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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세요 (요 15: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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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걸. 사랑 받는 그 순간보다 흐뭇한 건 없을 걸”
그러면서 “천만 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억 만 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사랑해” 그렇게 천만 번, 억 만 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은 “사랑해”입니다.

전에 있던 교회 권사님이 가끔 전화를 합니다. 아내가 받으면 한참 이야기하다가 저에게 주고, 저가 받으면 간단한 인사말 하고 아내에게 넘겨줍니다. 아내와 같은 속도원들이어서 같이 등산도 하고 그러던 권사님입니다.
이 권사님이 늘 제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님, 사랑해요.” “보고 싶어요. 목사님.” 그럴 때마다 내가 괜히 쑥스러워집니다. 통화를 마치면 내 스스로 “난 참 속물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내가 “누구든지 사랑하라”고 가르쳐 놓고선, 막상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서 부담 같은 걸 느끼다니…….
목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물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삽니다. 그리고 목사는 성도들의 사랑으로 삽니다. 그런데 그 “사랑해요, 목사님” 이라는 그 말에 왜 부담 같은 걸 느낄까?

성경은 곳곳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육신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영적으로만 사랑하셨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데까지 내어놓으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인생의 주제는 곧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에서 사랑은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아마 인생에서 사랑을 빼면 남는 것은 죽음뿐일 것입니다.
더욱이 성경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추방하신 것도, 애굽의 종살이로 고통당하는 당신의 백성을 이끌어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신 것도, 당신의 백성들이 잘못했을 때 벌을 주시고, 또한 수많은 선지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게 한 것도 사랑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그분의 생애,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 성령의 보내심, 사도들과 제자들의 죽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복음 전도 등등, 모두가 다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일서 4:8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하였습니다. 우린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간직한다면 언제든지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여자가 남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당신을 정신적으로 사랑합니다.” 이 말은 극히 고상한 말 같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 말 뒤에는 육체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여기서 말하는 육체적인 사랑이란, 성적이라는 극히 부분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말하자면, 사랑은 곧 육체적, 그것도 성적 결합을 의미하고, 따라서 아무도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말이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아늑하고, 포근하고, 반가운 말이 아니라, 아프게 하고, 비참하게 하고, 오히려 무참한 절망을 가져다주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저 무대 위의 배우들이나 하는 말이 되었고, 노래 속에서만 자리 잡고 있고, 드라마에서나 흔히 사용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결혼 할 수 있는, 부부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이에서만 사랑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말하면 오히려 저속하게 들려지게 되었고, 누군가 붙들고 “사랑한다.”고 말했다가는 미친 사람 취급 받거나 따귀 맞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가족 외에 다른 이성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가는 성추행으로 고소당할지도 모릅니다. 사랑한다는 것이 죄처럼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든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서가 일러주는 사랑의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실행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 사람과의 관계를 살펴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셨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의 관계입니다.

20세기 신학자 에밀 브루너(Emil Brunuer)는 창세기 1:26, 27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것은 주체인 내가 제한된 자유를 갖고 인간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인간으로서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 사랑을 행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사명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성서에서 많은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만, 에베소서 2:4에 “큰 사랑”, 예레미야 31:3에 “무궁한 사랑” 즉 영원한 사랑, 로마서 5:8에 “희생적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이 크고, 영원하고, 희생적인 사랑을 그 아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로선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생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태어날 곳이 없어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이려는 자의 손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짐승도 거할 곳이 있는데 예수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결국 33세의 젊은 나이에 십자가 달려 죽으셨습니다. 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옮겨 달라는 기도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절규도 하나님은 듣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조롱당하고 죽어가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침묵만 지키셨습니다.

그게 무슨 사랑입니까? 아버지인 하나님께 능력이 없다면 몰라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예수님께 잘해주실 수 있고, 다른 방법으로도 당신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침묵하셨고, 결국 예수님은 고통 가운데 죽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해 목숨을 버림이라.”(요 10:1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되어진 그 모든 일들이, 당신이 당하는 그 엄청난 고통들이, 당신을 죽이는 그 모든 일들이 오히려 당신을 살리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확실히 믿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말할 때, “거룩하신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등으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경험했기 때문에 나온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송기득교수는 ‘인간’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묻기 전에 “인간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대답은 인간이 체험한 그 사실에서 대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웃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등은 내가 그렇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느냐 하는 겁니다. 무서운 하나님으로 경험되던지, 사랑의 하나님으로 경험되던지, 좋으신 하나님으로 경험되던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멸망하시려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 즉 사랑의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 말씀에 순종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으며,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패와 좌절과 고통 속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이시는 아버지, 그러나 그 죽음은 곧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함임을 믿었던 예수 그리스도.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믿었던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살펴봅니다.
예수님은 “나도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단절된 관계를 바로 놓아주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셨으며,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당신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셨고, 약한 우리를 강하게 하시려고 스스로 약한 자가 되셨습니다.
그러한 그분의 사랑은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막거나 끊을 수 없습니다. 사망, 생명, 천사들, 권세 자들, 현재 일, 장래 일, 능력, 높음, 깊음,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롬 8:38-39)

옛날 하와이 군도 중에 한 섬인 모르카이 섬은 나병환자들만 모여 사는 죽음의 섬이었습니다.
어느 날, 멀리 벨기에로부터 다미엔이라는 한 신부가 그 섬에 찾아와서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온 몸이 썩어져가는 나병환자들 앞에서 복음을 전할 때, 나병환자들은 그를 비웃었습니다. “자신은 건강한 몸이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살지만, 만약 우리들처럼 죽게 되었으면 그렇게 말하지도 못할 걸.”
고민에 싸여있던 다미엔은 제단 앞에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에게도 나병을 주셔서 저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에 하여 주옵소서.” 얼마 후, 다미엔의 감각이 점차로 무디어지고, 눈썹이 빠지고, 관절이 떨어져 나가는 죽음의 병이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손가락 마디가 떨어져 나간 나병환자의 모습을 하고 나병환자들 앞에 선 다미엔 신부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사랑하는 동료 여러분! 그리스도는 나병에 걸린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근본이 하나님과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곧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빌 2:4 이하)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가 짊어져야 할 죽음과 고통을 대신 지시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동료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온 세상을 살리게 된 것입니다.
나폴레온이 세인트 헤레나 섬에 귀양 가서 말하기를, “나는 여러 백만 대군으로 세계를 정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는 한 병정도 없이 온유와 사랑만으로 세계를 정복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찾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런대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에 대해서는 별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하셨지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뭔가 하나라도 더 얻으려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왜 손해 보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살펴보았듯이, 그분들의 사랑은 언제나 내가 아니라 상대 곧 ‘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물론 궁극적인 목적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당신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때로 화를 내고 야단도 칩니다. 그러면서도 먹을거리를 주고 잘 해줍니다. 이것이 다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는 자식이 훌륭한,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목적이 있습니다. 만약 이 목적이 없다면 맹목적인 사랑이 되고, 그런 사랑은 오히려 자식을 망치게 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결국 자식을 위해서입니다. 부모의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지고 죽으신 것은 하나님과 예수, 곧 당신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당신들의 만족을 얻기 위함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인간의 만족, 인간의 기쁨, 인간의 행복,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 지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만족하고, 사람이 기뻐하고, 사람이 행복하고, 사람이 구원 받을 때, 하나님도 예수님도 만족하고, 기뻐하고,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사랑을 외면했습니다.
강을 건너 마을이 있습니다. 그들은 조그마한 배를 타고 건너다닙니다. 그것은 엄청 위험한 일입니다. 비바람이 불면 아예 건너다니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돈을 많이 들려서 다리를 놓아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지 않고 여전히 배를 타고 건너다닌다면 그 다리를 놓은 사람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라서 부모가 사랑을 쏟아 부었는데, 그 자식이 하는 말이, “제발 날 좀 그냥 내버려두세요.” 그런다면 부모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여러분이 누군가를 사랑했는데, 그 사람으로부터 “그냥 날 내버려 두라.”는 말을 들었다면 그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바로 사람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고, 그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하셨는데도 사람들이 “그냥 내버려두라. 우린 우리로서 살겠다.”고 한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한다. 너희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9절)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2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도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다.”(17절)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이 있게 하시려고,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려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생깁니까? 아닙니다. 저는 저, 나는 나 그렇게 살면 됩니다. 어쩌다 부딪치면 인사하고 그렇게 살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에 무슨 어려움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아무 어려움도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심리학자인 고든 알포드는 말하기를,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해 주는 사람도 없다면 2개월 이내에 정신분열증에 걸린다.”고 하였습니다.
혼자 살 수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어차피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미움보다, 무관심보다, 사랑하며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계명이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할 명령입니다. 이웃 사랑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사도행전에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전도라고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어버리면 그 천하가 아무 소용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 믿고 구원받아 생명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전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도는 무엇입니까? 기독교의 교리가 아닙니다. 도는 곧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하라는 겁니다.
내가 1년에 몇 명 전도했는가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내가 1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사랑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가졌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고 함께 나누기 위한 모임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세상으로 끌고 나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라는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곡예단이 성당에 갔습니다. 얼마 후 나왔는데 어릿광대 피에로만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다시 성당에 가보았습니다.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그 어릿광대 피에로는 성모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그 성모상 앞에서 땀을 흘리며 열심히 재주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거꾸로 선 그의 얼굴에는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한 헌신이며, 그것은 결국 나를 기쁘게 하고, 모든 일에 긍정적인 생각을 갖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물론 사랑함에는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 독생자를 보내시는 아픔이 있었고,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십자가 지고 죽으시는 고통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 아픔과 고통까지도 끌어안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일 때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들던 안 들던, 내게 유익이 되던 손해가 되던,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다.(사 10:6-8)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언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와 결실할 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결실을 맺을 때입니다.
사회질서는 깨졌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는 오히려 충만하게 되는 세상,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가능해지는 세상인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옆자리에 함께 한 사람과 인사합시다. “사랑합니다.” “정말, 정말, 사랑합니다.”
그렇게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할 때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사랑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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