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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파하는 마음 (느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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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신학자 중에 Abraham J Heshel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가 “예언자들(The prophet)”이란 책을 펴냈습니다. 역사에 남는 유명한 책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구약에 나오는 예언자들이란 한마디로 ‘아파하는 마음을 가졌던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쓰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느헤미야도 바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느혜미야에 관한 이야기는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의 재위 20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유대인들은 비록 페르시아에서 여전히 포로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제법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전쟁 포로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이주자로 여겼습니다. 자녀들은 페르시아 왕국에서 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신분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느혜미야가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페르시아 왕국의 술 관원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아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예루살렘에서 끔찍한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의 형편을 살피러 갔다 온 느혜미야의 형제와 몇몇 사람들이 돌아와 전한 소식은 그의 마음을 찢어 놓았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이 환란을 만나고 능욕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성문들은 불타버렸다는 것입니다. 느혜미야 자신은 축복된 삶을 누리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도성은 폐허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소식을 듣는 순간 그만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수일동안 슬퍼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느혜미야서의 기록을 읽어가다 보면 그가 무려 4개월 동안이나 슬퍼하며 기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느혜미야의 아파하는 마음은 금방 달궈졌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철판과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그 일을 마음에 두고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애달파하며 마지막으로 금식기도를 드린 적이 언제였나요? 곤경에 처한 사람들의 소식을 듣고 마지막으로 슬퍼했던 때가 언제였는가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묻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는 뜻에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대개 나쁜 소식을 듣는 순간 신속히 두 귀를 막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무엇인가 희생을 해야 한다 싶으면 변명을 내세워 회피해 버리거나 거절해 버립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에 연루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아파하는 마음을 갖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느혜미야는 멀리서 전해 온 소식에도 애타하는 마음으로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크게 대조됩니다. 그가 아파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삶을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을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신학자 기다모리 가죠는 그의 책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에서 하나님은 아파하는 마음을 가지신 분으로 정의를 내렸습니다.

느혜미야는 지금 수산궁에서 왕의 술 맡은 관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으로서 미국 백악관에서 대통령을 위하여 중요한 위치에서 일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느혜미야를 그렇게 비유를 해 봅니다.  당시 술 관원은 외국인으로서는 대단한 자리입니다. 당시에는 음식에 독을 넣어 왕을 독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경우가 많아 궁중에서 은수저를 사용한 것은 음식에 독이 들어있는 것을 테스트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이덕일 저 “조선 왕 독살사건”이라는 책을 보면 고종황제를 포함해서 8명의 왕이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왕의 음식을 관리해주고 고문 역할을 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술 관원은 대개 왕의 가장 큰 신임을 받았습니다. 느혜미야는 왕의 두터운 신임 아래 호의호식하며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셈입니다. 사실 예루살렘의 문제에 대해 눈을 감아버리면 그만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그렇게 살았다면 그의 이름이 성경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문제를 마치 자신의 문제인양 아파했습니다. 그리고 결단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건축에 참여한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교훈은 한 사람의 개인이 아파하는 마음을 갖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그런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서 9장에 기록되어 있는 사도 바울의 말에 우리는 숙연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롬 9:3).” 바울은 설사 자기가 구원을 잃게 되더라도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주님을 알게 된다면 기꺼이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우리 중에 과연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안중근 의사는 나라를 독립시키는 것이 최고의 애국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항일운동을 했습니다. 그가 한참 항일 운동을 벌이고 있었을 때에 7년 만에 모처럼 자기 집 앞을 지난 적이 있었으나 그는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무심히 지나쳤다고 합니다. 적어도 그런 열정이 있어야 애국자의 반열에 들어갑니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원래 한국에 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인도에 가려고 생각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에 선교의 문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접하지 못한 한국인에 대하여 아픈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선교사로 갈려고 마음을 바꾸었는데 불행하게도 선교부에 알아보았더니 한국에는 선교비가 없어서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뉴욕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그를 담임목사로 청빙한다는 제안을 받고 수락하는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으려고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하려고?”하는 성령의 음성이 마음에 들리더랍니다. 그래서 그 편지를 부치지 않고 선교부에 직접 가보았더니 마침 뉴욕 브르크린에 있는 어느 교회의 여선교회에서 한국 선교비를 보내왔다는 것입니다. 제가 15년 전에 바로 그 교회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연결이 되어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 오게 된 것입니다.  한국 백성에 대한 아픈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성령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아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됩니다.

아파하는 마음을 갖는다고 해서  여러분이 모두 선교사가 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 작은 일이라도 아픈 마음을 가지고 살면 됩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는 먼 곳에 차를 주차시키고 걸어서 옵니다. 방문객이나 초신자들이 교회 가까이 주차하도록 배려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편안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예배 시간에 어린이들을 돌봐주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어떤 교인들은 1주일에  꼭 두 세 시간씩 교회 식당에 와서 봉사하고 갑니다.  90년대 초 카자흐 공화국 알마타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도시 동남쪽에는 해발 1,800미터의 아름다운 산이 병풍처럼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산의 이름은 메데오(Medeo)산입니다. 산기슭에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스케이트 경기장이 있습니다. 본래 메데오는 사람의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메데오는 그 산에서 양을 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산 아래에서 사는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걸려있음을 보고 마음이 아파  매일 양 한 마리씩을 잡아먹게 했습니다. 훗날 동네 사람들은 메데오의 훈훈한 인정을 잊지 못해 그 산 이름을 메데오라 불렀다는 것입니다.

전에 일제시대에 전라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신문 배달을 하면서 편지를 애국지사들에게 몰래 전달하는 일을 하다 일본 경찰에 잡혀서 집단적으로 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죽은 시체들을 기적때기로 덮어놓았습니다. 목사님 한분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보니 거적때기 밑에서 발이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냥 지나치려다가 가서 살펴보니 목숨이 살아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을 데려다가 길렀는데  그 청년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예수를 믿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적때기에 덮여 있던 그 청년이 나중에 전라남도 도지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위가 김대중 대통령 시절 참모총장을 지냈습니다. 아파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사람을 살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축복을 받아 번영을 누리고 안정된 터전을 이루면 이룰수록 아파하는 마음이 사라진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니, 일부러 외면하려고 합니다. 딱한 이웃을 아예 보려고 하지도 않고 마음에 오래 담아두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요즘에는 보아도 감정이 없습니다. 무감동, 무감각이 현대인의 특징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신학계에서 많이 사용되는 단어가  'apathy(무관심)‘ 입니다. 오늘날 마귀가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무기는 바로 무관심입니다. 예수님도 악한 세대를 정의하기를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애국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않는다(마11:17)”고 했습니다. 당시 예수님 시대에 가장 무서운 병은 문둥병(한센씨병)이었습니다. 그 병이 무서운 것은 아픈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제 친구 하나나 처음 목회를 하던 곳이 경상도 어느 시골교회였습니다.

그 교회에서 있었던 얘기를 제게 들려주었습니다. 교인 중에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등에 하얀 반점이 생겼는데 없어지지 않고 자꾸 커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 목사가 그 여학생을 데리고 보건소를 찾았습니다. 의사가 그 반점을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뾰족한 칼을 꺼내어 그 부분을 찌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학생은 아프다는 표정이 없었습니다. 의사는 더욱 깊이 찔렀다가 빼니 피가 샘솟듯 솟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학생은 전혀 아픈 감각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한센씨 병이었던 것입니다. 그날로 그 여학생이 가족과 격리되었는데 그 아픈 마음은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풍요 속에 사는 우리가 영적인 문둥병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사랑은 아파하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긍휼은 원래 영어로 ‘sympathy'라고 번역을 하는데 sympathy에서 ’sym'은 ‘함께(together)'를 뜻하고 ’pathy'는 ‘아픔’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긍휼은 아픔을 함께 경험하는 것입니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 “강도와 신경통”이라는 글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날 어떤 가정에 강도가 들게 되었습니다. 강도는 잠자는 부부에게 칼을 들이대고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손들어! 우물쭈물하면 찌른다!” 부인은 두 손을 번쩍 들었으나 남편은 한 손만 번쩍들었습니다. 강도는 그 모습을 보고 당장이라도 찌를 듯이 소리쳤습니다. “두 손 다 들란말이야!” 남편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실은 왼쪽 어깨에 신경통이 있어서 들 수가 없습니다. “  그 소리를 듣고 강도가 조금 누그러지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경통이라고? 사실은 나도 신경통이 있는데...“ 그때부터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강도와 그 집 남편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부인은 그 모습을 보면서 주방에 나가 커피를 끓여왔습니다. 강도는 속히 건강을 회복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악한 강도에게도 아파하는 마음을 함께 느낄 때 착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감동적인 작품입니다.

긍휼히 여기고 사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어느 젊은 사람이 직장을 잃고 몇 달 동안 놀았습니다. 그래서 초조하게 지내다가 어느 회사에 입사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 가게 되었습니다. 면접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 옆에 어느 중년 아주머니가 그 뜨거운 날에 펑크난 타이어를 갈아 끼우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양심상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가서 타이어를 교체 해주었습니다. 서둘러 다시 차를 타고 면접 시험장에 갔으나 이미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인사과에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호소했으나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아주 낙담하여 돌아서서 현관을 나오는데 노상에서 타이어를 갈아 준 그 아주머니를 만났습니다. 알고 보니 그 아주머니가 자기가 입사하려고 했던 회사의 사장이었습니다. 결과는 뻔하지요. 회사에 입사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사건입니까. 이것이 인생입니다.

남을 염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마음에 생겨나야 합니다. 나는 이런 마음이 온 세상에 번져나가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도처에서 하나님은 아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교회가 추진하는 대부분의 사역도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몇 만 있어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즘 사람들은 회개란 말을 좀처럼 사용하지 않습니다. 회개란 “마음을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행동도 자연히 바꿔집니다. 회개란 세상과 물질 지향적인 삶을 살아 온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개인적인 번영과 축복만을 추구해 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곧 회개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주변의 아픈 일에 무관심하고 자기의 일에만 몰두해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아파하는 이웃을 향해야 합니다. 아파하는 마음은 한번 갖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늘 그런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김인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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