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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세우시는 주인공 (막 5: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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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한 명의 다급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유대교 회당장인[야이로]라는 사람인데 그가 당한 상황은 인간적으로 볼 때 정말 공감이 가는 다급한 상황입니다. 그의 딸이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회당장이라고 하면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큼의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일반적으로 남의 존경을 받는다고 하면 체면에 신경을 쓰거나 품위 유지를 위해 근엄한 자세를 가지기가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회당장 야이로는 그 체면이 깎이는 것을 무릅쓰고 주님 발 앞에 엎드려서 딸을 살려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23절에 나오는 유대교 회당장인 야이로의 겸손한 고백을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여러분, 어쩌면 부모의 심정이 다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식을 위한 부모의 심정이란 무엇이든지 할 만큼 늘 준비가 되어있는 마음입니다. 체면 따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는 어떻게 무너져도 상관없습니다. 이것이 자식을 향한 부모의 일반적인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간절한 요청에 응답하시고 회당장과 함께 그의 집으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모여 있던 해변을 떠나서 한 사람, 야이로를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야이로는 말할 수 없이 기쁘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이제 틀림없이 자기의 사랑하는 딸이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을 것입니다. 모든 걱정과 염려가 사라지고 소망만 가득안고 주님과 함께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처음 목적을 빗나가게 하는 뜻밖의 장애물을 만나게 됩니다. 12년 동안이나 혈루 증을 앓던 한 여인이 많은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주님의 옷자락을 몰래 만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사람들이 많으니 누가 내 옷을 건드렸나보다.’하고 가던 길을 가셨으면 되었을 것을 발걸음을 멈춥니다. 그리고“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굳이 그 여인을 찾아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33절에 보면 행색은 거지꼴이지만 얼굴에는 삶의 새로운 희열과 행복의 미소가 번지는 한 여인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다 들어주십니다. 들어보니 구구절절이 사연이 많습니다. 사실 이 여인도 나름대로는 굉장히 절박한 심정으로 주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나온 것이지요. 당시의 사람들이나 오늘 우리들이나 그 누구도 이 여인을 욕할 수도 없고 이해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충분히 동정이 가고 오히려 잘했다는 응원의 마음까지도 보태고 싶은 상황입니다. 참 잘된 일이지요? 축하해줘야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문제는 무엇입니까? 지금 상황이 갑자기 주인공이 바뀌어 버린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실 지금 주님이 가시는 목적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회당장 야이로와 그 딸이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거저 길가다가 만난 이름도 모를 한 여인이 주인공이 되어 버렸고 회당장 야이로는 조연으로 밀려나서 더욱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주님께서 이 여자의 말을 들어주고 있는 동안에 시간이 지체되어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죽어버렸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사랑하는 지극한 마음으로 자기의 회당장이라는 체면도 포기하면서까지 애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사정해서 지금 가는 길인데 엉뚱한 한 여자가 끼어들더니 그 여자는 고침을 받아 새로운 생명을 얻었지만 자기 딸은 죽은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야이로의 심정은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상황입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종종 이와 같은 경우를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끔씩 다른 사람의 기도를 내 기도보다 더 빨리 응답해 주는 경우입니다. 분명히 내가 더 헌신하고 내가 더 기도하고 내가 더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것 은데 복은 엉뚱한 사람이 먼저 받고 더 받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중요하지 않게 여기시는 것 같기도 하고 주님이 자신을 기억조차 하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런 기분이 들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기분이 깊어지면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목적 했던 바를 이루지 못했다 싶으면 교회를 떠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무시했고 교회가 자기를 우습게 만들었다고 어깃장을 부립니다.

오늘 회당장 야이로의 입장으로 돌아가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봅니다. 어떤 면으로 보아도 자기가 주님 앞에 더 충실했고 대화도 많이 했는데 전혀 그런 것도 없이 거저 지나가다가 옷자락 하나 잡은 것 밖에 없는 여자에게 치유의 역사를 내리시고 자기 딸을 죽게 하시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오를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뭐라 욕이라도 한마디 쏘아 붙이면서 당장 주님 곁을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의 간절한 부탁이 아무것도 아닌 한 여자 때문에 무시도 당했고, 딸을 고치려 했던 목적도 이미 딸이 죽어버린 마당에 그 목적을 이루기도 틀린 상황입니다. 자기의 전부를 희생하며 그렇게 살리고자 했던 그 딸이 죽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렇게 체면 구겨가며 주님을 모셔갈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버렸습니다. 우리 같았으면“에라이,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을 앞으로 또 보면 인간이 아니라 개다.”그러면서 삿대질하면 벌써 한 마디하고 사라졌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오는 회당장 야이로를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35절 말씀을 미루어 보아 자기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그래도 주님, 가십시다. 우리 집에 가셔서 내 딸을 꼭 보셔야 합니다.”하고 무척이나 졸랐던 것 같습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말릴 정도였으니까요. 아마 사람들이 보기에 야이로가 딸의 죽음소식을 듣고 실성을 했나보다 싶었던 모양입니다. 인간적으로야 이해가 가는 상황 아닙니까? 생떼 같은 딸이, 그것도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닌 어린 딸이 집을 나올 때 아파서 고통 하던 것을 보고 나왔는데 그 딸의 마지막도 보지 못했는데 죽었다니 실성할 정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정신없이 저렇게 주님께 매달리나보다 싶었던지 사람들이 뜯어 말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야이로의 그 행위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단순한 인간적인 모습이 아니라 아직도 주님에 대한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믿음의 표시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볼 수 없었지만 주님만이 그것을 아셨습니다. 결국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죽음에서 살아나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고, 회당장 야이로도 귀한역사의 주인공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주인공인 야이로의 믿음을 생각해야합니다. 혈루증을 않던 한 여인에게 잠시 주인공의 자리를 내 주고 실망하고 낙심하고 포기까지 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 아니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마침내 주인공의 자리에 다시 우뚝 세우시는 그의 믿음을 볼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도 거기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믿음을 살펴보면 결코 우리들의 삶과 동떨어진 것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모습들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오늘 야이로는 혈루증이 나은 여인을 질투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딸은 12살에 죽을병에 걸렸지만 이 여인은 12년을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었습니다. 야이로는 그녀의 아픔을 충분히 이해하는 시각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경쟁상대로 생각했었다면 주님과의 대화 도중에라도 끼어들었을 것입니다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하면서 맹목적인 경쟁의식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누가 먼저 왔고, 누가 잘 믿고, 누가 잘 봉사하고, 누가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누가 더 존경받나 보자...서로 주인공이 되고자하는 인간적인 욕심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경쟁한다면 남이 은혜 받는 꼴을 못 봐주고, 남이 기도 응답 받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게 됩니다. 오늘 야이로는 이런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시기와 질투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합니다. 오히려 나도 은혜를 받을 수 있고 나도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신선한 자극이 되어야합니다. 어쩌면 야이로는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자기 눈앞에서 고치시는 주님의 능력을 보고 자기 딸도 고칠 수 있다는 능력을 보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은 아무나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능력을 믿는 믿음이 있는 자만이 볼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이것은 이 여인의 누려야할 복이요, 나에게는 내 믿음에 맞는 복을 주실 것이다.’라는 보이지 않는 야이로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헌신과 땀을 잊지 않으십니다. 나에게 주실 복은 나에게 주시는 분임을 믿고 질투하거나 시기하며 안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성실히 행하는 믿음이 있으면 때가 되면 나에게 복을 내리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야이로의 변함없는 믿음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주님과의 관계에서 주인공의 입장에서 갑자기 조연의 입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자기의 부탁으로 자기 딸 때문에 가고 있는데 한 여인이 나타나더니 잠시 동안 주인공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딸은 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딸의 죽음으로 실망한 기색을 보이거나 원망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꼭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요, 내가 잠시 조연이 되었지만 언젠가 다시 주인공의 자리로 돌려놓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열 두해 동안 혈루증 앓다가 나은 것도 사실은 기적입니다만 굳이 비교하자면 열두 살 소녀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은 더욱 큰 기적 중에 기적 아닙니까? 하나님은 조연의 자리에서도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주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끝까지 주님을 신뢰할 때 더욱 멋진 주인공의 자리로 회복 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주님과 동행한다고 우리들의 삶이 항상 평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면 궁극적으로는 다 잘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 궁극에 도달할 때까지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고 인생의 계곡을 지나고 삶의 굴곡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때로 길을 가다가 갑자기 멈추어 서시기도 하고 가끔씩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위기의 순간 속으로 밀어 넣으시기도 하십니다. 그 때는 당황하여 하나님을 떠나거나 실망하고 절망하여 포기할 것이 아니라 나를 주인공으로 세우시기 위한 믿음의 시련인줄로 깨달아 인내하며 마지막까지 달려가는 믿음의 경주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주님께서 처음에 회당장의 말을 듣고 그와 동행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의 믿음을 알고 있었고 그 믿음을 인정하셨으며 그의 믿음을 더욱 단련하시기 위한 계획으로 길 가시다가 멈추시고 혈루증 여인을 고쳐 주시는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나 같은 사람의 고백을 받으시고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은 이미 내 일생에 동행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일은 그 약속을 끝까지 신뢰하는 일입니다. 그 과정에 무슨 일들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무시하심도 아니요, 나를 버리시기 위함이 아니요, 나를 세우시려는 믿음의 연단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신앙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하나님 앞에서 가끔씩 조연의 자리로 밀려났다 싶더라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기도응답이 다른 사람에게는 빨리 되고 나에게는 늦게 된다고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능력을 속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준비만 하고 있으면 언제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전면에 세우실 것입니다. 잠시 조연을 허락하시는 것은 주연을 맡기기 위한 조처입니다. 주님의 계획을 믿음 가운데 두고 참고 인내하여 언제든지 하나님이 세우시는 주인공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준비 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철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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