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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가자의 도 (고전 1: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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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신비는 성령의 지혜가 아니고는 풀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를 주제로 하는 복음의 핵심적인 도리는 일반적인 상식이나 과학적인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역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도”라는 말의 희랍어 “로고스”(λογος)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요 1:1). 그러니까 이 말은 “십자가의 말씀”, 또는 “십자가의 이야기”라고 표현할 수 있는 말입니다.

옛날부터 희랍인들은 지혜를 숭상하며 그것으로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웅변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십자가의 도”라고 할 때 이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지식이나 논리가 아닌 신비로운 의미의 로고스이며 그것이 바로 도(道)가 되고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십자가와 결부시키고 거기에다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2:2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17에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기독교 복음의 진수가 되는 십자가 의미와 그 신비로운 논리를 상고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I. 십자가의 의미

십자가는 기독교의 심벌(Symbol)입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어디에서든지 종족이나 언어나 종교나 문화가 다르더라도 십자가에 대한 아름다운 이미지(Image)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도 십자가 깃발이 있는 곳이면 서로가 생명을 아끼며 돌봐주는 인류애가 꽃피고 있습니다. 이토록 십자가는 사랑과 평화와 생명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1) 본래의 십자가

본래의 십자가는 흉악한 범죄자를 처형할 때 쓰는 사형도구입니다. 로마 사회에서는 살인자와 같은 흉악범과 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자를 십자가형으로 다스렸습니다. 또한 노예나 식민지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방법을 적용하였지만, 로마시민권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극형에 처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형틀은 지역에 따라 모양이 조금씩 다르기는 해도 대체로 수직으로 된 말뚝 위에 가로로 횡대를 만들고 그 위에 죄수를 매달거나 손과 발에 못을 박게 하였습니다.

사형수는 형장에까지 십자가를 메고 가서 그 위에 산채로 매어달리면 피와 기름이 다 빠지고 지쳐서 죽게 되는 가장 잔인한 방법의 사형제도였습니다. 1세기 후반 유대인 역사가인 조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팔레스틴에서는 이와 같은 십자가 처형이 일상적으로 자주 이루어졌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사람들뿐만 아니라 후세 사람들까지 십자가는 상상하기조차 싫을 만큼 몸서리치고 증오하는 대상이었습니다.

(2) 예수님의 십자가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은 성경의 예언대로 되어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3). 그것은 예수님을 향한 성부 하나님의 계획된 요구였습니다. 빌립보서 2:8에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십자가 고난과 죽음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적인 도리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지니는 의미를 말해줍니다. 곧 이름하여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일찍이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예언하면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하였습니다(사 53:5).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는 화목케 하는 도구입니다. 골로새서 1:20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3) 십자가의 상징성

어두움과 풍랑 속에 표류하던 배가 멀리서 비춰주는 등대의 불빛을 보고 안도하듯이 오늘날 세상살이에 피곤해진 인생들에게는 십자가의 깃발이 안위와 소망을 줍니다.
십자가의 마크는 예수님을 나타내는 기호로써 세계 어느 곳에서나 교회의 표시로 통용됩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정신을 따르는 기구나 단체들도 거의 모두 십자가의 도안을 로고에 넣어서 사용하는 것을 봅니다. 붉은색 십자가는 인종이나 정치나 종교에 구분 없이 인도주의 정신으로 사랑과 봉사활동을 펴는 곳이며, 청십자 녹십자의 마크는 병원의 표시로써 사람의 생명을 돌보는 기관임을 나타냅니다.
본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에게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인류에게 진정한 평화와 소망의 상징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기독교 복음의 진수를 십자가로 표시하며 이를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Ⅱ. 십자가와 성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죄 사함을 받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공로가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고 성도의 신분을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에베소서 2:16-17에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증거입니다.

365장 찬송시를 쓴 토마스 셰퍼드(Thomas Shepherd)는 ‘구레네 시몬만 십자가를 져야하고 성도들은 안 져도 되는가?'라는 반문을 하고 ‘저마다 제 몫의 십자가가 있나니 내 십자가도 거기에 있네’라고 가사를 썼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마 16:24).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기독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신앙고백을 하게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지키고 따라야 될 제자의 도(discipleship)를 의미심장하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0:38에는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십자가」라는 말은 내 몫에 태인 십자가라는 뜻입니다. 곧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다 자기에게 해당되는 십자가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십자가의 형태나 내용이 어떤 것이든 사람마다 지고가지 않으면 안 되는 십자가의 멍에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이거나 아니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와 연합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표증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 대하여 사도 바울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갈 6:14).

(2) 사명의 증거입니다.

누가복음 14:27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의 길을 따르는 사람에게 십자가로 표현되는 사명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처럼(마 26:42), 그의 뒤를 따르는 성도들에게도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의 십자가를 지라고 분부하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 2:21).

(3) 사랑의 증표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십자가야말로 주님 사랑의 증표가 됩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인간적인 사랑과 근본적으로 다른 성질을 가집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통상적인 사랑은 혈연관계이거나, 친구간의 우정이거나, 이성간의 애정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조건도 없는 가장 본질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아가페(αϒαπη)라고 부르는데 이를 희생적인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요한1서 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5:8에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마음속에 십자가를 간직하고 이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신표(信標)로써 더 없는 행복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Ⅲ. 십자가의 신비

본문 말씀 22-24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의 도가 지니는 신비로운 도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지성의 도시인 헬라의 아덴에서는 매사를 인간의 이성에 바탕을 두고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공감을 얻지 못할 때 이를 미련한 것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관한 도리도 그들이 내세우는 지식의 척도에서 볼 때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세계서는 이 도리를 빼놓고는 아무것도 성립될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이고 최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1) 사죄의 신비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가 없으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2:22, 24).

십자가의 신비는 조상 때부터 유전된 흉악한 죄를 씻어내고 사유함을 받게 하는 일입니다. 예레미야는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찌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렘 2:22). 이처럼 비눗물로나 잿물로도 씻을 수 없는 죄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해결되었으니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1:18-19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2) 화목의 신비입니다.

본래의 십자가는 죄와 형벌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상징이었습니다. 살인강도와 같은 흉악범을 다루는 잔인한 형틀 밑에서는 아무리 당연한 형벌을 받아도 뼈에 사무친 원한과 갈등의 앙금은 그대로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죄 없이 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모든 원한과 갈등을 해소하고 끝없는 평화와 화목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에베소서 2;14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고 하였으며, 16절에는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화평케 하는 도구입니다.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화목을 이루었고, 수평적으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도모하게 하였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았고 또 사람과 사람사이에 원수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 문제가 해결될 때 진정한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3) 구원의 신비입니다.

본문 말씀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의 도는 구원과 능력이라는 신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똑같은 십자가이지만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고 구원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지혜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24절). 이것을 가리켜 십자가의 양면성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를 두고 믿는 너희에게는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고 하였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벧전 2;7-8).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현장에서 같이 사형을 당한 두 강도의 경우에도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한편 강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비방하며 조롱하였으나, 다른 강도는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자기의 영혼을 의탁하여 구원의 약속을 받았습니다(눅 23:39-43). 이와 같은 십자가의 신비를 아는 사람은 이를 보배처럼 귀하게 여기며 자랑스럽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17에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하였습니다.  (황광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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