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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라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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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는 이스라엘의 대 선지자로 그 위치를 굳건히 하고 있습니다. 물론 엘리야 이전에도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사시대의 사무엘이나 그 이전의 모세,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도 선지자로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선지자들의 활동무대는 이스라엘 왕정시대부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릿 시냇가로 피신해 있던 엘리야에게 미물의 까마귀들을 명하여 먹게 했습니다. 이번에는 시돈 땅 사르밧의 한 과부를 통해 엘리야를 먹이시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엘리야는 그곳에서 한 과부에게 떡 한 조각을 요청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과부의 모든 것을 요청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과부가 가진 한 움큼의 밀가루와 병에 기름 조금은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최후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사르밧 과부를 통해 엘리야를 공궤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과부는 엘리야의 요청대로 그녀의 것을 포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엘리야의 요청대로 떡을 구워서 먼저 엘리야를 대접했습니다. 그녀의 이 같은 행위의 결과는 그녀의 인생관, 역사관, 우주관이 새롭게 정립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선택된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선택된 이 과부의 전적인 헌신과 죽음을 불사한 결단은 잃음으로서 얻는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죽고자 하면 산다'는 원리가 아니겠습니까?

Ⅰ. 하나님은 엘리야를 먹이는 과정에 흉년 만난 가난한 이방인 과부를 선택했습니다.

본문 17장 9절에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지역적으로 시돈 땅은 이세벨의 부친인 시돈 왕 엣바알이 다스리는 지역입니다. 이세벨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들을 핍박하는 당시의 적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이러한 때 공교롭게도 엘리야는 이세벨의 고향 깊숙한 곳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종 엘리야가 이방 여인에게 공궤를 부탁하는 것은 엘리야로서는 참기 어려운 수치입니다. 하필이면 그곳 과부에게 공궤할 것을 명하셨다고 하셨으니 설상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과부들은 집안의 가장인 남편이 없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온전한 대접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경제적 지위는 남편 있는 자들에 비하여 형편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여기 {공궤}(供饋)라는 말은 단순히 음식을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본래 공궤(카르케레카, )는 '간직하다'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이 말은 음식을 공궤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음식을 포함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정성껏 보살펴 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쨌든 단순히 음식이라고 해도 이방인 과부에게 하나님의 종이 공궤 받도록 한 것은 보통의 경우는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역사를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져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31절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뿐입니다.

1) 하나님이 엘리야를 위하여 예비해 놓은 이방인 과부입니다.
(1) 엘리야가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본문 17장 10절에 {저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라고 했습니다.
(2) 그 과부는 그곳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본문 17장 10절에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고 했습니다.
(3) 엘리야는 그녀에게 물을 가져올 것을 요구했습니다.
본문 17장 10절에 {…이에 불러 가로되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고 했습니다.

2) 그녀는 가난한 이방인 과부입니다.
(1) 엘리야는 다시 그 과부에게 떡 한 조각을 요구했습니다.
본문 17장 11절에 {저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저를 불러 가로되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2) 그녀는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이 조금뿐인 과부입니다.
본문 17장 12절에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고 했습니다.
(3) 그녀는 죽기 전에 아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위한 한 조각의 떡 뿐인 과부입니다.
본문 17장 12절에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아합 당시의 가뭄은 팔레스틴 뿐만 아니라 주변지역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극심한 가뭄에 물을 요구하는 것은 피차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사르밧 과부의 첫 번째 시험(test)입니다. 동시에 엘리야 자신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자신을 공궤할 자가 누구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엘리야는 물보다 더한 떡 한 조각을 그녀에게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사르밧 과부의 두 번째 시험(test)입니다.

아울러 엘리야에게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자신을 공궤할 자를 확인하는 두 번째 기회였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절박했습니다.
바로 본문 17장 12절에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고 한 말입니다.

Ⅱ.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기 위해 그녀에게 자기 소유의 해체(解體)를 명령했습니다.

본문 17장 13-14절에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물을 요구한 데서 떡 한 조각을 요구받은 과부는 너무 당황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아들과 함께 먹을 마지막 식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부터 떡 한 조각을 요구받은 그 과부는 자신의 전부를 요구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더욱이 자기 아들의 몫까지 요구받았기 때문에 지금 이 상황에서 더 이상의 요구는 없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녀의 절박한 대답을 인정하면서 그녀에게 마지막 시험(test)을 했습니다.
첫째,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두려워하다'(야레, )라는 말은 동물적 무서움(fear, afraid) 외에 존경(respect)의 뜻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 이 과부의 두려움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심입니다. 이러한 공포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차원 높은 것으로 대체효과가 있을 때 가능케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과부의 장래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은 그 두려움의 존재를 무가치하게 만들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소망의 경외심으로 가능케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네 말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셋째, 먼저 그것으로 나(엘리야 자신)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만들어 먹되 먼저 엘리야 자신에게 먼저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양식 그것을 하나님께 먼저 바치라고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우선 순위의 서열을 범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과부에게 나를 위해 만들면 너 먹을 것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자연적 역사를 보증하는 선언적 명령입니다.
넷째, 그리고 그 떡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다섯째,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고 했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에게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했습니다(17:12). 엘리야는 그녀에게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17:14).
엘리야가 너희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므로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Ⅲ. 하나님의 뜻은 죽음을 불사한 순종으로 확인 되고 선택은 구원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본문 17장 15-16절에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사르밧 과부에게는 식구라고는 아들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식구}(바이트, )라는 말은 그녀에게 속한 권속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여러 날 먹었으나}라고 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4절에 다시 비가 내릴 때까지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기간은 긴 시간입니다. 적어도 2년이나 되는 긴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가뭄이 3년 6개월간이나 지속 되었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7절에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라고 했습니다.
특히 가루가 없어지지 아니하고 병에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했다고 하는 말은 과학적 설명을 필요치 않습니다. 이것은 논리적 해석을 필요치 않습니다.
이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설명될 뿐입니다.
마가복음 6장 41-43절에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엘리사가 가난한 과부에게 기름병에 기름을 가득 채워 주었던 기적으로 설명 될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4장 4절에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여인이 물러가서 그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저희는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 오고 그는 부었더니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들이 가로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고한대 저가 가로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합리적 이해를 필요치 않습니다. 이것은 가나 혼인 잔치 때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의 기적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 7-9절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 집에서 2년 동안을 족히 공궤 받은 것이 확실합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를 공궤함으로 선지자의 상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10장 41절에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위하여 사르밧 과부를 선택했다는데 무게를 두어야 합니다.
한번 선택된 그는 결국 하나님의 일에 선용되었고 그 선용된 상급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녀가 구원을 받음으로 그녀를 통하여 모든 권속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키는데 선용된 사르밧 과부의 복입니다. 기적은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입니다. 기적은 듣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입니다. 곧 기적은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은 힘이 있는 것입니다. 기적의 완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심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장차의 재림입니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과제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그 남은 과제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미완성이나 불충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남은 고난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택자를 찾으시는 교회 운동에 있습니다.

교회운동의 선택된 자에게 하나님의 요구는 언제나 제일의 것입니다. 때로는 그 요구가 절박합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얻은 이삭을 요구하기도 하시고 한나가 죽음의 고통을 겪으면서 얻은 사무엘을 요구하실 때도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에게는 아들과 함께할 최후의 만찬에 쓸 보잘것없는 한 움큼의 가루와 기름 조금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들은 죽음의 흉년 가운데서도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최우선합
니다. 그 일을 뿌리치지 아니하고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쓰임 받는 자는 결국 자신이 형통하게 되고 온 권속들까지 자신을 통하여 형통함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 집에 석달동안 있을 때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받은 복입니다(대상 13:14). 을 더 이상 에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에 사르밧 과부처럼 선택된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할 때 현재의 자신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발 안 죽는다고 하는데 죽는다고 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것을 먼저 드리면 다음에는 자기의 것이 있는데 마지막이라고 하지 맙시다. -아 멘 -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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