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치유의 말씀 시리즈설교 2] 깨끗하게 되었더라 (왕하 5:1~14)

  • 잡초 잡초
  • 494
  • 0

첨부 1


나아만을 택하심

요즈음 우리나라보다 이웃나라 일본에서 한류열풍을 타고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배우들이 있습니다. ‘욘사마’ 배용준이나 ‘지우히메’ 최지우가 대표적인 경우지요. 특히 크리스천인 최지우는 고이즈미 일본총리가 공식석상에서 꼭 한번 만나봤으면 좋겠다고 할 만큼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는데 이 배우가 최근 어떤 방송 인터뷰에서 자신이 방송국 공채 23기로 최연소 합격한 후 2년 간 쓰라린 무명시절을 겪을 때 이야기를 털어 놓았습니다. 그 때 그녀가 맡은 배역은 거의 회사 사장비서나 행인1이었고 그가 했던 첫 번째 대사는 ‘차 드세요!'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소위 뜬다고 하는 인기 있는 영화배우, 탤런트들을 보면 한 결 같이 춥고 배고픈 무명 시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런 무명의 조연이나 엑스트라가 없으면 결코 영화나 드라마는 만들어 질 수 없습니다. 조연이라고, 엑스트라라고 자신이 맡은 역할에 소홀하고 대충대충 연기한다면 완성도 높은 작품은 결코 나올 수 없을뿐더러 그런 사람 자신에게는 미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한편의 드라마같이 치밀하게 각본을 짜고 그 드라마를 함께 만들어갈 주연과 조연, 엑스트라 급의 배우들을 찾습니다. 문제는 주연급의 탁월한 연기도 중요하지만 조연과 엑스트라들이 정말 헌신적으로 혼신을 다해 자기 역할을 감당해 주지 않으면 이 구원 드라마는 완성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사건도 하나님께서 나아만이라는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만드신 한 편의 위대한 구원 드라마입니다. 그러면 이 위대한 드라마를 위해 어떤 사람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함께 살펴보기로 할까요?

우선 이 드라마에는 주인공인 나아만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1절에 보면 그는 아람 왕의 군대장관, 즉 국방부 장관이라고 했는데 그의 지위가 높을 뿐 아니라 비중이 아주 높은 중요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 1절에만도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라는 두 가지가 나옵니다. 이렇게 나아만이 크고 존귀한 자였던 까닭은 그가 전에 아람 나라 전체를 구원한 적이 있는 국가적인 전쟁영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상하게도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표현합니다. 나아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아닌데 말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심오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도 안 믿는 나아만이 조국을 구하도록 하나님이 도우셨는가? 이 말은 하나님이 앞날에 나아만을 구원하기 위해 이미 계획을 세우고 진행 중에 계셨음을 말해줍니다. 지금도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영향력 있는 한 사람을 구원하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영향력을 미쳐 큰일을 하게 하시려고 치밀한 구원계획을 짜시곤 합니다. 불후의 명작 ‘벤허’(Ben-Hur)라는 영화를 거의 다 보셨을 것입니다. 벤허는 본디 루 월리스(Lew Wallace) 장군이라는 사람이 쓴 소설이 원작인데 이 월리스 장군은 남북전쟁의 전쟁영웅이요 정치가며 작가였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인간이 만든 종교인지를 밝혀내기 위해 유럽의 도서관을 2년 동안 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하여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허위라는 내용으로 1장을 다 기록하고 2장을 기록하다가 놀랍게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당신은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가 쓴 소설 벤허는 “수백만이 발을 구르며 열광하고 수천만이 무릎 꿇어 기도하게” 만들었다는 평까지 듣는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소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의 불신자를 변화시켜 그를 통해 수많은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치밀한 과정을 연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월리스 장군처럼 나아만이라는 한 영향력 있는 아람의 군인을 통해 큰일을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그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이미 그에게 은혜와 도우심을 베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존귀한 자에게도 큰 핸디캡이 하나 있었습니다. 1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나아만은 큰 용사였으나 문둥병자였다고 합니다. 문둥병은 나병 혹은 한센병이라고도 하는 너무도 끔찍하고 저주스러운 병입니다. 이 병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특별히 보기 흉하게 얼굴과 사지가 어그러지고 손과 발에 감각이 없어지는 전염병이기 때문에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격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 병을 하늘의 벌을 받았다는 뜻으로 ‘천형병’(天刑病)이라고 부르고 그 환자를 ‘문둥이’라는 속어로 부르면서 멸시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위대한 전쟁영웅이며 나라를 귀한 존귀한 사람이면 뭐 하겠습니까? 아무리 높은 지체와 많은 재산을 가지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늘로부터 받은 형벌로 여겨진 문둥병에 걸려 고통 받은 나아만은 그 병이 낫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다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나아만의 고통과 상처를 통해 그를 구원하실 기회를 찾으셨습니다. 만일 그에게 이런 핸디캡이 없었다면 나아만은 결코 이스라엘을 방문하지도, 또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아쉬울 것이 없는데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문둥병이라는 나아만의 결정적인 약점과 고통을 통해 그에게 접근하고 그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나아만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은 두 가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 뭔가 어려운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도와 문제를 해결해 줌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는 방법이 있고, 둘째, 하나도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일 경우는 도리어 어떤 어려운 문제가 생기게 해서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도록 만들어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둘 다 하나님이 즐겨 쓰시는 방법이고 때로는 나아만처럼 한 사람에게 두 가지 방법을 동시에 쓰시기도 합니다. 여러분 중에 모태신앙이 아닌 성인이 되어 예수님을 믿은 분들이 계신다면 아마 두 가지 방법 중 하나, 혹은 두 가지 방법이 동시에 사용되어 예수 믿게 되셨을 것입니다. 어떤 계기인지 궁금합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 사람을 구원하고자 선택하고 그를 인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나아만이라는 사람을 구원하기로 마음먹고 그를 때로는 형통한 길로, 때로는 고통의 길로 인도하심으로 결국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도록 만드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과 저도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있는 복 받은 사람들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한 번 우리를 택하고 구원하려고 마음먹으시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계획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조력자들

그런데 이렇게 나아만을 치유하고 구원하고자 하나님이 계획을 세워 추진하시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개입되어 그 과정을 돕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선지자 엘리사입니다. 주연이요 주인공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늘 이 치유사건의 주역인 엘리사보다 오히려 그 뒤에 가려져 있는 조역들을 더 주의 깊게 살펴보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2절부터 나오는 이스라엘 출신 계집종과, 나아만을 기꺼이 이스라엘로 보내준 아람 왕과, 13절에 기회를 포기하고 돌아가려는 나아만을 설득해 요단 강물에 들어가게 한 종입니다.

이 가운데 나아만의 부인을 수종을 들었던 계집종은 본문 2절에 보면 예전에 아람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쳐들어갔을 때 붙잡아 온 전쟁포로라고 나와 있는데, 그렇다면 얼마든지 종노릇을 하면서도 마음속에 주인에 대한 원망과 증오심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계집종은 진심으로 자기 주인이 문둥병에 걸린 것을 안타까워해서 주인에게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 엘리사를 만나면 반드시 치유해 줄 것이라고 제안을 하게 됩니다. 혹시 주인이 엘리사를 만났다가 치유 받지 못한다면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데도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그 마음속에 분명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치유하고 구원 받게 하기 위해서는 그 한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필요할 뿐, 모든 인간적이고 사적인 감정이나 불안한 마음, 불신앙은 다 사라져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또한 4절부터 보면 부하 나아만의 이야기를 들은 아람 왕은 기꺼이 그를 이스라엘로 보내주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글까지 써주는 정성을 보입니다. 사랑하는 부하가 낫기를 바라는 이 아람 왕의 지극한 마음은 국경을 넘어, 민족적인 감정을 넘어 마침내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 정성과 배려하는 마음은 이렇게 모든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런데 불신자인 이 아람 왕의 모습은 오히려 하나님을 믿었던 이스라엘 왕의 모습과 대조됩니다. 이스라엘 왕은 아람 왕의 편지를 받고 자기 옷을 찢으며 괴로워합니다. 그 까닭은 “어떻게 나보고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일을 하라는 것이냐? 나보고 문둥병을 고쳐달라는 것은 틀림없이 이 일을 핑계로 나에게 시비를 걸려는 것이다”는 의심 때문이었습니다. 아람 왕은 진심으로 글을 썼는데 이스라엘 왕은 그것을 믿지 못합니다. 그는 “당신은 고쳐주소서”(6절)라는 말 때문에 엄청난 부담감을 느껴서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라며 히스테리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만약 이스라엘 왕에게 진정한 신앙이 있었다면 “아람 왕은 나에게 고쳐달라고 하지만 이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라고 말했을 텐데 진짜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절망한 것입니다. 오히려 잘은 모르지만 틀림없이 이스라엘에 가면 고침 받을 것이라는 불신자 아람 왕의 생각보다 이 신자인 이스라엘 왕이 더 믿음이 없고 불신앙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나아만과 함께 동행했던 종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하마터면 나아만은 인생에 단 한 번 찾아온 치유와 구원의 기회를 놓칠 뻔 했습니다. 10절에 보면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에게 사자를 보내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면 나을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분노하며 아람으로 돌아갑니다. 그 까닭이 11절과 12절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라는 말에 나옵니다. 이 말 속에는 세 가지의 이유가 들어 있는데 첫째, 체면 문제입니다. ‘저가 내게로 나아와’ 즉 “왜 선지자가 직접 와서 안 고치고 사자를 대신 보내느냐? 나 같은 고위관리가, 더군다나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 의복 열 벌이라는 큰 예물까지 가지고 온 사람에게 예의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그 체면 때문에 직접 엘리사 집에 들어가지 않고 말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엘리사 집 문 앞에 서서(9절) “네가 직접 나와라”는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둘째, 치료 방법에 대한 불만입니다. “내 생각에는 선지자가 직접 와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상처 위에 손을 흔들어 치료하는 것이 맞는데 왜 그렇게 안 하느냐?”는 것이지요. 셋째는 자신의 선입견과 경험에 의한 불만입니다. “왜 하필이면 요단강이냐? 차라리 내 고향 아람에 있는 강들이 훨씬 더 깨끗한데 하필 더러운 요단강에 들어가 몸을 씻으라는 것은 또 무슨 말이냐?”는 것이지요. 이 세 가지 이유 속에는 우리가 치유 받고 구원 받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치유 받고 구원 받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바로 나아만의 경우처럼 인간적인 체면과 교만과 자기주장과 고집입니다. 나아만이 엘리사가 자기 체면을 안 세워 준 것에 화내고 자기 생각(경험)대로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해서 하마터면 그냥 돌아갈 번 한 것처럼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체면 세우고, 고집 세우고, 자기주장 앞세우고, 자기 경험을 내세우다가 기회를 놓칩니다. 은혜를 못 받고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지식과 이성과 경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방법을 인정하지 않고, 때로는 하나님이 얼마든지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해,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그것이 비이성적인 미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믿지 못하면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나아만에게 말한 치유방법은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단강물 자체가 무슨 신비로운 치유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단강에 일곱 번 씻으라는 것은 순종을 요구한 것입니다. 아무리 비이성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더러운 요단강물이라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일곱 번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그러므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것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는 명령인데 나아만이 불순종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나마 나아만이 나을 수 있었던 것은 끝까지 자기 고집만 주장하지 않고 13절 내용처럼 종들의 충고에 ‘마지막 딱 한 번 만’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종들은 주인에게 진심으로 충고합니다. “만일 선지자가 엄청나게 큰일, 어려운 일을 하라고 해도 주인님은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까짓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씻는 일 정도야 못 할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러지 마시고 한 번만 해보세요.”라고 말한 것이지요. 그런데 나아만은 얼마든지 이 천한 종들의 말을 무시하고 끝까지 고집 부려 그냥 돌아갈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종들의 말을 따릅니다. 그랬더니 그 살이 회복되어 어린아이 살 같이 깨끗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나아만은 그 치유의 역사를 통해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참 신이 없는 줄 아나이다”라며 하나님을 믿는 구원의 역사까지 일어나게 됩니다. 순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 고집, 내 주장 한 번만 꺾으면 될 것을... 기회는 그리 자주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떨 때는 딱 한 번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귀한 기회를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 고집으로, 불순종으로 놓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 치유사건을 도운 세 부류의 사람들은 모두 성경에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에 여기만 나오고 다시는 나오지 않는 스쳐 지나가는 조연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나아만 장군이 치유 받고 하나님을 믿게 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야말로 한 사람의 치유와 구원을 위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중풍병자 치유사건이 나오는데 이 사건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은 바로 그 중풍병자를 메어 주님께 데려왔다가 사람들이 많아 접근할 수 없자 지붕을 뜯어 달아 내린 네 사람입니다. 이들이 중풍병자의 친구인지, 아니면 종인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이름도 없는 이 네 사람의 정성과 노력으로 인해 주님이 그 중풍병자를 치유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분명 예수께서 ‘저희(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다고 나옵니다. 또한 병만 치유해 주신 것이 아니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해 주십니다. 저는 이 사건이 나아만의 치유사건과 너무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환자 옆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도운 사람들로 인해 환자가 치유 받은 것이 비슷하고, 또 병만 나은 것이 아니라 그 환자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점에서 더욱 비슷합니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의 병이 나음 받는 데에는 많은 사람의 도움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를 낫게 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 안 내세우고, 이름 없이 헌신할 때, 그리고 간절히 중보기도 할 때 하나님은 그 환자를 불쌍히 여겨 낫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치유를 통해 구원의 역사까지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환자의 육신적 치유를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지극 정성으로 그 영혼의 치유와 구원을 위해 애쓰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람이 병을 치유 받거나 구원 받았을 때 결코 우리의 이름이나 영광이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 이름 안 나오면 어때? 생명만 구하면 됐지.... 하나님이 아시잖아?”라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아주 중요한 원칙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씻으라

오늘 우리는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음으로 문둥병이 낫고 구원 받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4:27에 보면 예수님이 이 사건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예수님이 나아만에 대해 말씀하신 까닭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에 가서 말씀을 전하는데 그 말씀을 들은 고향 사람들은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기 동네에서 목수 노릇을 하던 요셉의 아들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향 사람들은 “천한 목수 요셉의 아들이 무슨...” 하는 선입견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그 분의 말씀을 인정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고향 사람들의 선입견과 고집을 한탄하면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 받는 자가 없다”(눅 4:24)는 말씀을 하는 과정에 나아만을 인용한 것입니다. 즉 나아만 시대에도 수많은 문둥병 환자가 있었지만 나음을 받은 것은 오직 이방인인 아람 사람 나아만 한 사람뿐이었다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자기 고집과 선입견을 꺾고 기꺼이 요단강물에 들어감으로 나음을 얻었는데 오늘날 고향 나사렛의 유대인들이 고집과 자기주장과 선입견에 빠져 구원 받지 못하는 모습이 마치 그 때와 같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모든 고집이나 선입견이나 자기주장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나음 받고 회복되는 방법은 오직 요단강물에 들어가 씻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길은 오직 그 물에 들어가 일곱 번 씻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 요단강물에 씻는 것은 오늘날 세례 받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죄 씻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치유 받고 구원 받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씻음 받고 물과 성령으로 세례 받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치유 받고 구원 받기 위해 방해가 되는 그 어떤 것도 다 제거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이루어지기까지 우리 주변 사람들을 향해 끝없는 사랑과 배려로, 정정과 인내로 투자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름도 빛도 없이 그들을 치유와 구원의 길로 인도할 때 다른 사람들은 다 몰라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러기에 나중에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영광과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하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