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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떠한 사람이기에 (마 8: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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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새배하면서도 복 주시는 분이 누군지 잘 생각하는 구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순종하면 복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복의 내용에 대해 주의해서 잘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복이 불신자들이 생각하는 복과는 다른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순종을 통해 받는 참된 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려주는 측면이 있습니다. 새해에는 참으로 성경이 말하는 그런 복들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신 후에 서기관과 다른 제자 한명에게 제자의 바른 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때문에 약간 시간이 지체되었다가, 마침내 주님은 배에 오르셨고 제자들이 함께 쫓았습니다. 이 제자들은 고난도 각오했고 가정 문제에도 얽매이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좀 더 수준 있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배에 오를 때, 즉시 쫓을 만큼 순종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잘 순종했으니까 복을 받아야겠지요. 오히려 그들은 “큰 놀”과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는 상황을 만났습니다(24). 갈릴리 호수는 해수면보다 209m 낮습니다. 북쪽에는 만년설에 덮여 있는 해발 2759m의 헬몬산이 있고 남쪽에는 유대 사막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단 계곡을 따라 내려오던 북쪽에서 찬 공기와 남쪽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열풍의 영향으로 갑작스럽게 돌풍이 일곤 했습니다.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가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잘 가다가 갑자기 무시무시한 풍랑을 만나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죄로 말미암은 고난이 있음을 말하고 있지만(애 1:5), 모든 고난이 지은 죄 때문이라고는 말하지는 않습니다. 순종한 성도가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불순종한 죄인이 형통하기도 함을 인정합니다(잠 23:17). 오늘 본문도 순종한 제자들이 심각한 고난을 직면한 경우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순종하고도 환란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환란을 통해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기이한 복을 얻게 하십니다. 과연 제자들이 어떤 복을 얻었는지 말씀을 좀 더 살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24절을 보면, 폭풍이 불고 물결에 배가 덮이게 된 상황에서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모여드는 무리를 섬기시느라 얼마나 피곤하셨는지 폭풍 속에서도 깨어나실 줄 몰랐습니다. 일반적으로 리더십을 강의할 때, 탁월한 지도자의 깨어있는 자세를 많이 언급합니다. 추종자들이 고생하고 있을 때 더 아픈 마음으로 주님께 매달리는 지도자, 모두가 지쳐서 잠들어 있는 동안에서도 홀로 깨어서 기도하는 지도자는 매우 존경스럽습니다. 그런데 지도자의 평가를 그런 관점만으로 다룬다면, 예수님은 0점짜리 지도자라고 평가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탁월한 지도자라도 인간인 이상 피곤하면 쉬고 자야 됩니다. 인간이면서 인간 이상이 되려하는 것은 오히려 가식이며 욕망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참 인간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동시에 참 인간이신 그분의 ‘놀라운 평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요동치 않는 ‘내적 안정감’은 지도력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지도자에게 내적 안정감이 있을 때 당면한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하고 따르는 자들에게 평안을 줄 수 있습니다. 폭풍 속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예수님의 모습은 제자들의 모습과 사뭇 대조됩니다.

예수님을 깨우는 제자들의 내면은 어떠합니까?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25) 제자들은 뱃사람으로서의 지식과 지술을 총 동원해서 폭풍에 맞섰고, 젖 먹던 힘까지 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한계에 부딪쳤습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습니다. 곧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제자들은 배가 파선하기도 전에 이미 내적 안정감부터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배에 물이 가득하기 전에 마음에 두려움부터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마음이 침몰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우리의 인생 항해에서도 이렇게 될 때가 있습니다. 내 인생 망할 것 같은 두려움,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천 길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막막하기만 한데 도와줄 사람 아무도 없는 상황, 한 배를 타고 있는 가족이나 동료들조차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 있습니다.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 것 같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고, 도움을 요청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는 것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불신자들은 술을 마시고 고주망태가 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폭풍 속에서도 곤히 잠들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의 깨우자 금방 깨시고는 전혀 당황함이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26a) 사실 폭풍 속에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흔치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무서워하는 것을 문제시하셨습니다. 그 두려움이 적은 믿음의 이유로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평안하지 못했던 것은 다름 아닌 믿음의 차이였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믿음이 적은 자들’(올리고피스토이)이라는 표현을 ‘사물의 내면을 깨닫지 못하고 그 표면만을 보는 경우’에 자주 사용됩니다.

겉으로 보면 제자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그들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질병을 고치시는 능력의 주님과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의 능력을 이 상황에 적용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상황이 바뀌면 이전의 믿음을 전혀 적용하지 못하는 것이 적은 믿음입니다. 실력이 적은 학생이 응용력이 떨어지듯이, 믿음이 적은 그들도 응용력이 떨어집니다. 또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다면, 그 분께의 사명이 완수되기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이 일관성 있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적은 믿음은 이처럼 자신의 믿는 바에 대한 일관성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능력을 행하실 수 있는 지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는 없고, 단지 예수님이 행하신 표면적인 능력만 알고 있는 것도 적은 믿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병 고침과 상관이 없는 문제 앞에서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적은 믿음이 제자로서 마땅치 않는 모습임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죽을 만큼 두려워하며 호들갑떨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를 때 어느 정도 어려움을 각오합니다. 그런데 막상 생각 이상의 엄청난 어려움을 만날 때 당황하게 됩니다. 사실 어떤 위기들은 내 힘으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 해결해 주시도록 맡기고 주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해결할 수도 없는 위기의 상황을 붙들고 있으면, 내 마음에 믿음이 파선하기 시작합니다. 두려움에 침몰 당하게 됩니다. 마음이 정신없이 요동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문제는 모두 주님께 맡기고, 단지 나는 내 마음을 지키려고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도 폭풍은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폭풍을 잠잠케 하는 것은 주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두려움을 다스리는 것은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흔히 믿음이 적은 사람들은 내가 해야 할 것과 주님께서 해야 할 것을 바꿉니다. 

‘믿음이 적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불신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왜 하필 이런 일이 내게 닥치는가?’ ‘주님은 도대체 내 기도를 왜 안 들어주시는가?’ ‘예수 잘 안 믿는 사람도 형통하기만 하던데 나는 왜 이 모양인가?’하는 불신의 풍랑들이 마음에 마음대로 요동치도록 방치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갈 때까지 가도록 그냥 두지 말고 차단해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니 결코 나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건지실 것이다. 주님은 신실하시니 내 인생을 망하게 두지 않으시고 인도하실 것이다. 이전에 내가 체험한 주님의 능력은 이 문제도 능히 해결하실 수 있다’라는 식으로 적극적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보다 본질적인 것들을 생각하면서 표면적인 문제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믿음이 적음을 지적하셨다는 것은, 위기의 상황에 처해서도 우리가 좀 더 나은 상태의 믿음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제자들의 믿음 적음을 지적하신 후에 예수님은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 그 말씀 한 마디에 바다는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보고 제자들이 기이히 여기며 말했습니다.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27) 그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에 그들은 그런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의 본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삶에서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었습니다. 적은 믿음에서 큰 믿음으로 갈 수 있는 전환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어떤 분이신가를 바르게 알 때, 비로소 그 분의 능력을 다양하게 적용시킬 수 있는 응용력이 생깁니다. 이는 마치 원리를 알면 각종 응용문제를 풀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당장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보다 원리를 깨닫도록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원리만 터득하면 나머지 문제는 스스로 어렵지 않게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폭풍을 통해서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본질을 아는 지식을 얻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믿고 의지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순종으로 말미암아 받은 복은 단지 삶이 평안하고 윤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깨닫는 복이었습니다.

적은 믿음으로도 결코 침몰하지는 않지만, 그 믿음만으로는 요동할 수 있습니다. 폭풍 속에서도 요동하지 않을 믿음, 그러한 내적 안정감을 주는 것은 주님을 바르게 아는 지식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바르게 알 때, 우리는 요동치 않을 수 있고, 우리의 지식과 경험 내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을 아는 바른 지식은 평탄한 삶 가운데서는 좀처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주님 자체에 관심을 보이기까지 폭풍 속에 그냥 두시기도 하십니다.

올 한해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속에서 주님을 바르게 깨닫는 복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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