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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원의 가치 (레 27:2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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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레위기 27장은 서원에 관한 규례입니다. 서원은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께 무엇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27장의 내용은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나중에 지키지 아니하고 무르려고 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 서원의 무름에 관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다 지킨다고 한다면 레위기 27장은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께 서원하고도 지키지 아니하는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27장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 만사를 행할 때에 가정이든지 사업이든지 신앙생활이든지 나도 죄인이고 너도 죄인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상적인 인간을 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도 이상적인 인간이 아니고 남도 이상적인 인간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든, 가정사든 사업이든 남도 죄인이고 나도 죄인이라는 것을 고려하고 행동해야 실수가 없을 것입니다.

남들도 성자이고 나도 성자라고 생각하고 하면 그 일은 반드시 무엇인가 차질이 있을 것이고 실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우리가 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원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아주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이 서원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알 필요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 건축헌금 1억을 작정했는데 그만 IMF도 오고 가정이 어려워져서 지금 그것을 드릴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는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교회를 옮겨 버리시겠습니까? 옮기면 간단할 것 같습니다만,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약속이기 때문에 교회를 옮긴다고 해서 양심의 가책에서까지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원에 관한 것이 때로는 우리의 삶 가운데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자들이 많이 인용하는 예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농부가 소 두 마리
가 있는데 그 중에 한 마리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했습니다. 그런데 그 두 마리 중 하나가 길을 가다가 구덩이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농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죽은 것은 하나님 것이고 산 것이 내 것입니다.”

레위기의 내용은 다섯 제사와 일곱 절기입니다. 다섯 제사는 번제와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일곱 절기는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장막절입니다. 이렇게 레위기는 다섯 제사와 일곱 절기에 관한 규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구약 예배의 교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레위기의 마지막 27장이 서원에 관한 규례로 끝나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서원은 예배의 가장 고급스러운 형태로 인정을 해야 하고 하나님께 서원하는 것을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 서원(Vow)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상대로 해서 인간이 약속하는 것이 서원입니다. 사람끼리 약속하는 것을 서원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만이 서원입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 국가에 대한 맹세와 같은 것은 서원이 아닙니다. 서원의 대상은 언제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약속할 때 그것을 서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상대로 서원을 하는 경우는 대체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생의 큰 위기를 겪을 때 “하나님, 이번 위기에서 건져 주시면 내가 이런 일을 하겠습니다.” 이것은 ‘위기서원(Vow of crisis)’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의 집 밧단 아람으로 피신을 갈 때에 벧엘이라는 곳에서 하루 밤을 머물게 되었습니다. 돌베게를 하고 잠을 자는데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내려오고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거기서 야곱이 서원을 합니다. “하나님, 나를 지켜 주시고 내 이 여행에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고 나로 하여금 평안히 아버지 집에 돌아오게 하시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고 내가 기둥으로 세우는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고 내가 하나님이 주시는 수입 가운데 십분의 일은 반드시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위기 가운데 드린 서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사사기 11장을 보게 되면 사사 입다라고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사 입다의 시대에 암몬사람이 쳐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혔습니다. 그러자 입다가 서원을 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저 암몬과 전투를 하는데 이번 전투에서 이기게 해 주시면 내가 돌아갈 때에 우리 집에서 맨 먼저 나와서 나를 반기는 사람을 여호와께 번제로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서원을 했는데 돌아가 보니까 자기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맨 먼저 반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입다는 자기의 무남독녀 외딸을 시집도 보내지 못하고 여호와께 바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위기서원입니다. 입다의 서원은 경솔한 서원이었습니다. 나중에 후회했지만 이미 늦어버린 서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위기시에 서원을 하고 후회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인생의 위기시에 서원을 하는 것은 좋습니다만, 경솔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은혜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해서 드리는 서원이 있습니다. 그것을 ‘감사서원(Vow of gratitude)’이라고 합니다. 사무엘상 1장에 보면 한나는 “하나님 내게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아들을 바치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를 듣고 하나님이 한나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그 뜻은 “하나님이 들으셨다.”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낳은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를 평생에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머리에 대지 않겠다고 서원을 해서 드린 그 사람이 바로 사무엘 선지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어려울 때나 감사
할 때 하나님께 서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서원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서원의 내용은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한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드리든지 아니면 짐승을 드리든지 집을 드리든지 밭을 드리든지 그것이 서원입니다. 네 가지 중에 하나를 드리겠다는 것이 서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드리는 것은 서원이 아닙니다. 의무적으로 드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드릴 때에 그것이 서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원에서는 자발성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강요된 것은 서원이 아닙니다. 할 수 없어 협박 받아서 하는 것은 서원이 될 수 없습니다.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만이 서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원은 갚아야 합니까? 여러분 중에 서원하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들을 주의 종으로 드리겠습니다.” 내가 이번 건축에 얼마를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서원하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서원은 갚아야 합니까? 예, 꼭 갚아야 합니다. 신명기 23장 21-23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네가 서원치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니라 마는 네 입에서 낸 것을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대로 행할찌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전도서 5장 4-5절에도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서원한 것은 갚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서원하고도 갚을 필요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원장은 오늘 본문인 레위기 27장에도 있지만 민수기 30장에도 있습니다. 시집 안간 여자가 서원합니다. “하나님, 우리 집에 소가 여섯 마리 있는데 한 마리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듣고서 그날에 “야! 그것이 네 것이냐? 내 것인데 왜 네가 맘대로 드리느냐? 안된다!” 이러면 시집안 간 딸의 서원은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또 결혼한 여자가 서원을 합니다. “하나님, 우리 집에 양 다섯 마리가 있는데 한 마리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그날 듣고서 듣는 그날에 “안 된다!” 이렇게 말하면 그 여자의 서원은 무효가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든, 남편이든간에 그 서원을 듣고서 그날 무효로 해야지 한 열흘쯤 있다가 “생각해보니 그건 안 되겠다.” 이렇게 말하면 그 서원은 유효가 되는 것입니다. 듣는 날에 취소를 해야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역사에 보면 이 서원 문제로 충돌한 경우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16세기 입니다. 종교개혁은 1519년에 마르틴 루터가 95개 조항을 비텐부르크 성당에 걸어 놓으면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16세기에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서원에 관한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이 되었습니다. 루터같은 개신교 지도자들은 대부분 카톨릭 신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신부들은 반드시 서원을 해야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독신서원(Vow of celibacy)입니다. 그런데 독신서원을 한 마르틴 루터가 개신교 지도가자 되어서 결혼을 안했을까요? 아닙니다. 수녀와 결혼을 했습니다. 루터가 결혼을 하니까 카톨릭에서는 “독신서원을 하고도 지키지 않았으니 옳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루터는 “그 독신서원은 성경에 없는 것이고 성경이 명하지 않는 불법한 서원이기 때문에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목사도 장가들 권리가 있고 신부들도 장가가라고 권면합니다. 독신은 은사입니다. 혼자 살아도 외롭지 않고 혼자 살아도 밥 잘 먹는 사람만 독신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고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신서원은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것이 개신교의 입장입니다. 그리고 루터 이후에 일어난 급진종교개혁자들 소위 아나뱁티스트(anabaptist)들은 서원은 절대 안 된다고 했습니다. 맹세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서원이나 맹세를 절대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원한 것을 지키라 그 대신에 서원을 대단히 신중하게 하라는 입장입니다. 예수님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맹세가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인줄 아십니까? 과거의 일은 맹세가 통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남편이 바람을 피웠는가 피우지 않았는가를 놓고 부부싸움을 한다고 합시다. 바람피운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남편이 “나 바람피우지 않았다.”고 해도 여자가 믿지 않는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경우에는 맹세가 최후 확정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께 맹세하는데 바람피우지 않았다.” 이러면 여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자는 믿어 줘야 하는 것입니다. 지나간 일에 대한 최후 확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맹세하고 바람피우지 않았다고 하는데도 계속 의심하는 것은 의부증이 되는 것입니다. 맹세나 서원이 전혀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부부싸움 하다가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것은 맹세로 확정지으시기를 바랍니다. 필요한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뱁티스트들은 그런 문제에 너무 극단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2. 레위기 27장의 구조

그런데 오늘 본문 레위기 27장은 합당한 서원을 한 사람이 나중에 서원을 무르고 싶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레위기 27장의 구조는 간단합니다. 서원의 네 가지 구조에 따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2-8절까지는 사람의 서원에 관한 경우입니다. “하나님, 내가 여호와께 나 자신을 드리고 내 가정을 드리겠습니다. 여호와께 자기 자신을 드리겠습니다.”라고 서원해놓고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서 서원한 것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면 벌금을 내라는 것입니다. 벌금은 성별에 따라 다르고 나이에 따라 다릅니다. 남자 어른은 50세겔, 여자 어른은 30세겔, 남자 아이는 5세겔입니다. 한 세겔이 은 11g인데 이것은 노동자 4일 임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50세겔이면 노동자의 200일 임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서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율법은 무자비하지 않습니다. 서원한 사람이 만약에 그것을 감당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7장 8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너의 정가를 감당치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의 앞으로 데려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세대로 값을 정할찌니라.” 이것은 서원했는데 돈이 없다면 디스카운트를 해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디스카운트를 해주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시험을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들을 주의 종으로 드리겠다고 했는데 그 아들이 주의 종이 되지 않고 엉뚱한 삶을 산다면 부모는 어떻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예를 들면 1억 감사헌금을 작정을 했는데 형편이 바뀌어서 헌금을 할 수 없게 되었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오늘 레위기의 원리에 따르자면 목사를 찾아가서 상의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내가 서원한 것이 있는데 도저히 형편이 안 되서 못하겠습니다. 깎아 주십시오.”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것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9-13절은 동물을 하나님께 서원한 경우입니다. 서원해서 드린 것은 정한 짐승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이 그것을 팔아서 성소의 일이나 제사장 집안의 일에 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단 서원해서 바친 짐승은 거룩한 짐승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께 짐승을 바치기로 서원을 했는데 그 짐승과 너무 정이 들어서 그 짐승을 바칠 수가 없겠다고 하면 그 짐승 값에다가 오분의 일의 범칙금을 더해서 제사장에게 주면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못된 사람이 못된 성품을 발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린 송아지였을 때에 하나님께 서원한 짐승이 너무 잘 먹고 잘 커서 살쪄서 우량한 소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마음이 바뀌어서 “하나님 이것은 내 것으로 하고 2년 길러서 제일 빈약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우열을 바꾸는 경우에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7장 9-10절을 읽겠습니다. “사람이 예물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 생축이면 서원물로 여호와께 드릴 때는 다 거룩하니 그것을 변개하여 우열간 바꾸지 못할 것이요 혹 생축으로 생축을 바꾸면 둘 다 거룩할 것이며” 바꾸면 둘 다 거룩할 것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둘 다 하나님의 것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서원한 짐승에다가 나중에 바꾸려고 했던 열등한 짐승까지 다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꼼수를 쓰면 안 되겠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계산이 정확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4-25절은 “집이나 밭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한 경우입니다. 집이나 밭은 50년 희년이 되면 원 소유주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쳤는데 다시 무르고 싶을 경우에는 희년까지 남은 기간을 계산해서 그 가격에다 오분의 일의 벌금을 더해서 돈으로 드리면 그 땅이나 집은 다시 무를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6-33절까지는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해서 드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서원으로 바칠 수 없는 세 가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첫 새끼입니다. 사람의 장자, 혹은 짐승의 첫 새끼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께 서원해서 바칠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것을 어떻게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들은 하나님이 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셨으면 애굽에서 다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장자를 소유하시는 것이 부당합니까? 아닙니다. 장자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를 취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 대신에 레위인을 취하셨습니다. 레위인을 취하고 장자 취할 것을 대신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산이 얼마나 정확하십니까? 레위인의 숫자와 이스라엘 장자의 숫자를 계산해서 장자의 숫자가 더 많다면 그 많은 수 만큼 속전을 받으십니다.

민수기 3장 46-47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 칠십 삼인이 더한즉 속하기 위하여 매명에 오 세겔씩 취하되 성소의 세겔대로 취하라 한 세겔은 이십 게라니라” 계수를 해보니까 이스라엘의 장자가 더 많다면 그 만큼은 여호와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장자로 취하였기 때문에 오세겔씩 속전을 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정확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첫 생명, 장자나 첫 새끼는 여호와께 드릴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서원으로 드릴 수 없는 것은 27장 28-29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주 바친 물건, 아주 바친 사람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예를 들면 여리고성 물건이나 여리고성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쳐들어갈 때에 하나님이 여리고 성안에 있는 모든 물건이나 사람은 기생 라합과 그 가족을 제외하고는 여호와께 바쳐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모두를 다 죽이고 그 안에 있는 물건은 하나도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바쳐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저주하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누가 취했습니까? 아간이 그것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가족과 함께 아골 골짜기의 돌무더기에 묻혔습니다. 아주 바친 물건이나 아주 바친 사람은 서원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세 번째로 십일조는 서원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이미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짐승 열 마리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것을 구별하는 방법은 막대를 놓고서 짐승이 자유스럽게 지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열 번째 지나가는 것이 하나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조작을 해서 짐승을 줄을 억지로 세워서 열 번째 제일 열등한 것을 지나가게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속고 계시겠습니까? 아닙니다. 32절을 보겠습니다. “소나 양의 십분의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그 우열을 교계하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속하지 못하리라.” 열 번째 지나가는 것을 보니까 “아이고 왜 저렇게 튼실한 것이 지나가는 거야?” 이러면서 그것을 빼고 빈약한 것을 집어넣어서 순서를 바꾸면 하나님이 그 둘 다 취하신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27장의 주제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꼼수를 쓰지 말라는 것이 주제인 것입니다. 십일조는 레위인이 받는 것이고 레위인은 제사장, 레위 지파중에 아론의 후손에게 십일조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결론

왜 예배의 책인 레위기가 서원장으로 끝나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서원도 예배의 고급스러운 형태의 예배로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서원할 수 있습니다. 서원은 고급스러운 예배입니다. 고차원적인 예배의 형태입니다. 왜냐하면 서원은 아주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으시면 갚으시고 정 못 갚는 경우에는 목회자와 의논하여 서원에 대한 마음의 부담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나중에 사람은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신중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서원한 것을 잊어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영원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셔서 영원 후까지 무궁토록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 앞에 오늘 우리는 정직하게 살아가야 하는 의무를 갖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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