의 칭찬을 합니다.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 한 것같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 한 것이 없습니다.
증거 하려고 하다가 죽도록 얻어맞았고 죽을 뻔했으며
역효과만 일어났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패배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주님은 너는 예루살렘에서도 나를 증거 했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과 그의 의도하는 바대로
말을 비록 끝까지 마치지는 못했어도, 죽이겠다고 하는 군중 앞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주님은 바울의 심정을 아십니다.
네가 예루살렘에서도 나를 증거 했다. 인정해 주십니다.

3)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속하십니다.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지금 바울의 관심사는 지금 내가 살 수 있을까?
그리고 로마에 갈 수 있을까?
그런데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갈 수 있다.
내가 로마로 널 보낼 것이다. 그런 얘기입니다.
로마를 다른 말로 바꾸면 그에 최종 목적. 바울의 비전입니다. 
그 목적 그 비전, 거기에 대하여 하나님이 약속을 주는 것입니다.
네가 소원하는 바대로 로마로 갈 수 있다. 보내겠다 그런  말입니다.
 
내일의 가족 여러분 !  
하나님이 바울에게 로마에 가겠다고 하는 말 속에는 많은 대답이 있습니다.
이 말 한마디 속에는
결코 바울이 유대인들의 위협 속에서도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 어떻게 갈 지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목표는 분명한데 과정은 모릅니다.
가긴 갈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보낸다. 그 다음 말은 없습니다마는
그러므로 믿고 기다리라. 그런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큰 위로를 받습니다.
죽음과 암흑 속에 있던 그 마음이 주님을 만나서 밝아지고 기쁨이 충만하고
그 감방이 성소가 되고 평화가 가득한 현장으로 바뀌어 갑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미래가 어찌될 것인가?
우리는 우리 미래에 대해서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분명한 것은 우리의 최종 미래는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승리의 개가입니다.
하나님의 성숙한 자녀들 여기에 대해서는 의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장하셨기 때문에
비록 가는 과정은 엎치락, 뒤치락 어려운 일이 많겠습니다마는
우리의 최후의 모습에 대하여 주님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 넉넉히 이기느니라 ] 할렐루야~!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가는 것이냐? 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바울이 알지 못합니다. 우리도 알지 못합니다.
내가 원하는 방법일 수도 있고,
내가 원하지 않는 전혀 의외의 방법을 통해서도 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이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어느 길로 갑니까? 어느 배로 갑니까? 언제 갑니까?
여기에는 묻지도 않고 대답도 않습니다.
내가 가는 길은 다 몰라도 됩니다. 결론만 알면 되는 것입니다.
마치 배가 항해하고 있는데 풍랑이 마구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시107:30절
[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도다 ]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은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나치 수용소에서 모진 고문과 학대를 당하지만
마침내 살아 나오게 되는데
그가 수용소에서 죽어 가는 사람을 잘 관찰해 보니까,
제일 빨리 죽는 사람이 누구냐? 낙심한 사람이 빨리 죽더랍니다.
옷을 벗기고 매를 맞고, 구타를 당하고 노동을 하면서
그가 생각한 것은 빨리 과거를 잊자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옛날에 박사였고 의사였고 유명한 교수였고 이런 생각하다가는 죽지,
왜냐하면 분해서 못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잊어버리자고 생각하고 그는 빨리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받아들이는 것 가지고 안 되더라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삶의 목적을 가지자 !
내가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목적을 향합니다.
이 지긋지긋한 수용소를 빨리 벗어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 고문에 대하여 증언하고
나치가 우리를 얼마나 학대했는지 가르쳐야 되겠다고
그것이 내 남은 생의 사명이다.
그 다음부터는 나치의 고문을 더 똑똑히 두 눈으로 쳐다봅니다.
그런데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수용소의 죄수라는 사실은 바꿀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절망인가?.
상황을 바꿀 수 없을 때 절망해야 되는가? 하다가 그는 하나를 깨닫습니다.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을 때 그때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상황을 해석하는 자신의 관점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는 나중에 "Logotherapy"(로고 세러피)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의미 요법이라고 하는 정신 치료법입니다.
상황은 똑 같애요. 그러나 상황을 해석하는 각도를 바꿉니다.
신학적 의미로 말하면 고통의 미래적 의미를 생각합니다.
현실은 답답해요 안 바꿔집니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내 해석이 바뀝니다.
현실에 대한 내 해석이 바뀔 때 현실도 바뀐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로고 세러피> 즉 의미요법 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의 로고 세러피 - 말씀요법으로 - 바로 성령의 조명이구나 싶어요
이대로는 절대 생각이 안 바뀌어요.
그러나 말씀을 통한 성령의 조명이 비취면
아하~! 이런 거구나 하고 현실에 대한 해석이 바뀌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내 인생 길, 사명의 길에 성령의 조명이 비춰지면
모든 것이 더 분명해 지고 확실해 진다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그날 밤이 있는 사명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날 밤의 조명으로 내 인생 가는 길이 달라지고
내 결정된 인생길이 더 분명해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그날 밤이 참 많았습니다.아시아로 향하던 바울의 발걸음을 유럽으로 옮겨놓을 때도행16:9절에 그날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지시를 한 것입니다.그날 밤 - 주님께서 나타나신 밤입니다.
성령의 조명이 비취던 성령님께서 말씀하신 밤입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호를 타고 로마로 호송되어 가는 중유라굴라 라는 태풍을 만나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을 때행27:23절 이하에[ 나의 속한 바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 합니다.주께서 말씀하는 밤, 그날 밤의 조명이 있는 성도는 그 환상이 점점 더 분명해 질 줄 믿습니다.
그날 밤의 신앙, 그날 밤의 조명이 있는 사명의 삶을 살아가는
내일의 가족들 되시기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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