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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운가? (막 12: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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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누가 과연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운가라는 중대한 질문 앞에 서게 합니다. 예수님의 가슴엔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란 주제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전하신 메시지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 1;15).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하나님의 통치를 이제 우리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가슴으로 느껴보고 우리 삶의 한가운데서 경험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그런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에게는 가장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의 리더십아래서 사느냐에 따라 그 삶의 형편이 크게 좌우 받기 마련입니다. 사랑과 공의, 은혜와 진리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슬픈 것은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통치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심지어 로이지라는 신학자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그런데 교회가 생겼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신학적으로 정확한 말은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의도하신 공동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교회가 예수님의 의도하신 바와는 달리 하나님나라와 너무 멀리 있다는 것을 꼬집는 말로서 우리가 마음에 담아둘 만한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울 정도가 아니라 그 안에 푹 들어가 녹아지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무엇이 가장 큰 계명인가를 잘 깨닫고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1.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는 율법학자(28)

방금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예수님과 변론하는 것을 들은 사람 중에 율법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 질문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의 질문은 지금까지 당시 지도자급의 인물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과는 성격이 많이 달랐습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한다거나 위선적인 구석이 없었습니다. 진실하게 답을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것은 본문의 문맥을 잘 살펴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지하게 답변을 해주셨고 그가 잘 이해하자 예수님은 그를 칭찬해주셨습니다.

그가 던진 질문은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 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였습니다.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구약의 계명은 성경주석가들에 의하면 모두 613개에 달한다고 합니다. 모두 하나님이 주신 중요한 계명입니다. 어느 하나도 경홀히 여기거나 폄하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계명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어떤 계명을 중심으로 해서 다른 계명들을 보느냐에 따라 계명 전체와 각자 계명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을 사용하면 그렇게 중심 되는 말씀이나 계명을 해석학적 열쇠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그 언어가 대체적으로 평이하기 때문에 쉬운 면이 있지만, 또 다른 차원에선 마치 자물쇠로 닫혀 있는 책과 같이 어려운 면도 있습니다. 열쇠로 열어야 제대로 그 책이 우리 눈앞에 시원하게 열리게 됩니다. 그 자물쇠를 여는 열쇠의 역할을 하는 말씀을 일컬어 해석학적 열쇠라고 하는 것이죠. 이 율법학자는 당대의 신학자답게 그 많은 613개의 계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해석학적 열쇠가 무엇인지 예수님을 통해서 알고 싶었던 것이죠.
 
출판되자마자 대형 베스트 셀러로 한국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온 부르스 윌킨스의 『야베스의 기도』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역대상 저자는 그의 기도의 삶을 간결하게 전해줍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해 주시고, 내 영토를 넓혀 주시고, 주님의 손으로 나를 도우시어 불행을 막아 주시고,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가 구한 것을 이루어 주셨다(대상 4:10)'. 우리 마음에 쏙 들어오고 절절히 다가오는 기도입니다. 우리도 삶의 여정가운데 이런 기도를 드려야 할 때가 있고 야베스가 누렸던 축복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야베스의 기도는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기도 중에 하나에 불과하며 가장 중요한 기도는 더더구나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기도는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마 6:9-13).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야베스의 기도를 이해해야 비로소 그 기도가 하나님백성들의 삶에 갖는 의미와 무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시도를 한 책이 제임스 멀홀랜드의 『예수님처럼 기도하라』는 책입니다. 모 대형교회 목사님이 설교 모두에서, 이 책을 읽다가 기도의 불이 식어지는 것 같아서 반쯤 읽다가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노라고 고백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 책에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완전한 해석이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비극 중에 하나는 야베스의 기도를 따로 떼어내어 마치 기도의 최고 모델인양 간주해온 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란 내 인생의 축복과 성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전락되고 왜곡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에 등장하는 한 율법학자가 하나님의 계명 중 가장 으뜸 되는 계명이 무엇인지 예수님께 물은 것은 실로 지혜로운 것이었습니다.

2. 예수님의 답변과 칭찬(29-34)

예수님은 그의 지혜로운 질문에 진지하게 답해주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첫째로 중요한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신명기 6:4를 언급하십니다. 흔히 이 말씀은 그 첫 단어인 '들으라'의 히브리어를 따서 쉐마(Shema)라고 불립니다. 이 말씀은 주전 2세기경의 증거에 의하면 경건한 유대인들이 아침저녁으로 기도하고 신앙고백하는 데 사용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슴에 깊이 새겨둔 말씀에 호소하십니다.

하나님백성이 가장 중요한 계명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기억해야 할 점은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란 진리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주 하나님은 유일무이한 절대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과 경쟁적인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윤리의 출발점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얻으려면 먼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한 세상은 이 진리를 당연히 싫어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백성마저 흔들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입술로는 수 없이 하나님을 불러대지만 사실상은 무신론자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늘 새롭게 회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여기에 묘책은 없습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초월하는 고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할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일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매우 합리적이고 현명한 선택이라는 점은 우리 삶을 깊이 성찰할수록 더욱 분명해집니다. 어거스틴이 그의 『고백록』에서 선언한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창조된 존재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때 까진 인간은 결코 진정한 쉼과 평안을 누릴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C.S. 루이스가 자신의 『순전한 기독교』첫 부분에서 명쾌하게 밝힌 것처럼 자신을 초월한 그 어떤 존재가 없다면 우리 가슴에 새겨져 있는 윤리의 존재 자체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유일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때 비로소 가장 중요한 계명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는 것입니다. 마음, 목숨, 뜻 그리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존재 안에 있는 가장 소중한 모든 것, 즉 전 존재를 다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직 한 분뿐인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그 어떠한 윤리적 계명보다 이것이 더 중요한 것은 당연합니다.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지요. 자녀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고 해도 부모를 몰라본다거나 무시하거나 경멸한다면 그 자녀의 도덕성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곧 살펴보겠지만 이는 다른 계명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부모를 존중하는 것과 무관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는 우리의 허점을 깊이 찌르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속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우리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확신합니다. 실상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면서도 말입니다.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 그리고 사울과 예수님의 관계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끝까지 우기고 싶었습니다. 자기만큼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공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진실을 알고 있었지요. 예수님은 그를 자기기만의 환상에서 깨어나게 해주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셨지만 모두 허사였습니다. 베드로는 결코 자신이 예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갈 때까지 가야만 했습니다. 예수님도 결국 그에게 '내가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밤에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막 14:30)라고 미리 말씀해 두시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은 이뤄지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과 베드로의 눈 길이 서로 마주 쳤습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대한 진실을 발견합니다. 그는 사정없이 무너집니다. 통곡의 눈물을 한없이 흘립니다. 그럼에도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겠죠. 회한과 절망의 바닷가에서 그는 그저 서성거렸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 오셔서 그를 위로해주시고 감싸 안아주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말할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그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겸손하게 그러나 진실하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러기를 세 번 반복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훈련의 궁극적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사울 역시 마찬가지였죠. 그 역시 벅벅 우겨댔습니다. 자기만큼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 없다고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증명이라도 하듯 스데반 순교를 승인하고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의 옷을 맡아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격렬하게 핍박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자신의 삶을 온통 불사르고 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원하셨습니다. 강력한 빛으로 그의 눈을 멀게 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셨습니다. 한편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호소하십니다.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한답시고 하는 모든 행동이 사실은 하나님을 핍박하고 있는 일임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서죠. 그는 삼일을 금식하는 가운데 깊은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고야 자신에 대한 진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우리도 이렇게 늘 새로워질 수 있길 바랍니다. 절대로 자신을 속이거나 자신에게 속지 맙시다. 실제론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우기지 맙시다. 늘 주님 앞에 발가벗고 섭시다. 매 순간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결코 전 존재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합시다. 하여 늘 베드로처럼 사울처럼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듬뿍 경험하며 진실로 주님을 내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한다고 고백합시다.
 
예수님은 '둘째는 이것이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역시 레위기 19:18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답변의 심오함은 두 말씀을 하나로 묶은 데 있습니다. 율법학자는 으뜸 되는 계명 하나를 물었는데 예수님은 두 가지로 답변하신 데 있습니다. 즉 두 계명은 사실 상 하나라는 것이죠.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면 자연히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합니다. 이웃을 별로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입니다. 하지만 수직적이고 주관적인 하나님사랑의 진정성은 이웃사랑이라는 수평적 관계로 그리고 객관적인 모습으로 나타남으로서만 비로소 증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베드로로부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진실한 답을 들으신 후,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어린양을 사랑하지 못하는 순간 예수님에 대한 사랑고백은 그 진정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관련해 자신과 남을 결코 속일 수가 없습니다. 이웃사랑이 결여되어 있으면 다른 것은 모두 형식적 위선일 뿐입니다.

인본주의를 내세우는 현대인들은 흔히 하나님을 거부하는 중요한 이유로 하나님을 인정하면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고 인간애에 위협이 된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는 심각한 편견이요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인본주의의 든든한 기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진실로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사람마다 이웃사랑의 역량에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 역량에 한계가 있다는 데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 한계를 뛰어넘어 사랑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서 나옵니다. 수녀 테레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역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기도라고 늘 강조하였습니다. 길가에서 스러져 가는 이들, 몸에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이들을 껴안고 사랑해줄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올 수 있음을 그 자신 너무나 깊이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즘 종종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30여 년 동안 무엇을 하셨는가 상상해봅니다. 성경은 그 기간에 대하여 딱 두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말구유에 탄생하신 것이요, 다른 하나는 12살 때 유월절 축제기간 가족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가족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잊어버린 채 성전에서 선생들과 대화를 통해 배움의 시간을 가진 사건입니다. 그 외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가 목수의 아들로써 아버지의 일을 도왔을 것이란 점입니다.

여기서 저는 예수님의 인간을 향한 지극한 사랑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30년 동안 묵묵히 인간의 삶의 애환을 보고 경험하십니다. 우리와 같이 먹고 마시고 잠을 잤습니다. 물론 화장실을 들락거리시며 소변도 보시고 대변도 보셨겠죠. 아마 아버지의 목공일을 도우면서 경기변동에 따른 기쁨과 불안도 경험하셨겠죠. 이렇게 예수님은 온 마음과 온 몸으로 인간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자 온갖 유형의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의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하고 깊은 인간미에 매료당한 것이죠. 이제 제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30년을 예수님처럼 다시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러나 남은 생애동안 흉내라도 내보고 싶어집니다.

지난 주일 어르신 잔치와 쪽방 도배에 함께 참여하면서 작은 이웃사랑의 기쁨을 다시 맛보았습니다. 한 어르신은 북한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다시 남한으로 오셔서 한국동란까지 참여한 분이십니다. 이분도 지금 까지 생일상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라고 좋아하셨습니다. 대화하는 순간 뭐라고 뭐라고 정신없이 말씀하시는데 유창한 일본어였습니다. 흥분하신 거죠. 앞으로 우리 언덕에 이웃사랑의 시냇물이 더욱 풍성하게 흐르게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중요성을 잘 깨달은 율법학자를 칭찬하십니다. '네가 하나님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이 말씀엔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할 때 비로소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나라에 가까이 다가가고 그를 실천하여 하나님나라 깊숙이 들어가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만끽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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