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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께서 외면하신 사람들 (마 8: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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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예수님은 산상 보훈을 통해 서기관들과는 달리 권세 있는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문둥병자와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셨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낫게 하셨습니다. 각종 귀신들린 자와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권세를 나타내셨습니다. 그 분의 놀라운 가르침과 놀라운 능력에 대한 소식이 널리 퍼져나갔고,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예수님은 ‘사명의 본질과 제자의 도리’를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만약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마구 몰려든다면 참 신나는 일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보시고 피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18)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을 찾는 그들의 목적이 바르지 않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은 단지 병을 고치고, 신기한 능력을 행하는 것을 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한두 명 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후에도 병으로 고통 받는 자를 기꺼이 고쳐주셨습니다. 그들 중에는 병 고치려는 목적만으로 나아왔다가 고침 받은 후에 예수님을 바르게 믿게 되는 예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바르지 않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무리가 되고 에워싸게 될 지경이 되었을 때 생깁니다. 그때부터 원래의 목적은 왜곡되고 사명의 본질이 흐려지기 쉽습니다. 죄로부터 인생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은 용한 종합병원 의사처럼 인식되겠지요. 예수님은 위기를 느끼셨습니다. 더 이상 그들과 함께 있음이 예수님에게나 무리들에게 결코 유익하지 않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훌쩍 떠나셨습니다.

교회에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이 항상 좋은 일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지교회 구성원들의 다수가 바르지 못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교회의 원래의 목적이 왜곡되고 사명의 본질이 흐려진다면, 교회는 교회다움을 잃어버리고 사회복지 기관이나 광신적인 집단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친밀하게 함께 하시는 것은 교회를 위해 전혀 유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곳도 미련 없이 떠나실 것입니다.

교회의 지체인 한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생각과 삶 전부가 항상 하나님께 대하여 바르기란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목적 중 어느 정도는 자기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할 때도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지 못하고 자기 영광도 구합니다. 인간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자기유익과 자기 영광이 그의 생각과 삶을 에워싸기 시작한다면 위기입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이루시려는 목적과 사명을 상실하고,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잃어버린 괴상한 존재로 변해갈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그의 바라는 바가 이루어진다면 오히려 그에게 해가 됩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그를 속히 떠나시고 그 기도에 응답치 않으시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 생각됩니다. 우리의 삶이 완전치는 못할지라도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목적과 사명이 왜곡되지 않도록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의하며 살아 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실 때 한 서기관이 나아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19) 21절에 “제자 중에 또 하나”라는 말씀을 보면, 이 서기관도 제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떠날 때 붙잡는 사람도 없고 함께 가겠다는 사람도 없다면 참 거시기(?) 할 텐데, 그는 스승에게 사랑스러운 제자로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20)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볼 때, 서기관은 예수님의 삶을 상당히 낭만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산상보훈의 말씀은 너무나 고상하고 아름답고 이상적이었습니다. 그 분의 탁월한 능력은 많은 사람들에게 언제나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만 허락하시면 ‘예사모’(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팬클럽을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삶은 보금자리조차 없는, 남모르는 희생과 아픔이 있는 삶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을 따르는 삶 역시 그러한 희생과 아픔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따를 수 없는 길임을 간접적으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제자의 삶은 편안한 소파에 앉아서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여유 있게 클레식을 감상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 동안 초대형 평면 TV를 통해 재미있고 스릴 있게 구경하던 사람이 실제로 살벌한 경기장이 뛰어든 것과 같습니다. 서기관이라면 사회적으로 상당한 명성과 안정된 직장을 가진 사람인데, 예수님을 따르면 그 동안 자기를 인정해주고 보호해주던 안식처와 보금자리를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면, 그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예수 잔당으로 취급되어 목숨의 위협까지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의 삶은 ‘어디로 가시든지 좇으리이다’고 감히 성급하게 장담하기 어려운 삶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런 소리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사실 최고의 고상함과 최고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고상함 뒤에는 남모르는 희생과 아픔이 있습니다. 백조가 고상하게 물 위에 떠 있지만, 물속에 있는 발은 쉴 새 없이 물길 질을 한다더군요. 고상한 클레식 연주 뒤에는 피나는 연습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고 이 고상함을 얻기 위해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빌 3:8). 그래서 제자의 삶은 단호한 자기결심과 자기 노력만으로 따를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의지할 것들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만 따를 수 있는 삶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사모합니다. 그러나 그가 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잃어버리려 성도는 많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는 태도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것을 얻고 보물같이 쌓아두려는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이것도 잃어버리고, 필요하시다면 저것도 배설물로 여기겠다는 자세보다는, ‘주님!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십시오’ 합니다. 화끈하게 주님을 따르겠으니, 굴도 주시고 이왕이면 여우까지 달라는 것입니다. 주를 위한 ‘헌신’을 헌신해버리고 ‘희생’을 희생해버립니다. 헌신보다 새신이 낫고 구원보다는 십원이 낫다는 세상 사람들의 농담이 성도들의 삶의 현실이 되고 있음은 참 서글픈 일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성도들마다 헌신과 희생 속에서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자 중에 또 하나가 말했습니다.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21) 지금 장례를 치러야 할 상황인지, 부친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어쨌든 그는 자식 된 도리를 다 하고자 하는 효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충격적입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22)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육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게 하고 제자인 너는 나를 좇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너무 단호해서 당황스럽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10:37)라는 말씀과 느낌이 비슷합니다.

서기관이 ‘성급함’ 때문에 제자다운 자세를 잘 나타내지 못했던 것처럼, 이 사람은 ‘망설임’의 문제로 제자답지 못했습니다. ‘자식 된 도리’라는 것이 그로 주님을 좇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오늘날 제자의 삶에서도 ‘자식 된 도리’, ‘부모 된 도리’, ‘친구로서의 의리’가 주님을 좇는 것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척이나 친구 결혼식이 주일과 겹쳐질 때, 혹은 회식 자리에서 한잔만 하라고 간곡히 권할 때 갈등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조상 제사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네 문화 속에서는 제사 때문에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명절만 되면 많은 성도들이 제사 때문에 초긴장을 합니다.

사실 주일 예배에 한 번 빠졌다고 해서 주님을 제대로 좇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성실하게 예수님을 따르지만 현대 사회 구조상 어쩔 수 없이 주일에 근무를 써야 하는 사람도 있고, 주일에 시험을 쳐야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주일에 빠지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은 제자로서 합당한 자세가 아닙니다.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은, 주일 예배가 결혼식에 빠질 만큼 혹은 제사를 거부할 만큼의 가치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의 삶으로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도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섬기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광고하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에 필요하지만 그래도 친구가 더 중요하고, 가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입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친척과 친구와 자식을 위해 혹은 회사를 위해 주일 예배에 빠지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는 그 영혼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통로를 막는 것과 같습니다. 믿는 사람조차 애써 지키려 하지 않는 그 하찮은 것을 무엇 때문에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를 위한다고 했던 일이 실제로는 그 영혼을 죽이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가족도 소중하고 친구도 소중합니다. 부모도 소중하고 자식도 소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예수님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우리의 고백이 단지 말로서만이 아니라 삶으로서 나타나야 합니다. 이런 저런 상황과 조건들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단호하게 주님을 좇을 때, 그들에게 지울 수 없는 강한 인상을 남기고 우리의 믿는바 신앙의 가치를 궁금해 하며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 합당치 않은 자세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두신 목적과 사명에 맞게 살아가는지, 참으로 헌신과 희생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지, 참으로 주님을 최우선의 가치로 생각하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제자로서 합당한 생각과 행동이 우리의 삶에 현저하게 나타나게 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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