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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황제의 것 대(對) 하나님의 것 (막 1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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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우리의 깊은 곳을 훤히 비추십니다. 아프지만 거기에 우리의 살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다가오면 올수록 자기 방어의 벽을 높이 쌓지요. 아니 때론 이런 저런 방법으로 반격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그런 시도가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청결케 하는 결정적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성전체제를 권력의 근간으로 삼고 있던 산헤드린은 매우 당황하였습니다. 제사장, 장로,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여 무력화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혜로운 대응에 입이 막혀버립니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포도원 비유를 통해 그들의 반역행위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인내와 심판에 대하여 선언하십니다. 그들을 돌이키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방어의 벽을 한층 더 높이 쌓습니다. 자기들이 살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을 기어이 넘어뜨리는 데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제 산헤드린은 바리새인과 헤롯당까지 동원하여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지 올무에 걸어 무력화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대화를 하면서 그들의 비열함과 비겁함만 더 드러나고 맙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첫째 예수님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사악함을 성찰하고 둘째 사악한 인간에 대응하시는 예수님의 지혜를 깨닫고 마지막으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라는 말씀의 진의가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기 바랍니다.

1.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사악함(13-15a)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사악함은 우선 예수님의 말꼬리를 잡아서 곤경에 빠뜨려 무력화시키려는 데서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도망치는 전형적 수법 중에 하나입니다. 선제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죠. 나의 깊은 곳을 들추어내려는 존재를 선수를 쳐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이 우리 삶의 주변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을 목격합니다. 가장 두드러지는 곳은 한국정치현장입니다. 선비 같은 분들이 정치판에 뛰어들어 제대로 살아남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상대방의 약점을 잡고 끈질기게 흔들어대는 비열한 술수에 살아남기가 어려운 거죠. 남북관계, 한일관계, 한미관계, 미국과 이라크 관계, 이스라엘과 아랍권의 갈등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런 현상을 늘 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지적하면서 자기에 대한 성찰로부터 도망치는 경우가 적지 않지요. 개혁운동을 하는 것이 그래서 늘 조심스럽습니다. 개혁대상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파헤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죄와 잘못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진정한 변화를 교회와 세상에 가져오려면 다른 사람의 잘못과 죄 뒤에 숨고 싶어하는 강렬한 본능과 치열하게 싸워 이겨나가야 합니다. 인간사의 근원적 해결엔 인간의 죄성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부터 하늘로부터 오는 변화를 늘 새롭게 경험할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둘째,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악한 일을 위해 의기를 투합했습니다. 이들은 본래 서로 잘 맞는 그룹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안식일 회당에서 한 손 마른 자를 고친 사건을 계기로 그들은 예수를 제거하는 데 뜻을 모으기 시작한 바 있습니다. 선한 일에 마음을 합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악한 일엔 마음을 합하기가 훨씬 쉽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이 드러납니다. 연말이 오면 교회마다 일종의 시험대에 오르게 됩니다. 예산책정에서 교회의 진실한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얼마나 좋은 일에 교회가 연대할 수 있는가가 밝혀집니다. 물론 자신의 교회형편을 살피는 지혜와 균형감각은 일정정도 필요하겠죠. 그러나 우리 언덕교회는 새해 예산을 책정하면서 최선을 다해 좋은 일에 힘을 모으는 연습을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진정성과 진실성에 기대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진정성과 진실성을 익히 알고 있었죠.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한 분이시고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는 분이심을 압니다. 선생님은 사람의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입이 닳도록 예수님을 격찬합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예수님을 넘어뜨릴 무기로 삼습니다. 얼마나 비열합니까? 목적달성에 매몰될 때 인간이 얼마나 사악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목적 지향적 삶은 양날을 가진 칼처럼 조심해야 합니다. 한편으론 게으르고 비효율적인 삶을 극복하는데 매우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목적에 지나치게 매몰되면 그 목적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해야할 필요성 자체를 망각하게 됩니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이 과연 정당한가에 대한 치열한 성찰을 못하게 됩니다. 이 점이 바로 개발독재시대를 거친 한국문화의 치명적 결함입니다. 황우석 교수의 과학적 업적과 그의 비윤리적 처신을 따로 떼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넷째,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릴 목적으로 난제를 제기합니다. 그 당시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문제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습니다. 요즘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국론이 극명하게 분열된 사안입니다. 일반백성들 가운데는 세금납부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사람들 많았습니다. 실제로 세금납부반대운동, 안티 가이사 운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있어 왔습니다. 열심당원이 바로 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마음에 별로 내키지 않지만 힘에 눌려 세금납부를 신학적으로 정당화시켰습니다. 헤롯당도 원칙적인 면에서 세금납부에 동의하였습니다.

이 질문에 함정이 있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세금납부에 반대입장을 표명하면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예수님을 재판에 회부할 수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눅 20:20을 보면 그것이 그들의 의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회를 엿보다가, 정탐꾼들을 보내서, 이들이 거짓으로 의로운 사람들인 체 행세하면서 예수께로 접근하게 하여, 그의 말씀을 책잡게 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예수를 총독의 치리권과 사법권에 넘겨주려고 하였다".

반면 만일 예수님이 세금납부를 찬성하면 백성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지지를 잃게 됩니다. 그들은 바로 이렇게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으려 했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예수님에게 한 수 배울 량이었던 것 같습니다. 얼마 전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걸고넘어지려고 하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난데없이 세레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당황하다가 대답을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같은 방법을 예수님에게 사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고 같은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곧  살펴보겠지만 그들은 다시 망신만 당하고 맙니다.

신앙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질문은 던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경은 진지한 질문을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세계의 수많은 방황자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데 공헌해온 『라브리』라는 신앙공동체의 중요한 모토 중에 하나는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대답'입니다. 저도 영국 라브리에서 3주일 동안 살아보았습니다만 매 식사시간이 어김없이 토론시간이었습니다. 진지한 질문과 진지한 대답으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정신을 잘 이어가고 있는 공동체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 질문이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리려는 것일 때 우리는 대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먼저 우리의 그런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진정으로 알고자하는 마음이 있어야 좋은 대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이성과 한계 내에서 증명이 다 되는 것은 아니겠죠. 예수님의 진리는 원천적으로 우리의 이성과 경험을 초월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믿을 만한 것인가 만큼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의 지혜(15b-17)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을 한 눈에 꿰뚫어 보셨습니다. 하여 겉으론 진지하게 진리를 탐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진리엔 전혀 관심이 없고 예수님을 올무에 걸어 넘어뜨리려는데 매몰되어 있는 그들의 모습을 밝히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진리를 탐구하고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고자 한다면 위선은 가장 먼저 극복되어야 할 점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가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하실 때 제일 먼저 하는 작업은 위선의 껍질을 벗겨내는 것입니다. 이 도전 앞에 힘이 들지만 우리가 굴복하면 진리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울이 바울되는 과정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넘친다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과 진리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요. 그는 위선의 두꺼운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자기도 자신의 모습을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 위선의 껍질을 벗겨내기 위해 예수님은 그를 강한 빛으로 넘어뜨리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호소하십니다. 그는 3일 동안 금식하며 치열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습니다. 아나니아가 그에게 안수하고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자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졌습니다. 두꺼운 위선의 껍데기를 깨고 그 안에서 나오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위선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을 예수님이 비춰 주시는 성령의 빛 가운데 우리 자신을 용감하게 노출시켜야 합니다. 그것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힘들어도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을 벗겨내기 위해 지혜롭게 대응하십니다.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가, 나에게 보여보아라.'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 그들이 대답하였습니다. '황제의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통용되던 은 동전에는 황제의 초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글귀가 있었습니다: '디베랴 가이사 아구스도는 신성한 아구스도의 아들'. 다른 면엔 '최고의 대사제'(pontifex maximus)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표현은 나중에 교황의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한 것입니다.

'황제의 것'이라는 그들의 짤막한 대답에 예수님은 의미심장한 답을 주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이 말씀은 오랫동안 오해가 되어 왔습니다. 예수님이 제국주의자인 로마황제에게 세금 드리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어떤 정권에든지 복종하고 의무를 다할 것을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맥락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뜻이 전혀 아니었음을 금방 눈치챌 수 있습니다.

바른 해석의 결정적 요소는 예수님의 답을 들은 그들이 경탄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엔 바리새인과 헤롯당도 물론 포함됩니다. 그들은 허를 찔린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리는 데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을 재판에 회부할 수도 없었고 백성들 앞에서 그의 권위를 깎아 내릴 수도 없었습니다. 우선 후자의 경우만 생각해 봅시다. 만약 예수님이 단순히 세금납부를 긍정한 것으로 그들이 이해했다면 백성들 앞에서 예수를 얼마든지 폄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에는 그 이상의 깊은 뜻이 담겨있는 것을 그들은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충돌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점을 듣는 사람들 모두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말씀을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정권에든지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근거 구절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무조건 세금납부를 전면적으로 거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을 그들의 원래 의도대로 총독의 치리권과 사법권에 넘겨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 답변의 놀라운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짤막한 대답 속에 두 가지 깊은 의미를 동시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첫째, 나라에 세금 바치는 것은 원칙적으로 정당하다는 점을 인정하셨습니다. 동전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 동전유통의 정당성과 편의를 제공해주는 정부를 인정하는 것이요 세금납부의 책임을 받아드리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기독교교회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일반 정부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많은 고민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교회와는 달리 신약교회는 신앙공동체와 일반사회공동체에 동시에 속해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일반사회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칼로 표현되는 폭력적이고 강압적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평화롭게 보이는 사회에도 경찰이나 군대 그리고 법정과 감옥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것이 없으면 사회가 유지될 수 없지요. 평화를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이 이런 공동체를 지지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에게 심각한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반적인 차원에서 세금납부의 정당성을 인정함으로써 원론적 차원에서 그런 정부의 존재를 긍정하십니다. 바울은 이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켜서 세상권력의 정당성의 근거와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합니다(롬 13:1-7). 즉 선을 행하는 자를 칭찬하고 악을 행하는 자를 처벌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권위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타락한 세상의 기본적 질서가 유지되도록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권력을 일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생각입니다. 물론 그들의 평화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마음 자체는 고귀하게 여기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세금납부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암시하십니다. 예수님은 황제의 것이 있지만 하나님의 것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말할 것도 없이 황제보다 하나님이 우위에 있다는 전제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드려야 한다는 말씀의 진의를 살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엔 황제에 대한 매우 도전적인 뜻이 담겨 있습니다. 즉 황제가 하나님의 것까지 요구한다면 황제에게 줄 수 없다는 것이죠. 만일 황제가 통치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명백히 어기면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충성과 세금납부를 요구한다면 이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거역하게 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경우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몫을 황제에게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무비판적으로 정부의 하는 일에 찬성하거나 복종할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시민불복종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책임이자 권리입니다.

백성들 뿐 아니라 바리새인과 헤롯당도 그 뜻을 알아차렸습니다. 당시 황제가 하나님의 위치에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백성들은 분통이 터지지만 힘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세금납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열심당원들의 간헐적인 혁명운동이 성공하기를 그들은 은근히 바랬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특히 양심이 찔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신학을 아는 사람으로서 현재의 로마황제에 대한 세금납부에 문제가 있음을 알면서도 신앙을 타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양심이 깊이 찔린 그들은 예수님이 세금납부를 거부한다고 대놓고 예수님을 문제삼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다 오히려 자신들이 곤경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악 편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불안하며 진리 편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안전한 것인가를 깨닫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진리 편에 서서 당당한 길을 걸어 갈 수 있길 바랍니다. 논또한 국가나 정부와의 관계에 대하여 균형 잡힌 자세와 행동을 취할 수 있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국가권력과 통치를 통해 정의로운 질서를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국가가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면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권력을 정의를 억압하고 불의를 행하는데 사용하면 과감하게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고 필요하면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드리되 하나님이 것은 하나님에게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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