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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치유의 말씀 시리즈설교(3) - 오른손으로 붙들리라 (사 4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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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붙들고 있으면

아빠와 아들에 관련된 짧은 이야기 세 개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첫째 이야기는 목욕탕에서 생긴 일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유행한 유머긴 하지만 들어보세요. 공중목욕탕에서 아빠와 아들이 함께 목욕을 합니다. 아빠는 뜨거운 탕 속에 들어가 “어, 시원하다!”고 합니다. 어린 아들이 묻습니다. “아빠, 정말 시원해?” “그럼, 시원하고말고. 너도 한 번 들어와 봐!” 아들은 아빠의 말에 안심하고 탕 속에 들어갔다가 물이 뜨겁자 깜짝 놀라면서 뭐라고 말했을까요?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어!”

두 번째 이야기는 수영장에서 생긴 일입니다. 수영장에서 수영 못하는 아이가 아빠와 함께 수영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아빠는 어린 아들에게 수영을 가르치려고 아이 배를 손으로 받치고 물장구를 치게 합니다. 그런데 수영을 조금 배우는가 싶더니 아이는 어느새 제 키도 넘는 물속에서 첨벙첨벙 거리며 제법 물장구를 칩니다. 아빠가 살그머니 배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장구를 칩니다. 아빠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얘, 너 무섭지 않니? 그러다가 물에 빠지면 어떻게 하려구?” 그러자 아들은 아무 걱정 없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빠도 참 걱정도 팔자네요. 아빠가 옆에 서서 언제든지 도와줄 텐데 뭐가 걱정이예요?”

세 번째 이야기는 자전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은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아빠에게서 배울 때가 많습니다. 자전거를 가르치던 아빠는 처음에는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도록 아들 뒤에서 자전거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조금 익숙해졌다 싶었던지 아빠는 살그머니 뒤에서 자전거 잡은 손을 놓아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는 아빠가 넘어지지 않도록 뒤에서 자전거를 붙들고 있는 줄 알고 자신 있게 자전거를 몰고 갑니다. 그러다가 자전거를 혼자 타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이상의 세 가지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이 짧은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두려운 이유, 놀라는 이유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많은 두려움을 겪게 됩니다. 또 참 놀라기도 많이 놀랍니다. 어떤 때 제일 두렵고 어떤 때 제일 놀라게 됩니까?

물론 여러 가지가 두렵게 하고 놀라게 하지만 무엇보다 상대방이 너무 커 보이면, 상대적으로 내 능력이 너무 보잘것없어 보이면 두렵고 놀라게 됩니다. 골리앗을 본 이스라엘 군인들과 다윗의 형들은 그 엄청난 몸집과 무기만 보고도 놀라고 무서워 떱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앞에 가로막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여리고성을 보고 주눅이 듭니다. 오늘도 우리는 나를 짓누르고 고통스럽게 하며 절망케 하는 마귀 사탄의 권세가 너무도 크고 강해 보여서 두려워하며 놀랍니다. 오늘 내가 겪는 문제와 고민이 너무 큰데 나는 그 앞에서 너무나 연약하고 무능해 보여서,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도저히 없어 보여서 두렵고 놀라게 됩니다.

또한 한 번 실패하면 두려운 마음이 들게 됩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지요? 과거의 실패의 경험이, 과거의 아픈 경험이나 놀랐던 경험이 나를 짓눌러 더욱 두렵게 하고 놀라게 합니다. “나는 안 돼, 다 해봤는데 안 되잖아? 난 틀렸어.” 하며 스스로를 위축시킵니다. 사실 정말 무서운 것은 내 무능함이나 실패가 아닙니다. 이렇게 난 안 된다고 생각하는 패배의식이 더 무섭습니다. 이런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리는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또한 의지할 데가 없으면 두렵고 놀라게 됩니다. 꼬맹이 하나가 어깨를 쫙 펴고 동네를 활보하고 다니는 이유는 그 뒤에 덩치 크고 싸움 잘 하는 형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면 소위 ‘빽’이라고 부르는 뒷배가 필요하고 돈이나 지위도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하다못해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을 때도, 동사무소 가서 민원 처리할 때도 아는 사람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천지차이입니다. 그러니 믿을만한 사람이라도 있고 아니면 돈이라도 명예라도 있으면 얼마나 든든합니까? 그런데 이도 저도 다 없는 사람은 어찌해야 하나요? 믿을 것 하나 없고 의지할 바 하나 없는 무능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럴 때마다 우리는 좌절합니다. “남들은 누구 덕에 뭐 했다더라, 누구는 돈 있어서, 빽 있어서, 권세 있어서 어떻게 했다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절망과 한숨뿐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은 두려운 일, 놀랄 일만 가득할 뿐이지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 놀라지 말아야 할 이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 놀라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야할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아무리 내 앞에 있는 문제가 나를 짓누르는 고통이 크고 무서워보여도 두려워하지 말고, 내가 아무리 큰 실패를 경험했다 해도 무서워하지 말고, 아무리 믿을 것, 의지할 바 없는 존재라 해도 놀라지 말아야 할 이유 말입니다. 먼저 첫 번째 이유가 본문 8~9절에 나옵니다. 같이 읽습니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하나님은 우리를 한번 택하시면 싫어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서로 싫증나서 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물건을 사면 살 때는 너무 좋고 기쁘지만 세월이 지나면 어느새 싫증을 내게 됩니다. 저도 얼마 전 이사를 하면서 참 많은 물건을 버리고 왔습니다. 우리가 이사할 때마다 참 고민 많이 하는 것이 “이걸 버릴까 말까” 하는 것 아닙니까? 버리자니 아깝고 그냥 가지고 가자니 별로 쓸 일도 없고 짐만 될 것 같고 해서 말입니다. 며칠 전 제가 사는 아파트에서 이런 안내방송이 나왔습니다. “주민 여러분, 집에서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물건 있으면 다 가지고 나오십시오. 어려운 이웃 돕는 데 사용하겠습니다.” 그랬더니 주부들이 저마다 뭔가를 하나씩 가지고 나왔는데 그게 뭔지 아십니까? 다들 남편을 데리고 나왔더라는 것입니다. 부인들 보기에 남편이 집에서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것이었나 봅니다. 물론 농담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꼭 정색을 하면서 “정말이래? 정말 남편들 데리고 나왔데?” 하고 심각하게 묻는 분들이 있어 굳이 농담이라고 설명을 하고 넘어갑니다. 그렇습니다. 물건 뿐 아니라 내 남편도 내 아내도 처음 만나 결혼할 때는 너무도 소중하고 귀하더니 세월이 흐르면 어느새 서로의 소중함을 잃어버리고 소홀히 여기거나 귀찮게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서로 불편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서로를 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사람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얼마든지 서로에게 싫증을 내고 버리고, 심지어 하나님도 싫증난다고 버리는 일들이 일어나지만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왜? 하나님은 절대불변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상황이 조금만 바뀌어도 어느새 변해버리는 우리들, 카멜레온처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뀌고 처세술을 부리면서 신의나 믿음은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우리 하나님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아무리 상황이 바뀌어도 절대 변하지도 바뀌지도 않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라고 우리를 부르면서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즉 나를 불러내고 택하신 우리 하나님이 한번 나를 택하셨다면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싫증내거나 싫다고 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신데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한번 택하면 절대 버리지도 놓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붙들고 계시는데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그래서 두려워하지도 말고 놀라지도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붙들고 있는 오른손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렇게 변치 않는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이 나와 함께 하실 뿐 아니라 본문 10절에는 더욱 놀라운 다섯 가지의 약속이 나옵니다. 함께 읽어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분명 다섯 가지의 약속이 나오지요?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하나님입니다. 너의 하나님도 그들의 하나님도 아닌 나의 하나님이 되어서 나를 사랑하시고 지켜주시고 인도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나를 도와주리라.” 내가 힘이 들어 약해질 때 나를 굳세게 하고, 내가 지쳐 비틀거리고 쓰러질 때 나를 도와 붙들어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앞의 네 가지 약속도 귀하고 위로가 되지만 이 마지막 다섯 번째 약속이 가장 결정적으로 은혜를 주고 힘을 줍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를 붙들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오른손’은 어떤 의미일까요?

성경에서 오른쪽은 항상 올바르고 복된 방향을 뜻합니다. 오른쪽은 나를 변론해주거나 도와주는 사람이 서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오른손’이란 위엄과 권능과 영광과 명예를 뜻합니다. 그 오른손은 구원의 손이며, 정의의 손이며, 재능을 가진 손이며, 맹세하고 서약하고 선언할 때 사용하는 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겠다는 이 말씀은 하나님이 권능과 위엄과 능력의 손으로 나를 구원하고 돕고 지켜주시겠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떠한 실패, 좌절, 질병, 고통을 당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놀라지도 않을 수 있는 까닭은 이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손을 믿기 때문입니다. 마치 내 자전거 뒤에서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고 계신다고 믿는 아버지의 손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오른손은 그냥은 보이지 않는 손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어야만 보입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 이런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스크린에 비추어 준다). 여러분도 아마 한번 씩은 다 보셨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어느 사진사가 차를 타고 가면서 “제게 예수님 얼굴을 보여 주세요”라고 기도했답니다. 그러자 “들판을 촬영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지요? 그곳은 그냥 눈이 군데군데 녹은 들판이었습니다. 사진사는 음성에 순종하여 사진을 찍었고 집에 돌아와 현상해 보니 거기에는 예수님의 인자하신 모습이 잡혔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니면 누가 만들어낸 이야기인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이 사진이 진짜 예수님 얼굴이라고 믿으라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때 이 그림을 보면서 다른 친구들은 다 “야, 예수님 얼굴 맞다, 맞아.” 하는데 저는 아무리 뜯어봐도 희고 검은 얼룩으로 보이지 예수님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보이십니까? 제 친구들은 저에게 설명을 하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여기가 눈이고 여기가 수염이고...” 하지만 아무리 설명해도 제가 이해를 못하자 너무 답답해하더군요. 그런데 그 중 한 친구가 농담처럼 던진 한 마디가 제 가슴에 못을 박았습니다. “야, 이건 믿음이 있어야 보이는 거야!” 믿음이 있어야만 보인다니 그러면 나는 믿음이 없다는 말인가? 정말 그런가 싶어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요. 한편으로는 “하나님 나도 예수님 얼굴 좀 보게 믿음을 주세요.” 하고 얼마나 기도했는지요. 그러던 어느 날 이 그림을 보다가 갑자기 예수님이 얼굴이 확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거짓말처럼 너무도 갑자기, 그리고 분명하게 보이더군요. 그 때 얼마나 기쁘던지요. 여러분, 이제 보이십니까? 그래도 안 보이는 분은 믿음이 없는 사람인가요? 여러분,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림은 그냥 그림일 뿐 믿음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때 이 일을 겪으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믿음의 눈’입니다. 비록 이 그림이 믿음과 관계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림은 그림일 뿐이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눈을 가지고 보느냐 하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입니다. 믿음의 눈입니다. 엘리야의 눈이 그러했고 모세의 눈이, 다윗의 눈이, 예수님의 눈이 그러했고 사도 바울과 스데반 집사의 눈이 그러했습니다. 엘리야는 사람의 눈으로는 갈멜산에서 내 앞에 선 850명의 바알신 아세라신의 선지자만 보였지만 믿음의 눈, 영적인 눈으로 보니 내 뒤에서 나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강력한 손길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복음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는 그 순간에 믿음의 눈으로 하늘을 보니 하나님의 영광과 그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볼 수 있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고 웃으며 행복하게 돌에 맞아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도 나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오른손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일도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어떤 육신의 질병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어떤 고통스러운 문제가 있습니까? 지금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짐이 무겁고 힘듭니까? 이제 걱정 마십시오. 믿음의 눈을 떠서 내 손을 보면 분명히 나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오른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전능의 손이, 그 위대하신 손이 나를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려울 때, 힘들 때, 좌절하고 절망할 때, 짐이 무거울 때, 내 앞에 가로막고 있는 벽이 너무 높아 보일 때 주저하지 말고 외치십시오. 그런데 그냥 외치지 말고 내 손을 높이 드십시오. 어떤 손입니까? 그냥 손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붙들고 계신 손입니다. 나를 붙든 하나님의 오른손을 믿고 그 손을 들어 이렇게 외치십시오.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골리앗아, 남들은 네 몸집이 크고 무섭다고 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다! 너는 그 큰 몸집과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나를 붙들고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 너 골리앗아, 넘어질 찌어다!” 반드시 쓰러질 줄로 믿습니다. “내 앞에 서 있는 저 견고한 여리고성아, 내 손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무너질 찌어다!” 반드시 무너질 줄로 믿습니다. “나를 짓누르고 고통스럽게 하며 절망케 하는 마귀 사탄의 권세야! 내 힘이 아닌, 내 능력이 아닌, 내 손이 아닌, 나를 붙들고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갈 찌어다!” 반드시 물러갈 줄로 믿습니다. “현재 나를 붙들고 있는 모든 질병아, 실패와 절망아, 고민과 모든 문제들아, 나는 더 이상 너에게 붙잡히지 않겠다, 진정 나를 붙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 나를 붙드신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명하노니 물러갈 찌어다!” 물러갈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오른손 신앙입니다. 이 놀랍고도 강력한 오른손 신앙을 가짐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승리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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