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봉사에 입참하라 (민 4:21-28)

  • 잡초 잡초
  • 396
  • 0

첨부 1


서론
‘입참하라’는 단어는 오늘 읽은 본문에만 나옵니다. 입참하라는 것은 ‘들어와서 참여하라.’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6장 16절을 보게 되면 레위의 아들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레위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연치대로 이러하니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요” 레위는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서 셋째 아들입니다. 그러나 레위는 열두 지파중의 하나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다시피 요셉의 두 아들이 열두지파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레위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특별한 지파로 간주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장자를 죽이는 재앙을 내리실 때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는 죽이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이지 아니한 장자 대신에 레위인을 취한 것입니다. 민수기 3장 12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것이라” 하나님은 “레위인은 내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에게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제일 큰 은혜를 주신 아들은 고핫입니다. 그래서 고핫의 지파로부터 모세와 아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6장 20절을 보면 고핫의 아들이 아므람인데 이 아므람이 자기 아비의 누이, 다시 말하면 고모인데, 고모 요게벳을 취하여 아론과 모세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후에 아론과 모세는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게 되고 나머지 레위인들은 성막을 운반하는 짐꾼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레위지파를 하나님이 장자대신 취했다고 생각할 때에 이 레위지파는 오늘날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12장 23절을 볼 때에 교회를 가리켜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라고 했습니다. “The general assembly and the church of the firstborn” 교회는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입니다. 레위인들은 장자되신 하나님이 취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레위인의 사역과 하나님의 교회의 사역에는 일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의 세 아들 가운데서 특별히 고핫이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고핫 지파로부터 모세와 아론이 나오기도 했지만 고핫의 자손들은 특별히 운반할 때에도 중요한 성물을 운반을 했습니다. 법궤, 금촛대, 분향단, 금잔, 성소와 지성소에 있는 대단히 중요한 성물들을 운반하는 사명을 고핫 자손이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성물들은 고핫자손이 포장할 수도 없고 풀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아론의 아들들인 제사장들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만이 지성물을 해달의 가죽과 여러 가지 보자기로 포장할 수 있었습니다. 고핫 자손들은 그것을 막대기로 꿰어서 어깨에 맨 다음에 운반을 했던 것입니다. 성막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성물과 지성물들은 고핫자손이 운반했는데 그들은 어깨를 사용해서 운반을 했습니다.

그런데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들은 가치는 좀 떨어지지만 무게가 더 많이 나가는, 예를 들면 장막의 말뚝, 휘장을 운반했습니다. 이들은 직접 포장도 할 수 있고 풀 수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운반하는 것들은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게르손 자손에게는 수레가 두 대 지급이 되었고, 므라리 자손에게는 수레가 4개가 지급이 되어서 도합 여섯 개의 수레를 가지고 장막의 물건들을 운반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의 세 아들들 고핫과 게르손과 므라리는 짐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설교자들 가운데 스펄전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설교를 준비할 때에는 대지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눕니다. 그리고 각각의 대지가 분명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대지의 개념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을 스펄전 목사님은 어렸을 때 심부름을 다니면서 배웠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쌀하고 조하고 콩을 사와라” 해서 쌀가게에 가서 달라고 했더니 주인이 그것을 봉지 하나에 한꺼번에 넣어서 다 섞어서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잡곡밥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쌀 봉지 따로 콩 봉지 따로 조 봉지 따로 달라고 해서 샀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에도 쌀 봉지, 콩 봉지, 조 봉지로 나누어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민수기 4장의 이야기는 결국은 레위의 자손들이 짐을 지는 짐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첫째로 짐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고 두 번째로는 짐꾼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그 짐꾼에게 짐을 맡기신 하나님의 명령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성도들은 짐을 나누어져야 할 일꾼이다.

우리 성도들은 짐을 지는 짐꾼입니다. 우리가 짐꾼이라고 하면 업신여김을 받는 직업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공항에도 가면 짐 나르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성막에서 짐을 나르는 짐꾼들은 업신여길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들은 대단히 위대한 특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기쁨으로 행복함으로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행진을 할 때에 짐이 없는 사람은 처음에는 기분이 좋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생에 아무런 질 짐이 없는 사람은 한동안은 행복하겠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요사이에 유행하는 말이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입니다. 삼팔선은 서른여덟살이되면 정년퇴임의 선을 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오정은 사십오세가 되면 정년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오륙도는 오십육세까지 일하는 사람은 ‘도선생’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사십대에 벌써 백수가 되었다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짊어질 짐이 없는 인생은 행복한 것이 아니라 괴로운 것입니다. 휴가를 가보면 알지만 사람이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은 행복해도 보름만 넘어가면 쉬는 것도 괴로운 일입니다. 더구나 노는 것은 더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에 뭔가 질 짐이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인줄 믿으시기바랍니다.

첫째, 우리 성도들이 지는 짐은 다양합니다. 고핫 자손이 져야 될 짐이 다르고 게르손 자손이 질 짐이 다릅니다. 그리고 므라리 자손이 질 짐이 다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이동할 때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따라서 통일성 있게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각각 지고 있는 짐들은 다 다른 짐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짐을 질 도구가 없어서 짐을 못 지겠습니다.” 라고 핑계 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고핫 자손은 어깨를 가지고 짐을 졌기 때문입니다. 어깨도 없는 사람 있으십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서 지고 있는 짐은 무엇입니까? 교회 일은 한 두 사람이 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에 보면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나와 있습니다. 교회가 서로 짐을 지고 서로 사랑하려면 짐을 나누어 져야 됩니다. 여러분 갈라디아서 6장 5절에도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짐을 주실 때에 “하나님, 나에게 왜 이런 짐을 주십니까? 나는 질 수 없습니다” 이런 말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입니까? 짐이 없는 것이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짐을 지는 것이 행복인 것입니다. 이제 해가 바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 가운데 지고 있는 짐을 바꿀 분도 계십니다. 또 지고 있는 짐을 벗을 분도 계십니다. 또 안 지던 짐을 새로 져야할 분도 계십니다. 그럴 때 여러분, “나는 못합니다.” 라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깨가 없으십니까? 왜 못 지십니까? “하나님이 시키시니 내가 순종하겠습니다” 하고 짐을 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타고 들어가신 것이 나귀 새끼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가장 신기한 스토리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가져오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주인에게 뭐라고 말하고 나귀를 데리고 올까요?” 라고 묻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이 한마디를 하셨습니다. 그 때에 그 나귀 주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습니다. “당신들의 주가 누구인데 나귀를 달라고 하시오? 이 나귀가 얼마인줄 아시오?” 이렇게 묻지 않았습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는 한 마디에 나귀를 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귀를 타고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주인은 물론이고 나귀는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그런 스토리가 마태복음 21장 3절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2006년에는 주님이 “내가 네 어깨를 좀 써야겠다.” 하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 여기 있으니 쓰십시오.”라고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네가 네 팔을 좀 써야 되겠다.”, “내가 네 다리 좀 써야 되겠다.” 할 때에 주님께 기꺼이 내어 드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우리는 주님을 위한 짐을 져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지는 짐은 두 종류입니다. 첫째는 세상짐 죄짐이고, 둘째로는 주님이 주시는 짐입니다. 사람은 어차피 짐 없이 다닐 수는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짐을 지든지 주님이 주시는 짐을 지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세상 짐은 ‘weary and heavy burden’ 입니다. 피곤하고 무거운 짐입니다. 세상 짐도 피곤하고 무거운 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세상 짐을 내려놓고 내가 네게 주는 그 짐을 져라” 하십니다. 주님도 우리에게 짐을 주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짐은 어려운 듯 하면서 쉽고 무거운 듯 하면서 가벼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세상 짐 지지 마시고 주님이 주시는 짐을 지고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레위인들은 세상 짐과는 무관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뭐 다른 족속의 텐트를 움직입니까? 그들은 오로지 장막만 움직이는 짐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무슨 사업을 하든지, 무슨 직장생활을 하든지, 주의 사역을 하든지, 우리가 지고 있는 짐은 결국은 주님을 위한 짐입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할 것입니다. 위대한 칼빈은 우리 성도들의 직업을 ‘직업소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 할 수 없이 한다” 이렇게 말하지 말고 “이것은 하나님이 내 어깨에 맡겨주신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직장일도 하시고, 가정일도 하시고, 교회일도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무슨 일을 해도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이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현세 축복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먹어도 하나님, 마셔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가치관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참된 레위인이요 그 사람이 복된 사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도여러분, 주님을 위한 짐을 지십시오 세상 짐을 지고 가는 것은 무겁고 피곤한 것입니다. 주님이 지워 주시는 짐은 가볍고 쉬운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짐을 지고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우리의 짐은 하나님이 우리를 교육시키는 좋은 교육의 방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고핫 자손 가운데 법궤를 지고 간다고 하면 그 사람은 법궤에 대하여 연구할 것입니다. ‘저 법궤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저 법궤는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저 법궤를 포장할 때는 어떻게 하고 운반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게르손 자손 가운데 앙장(커튼)을 운반하는 사람은 ‘이 커튼은 길이가 얼마고 색깔이 무엇이고, 무게는 얼마나 나가고, 이 커튼은 어디에 놓아서 운반해야 하는가?’ 에 대한 전문가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의 어깨에 무슨 짐을 지워주시든 간에 그것은 교육의 과정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사역의 짐을 지든 고난의 짐을 지든 오해의 짐을 지든 핍박의 짐을 지든 간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짐을 통해서 우리 성도들을 교육하시는 교육의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어떤 짐을 지고 가든지 간에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지고 있는 이 짐을 통해서 나를 가르쳐 주옵소서 내가 이 짐을 통해서 영적인 성숙을 이루게 하여 주옵소서.”

2. 짐꾼은 하나님이 임명하셨다.

짐꾼들은 하나님이 임명하셨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짐꾼에 관해서도 우리는 세 가지 진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관심은 낮은자에게 있었습니다. 높은 사도들이나 높은 제사장들이나 높고 귀중한 직분자들만 생각하시고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낮은 짐꾼들, 짐을 지고 운반하는 짐꾼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생각하시고, 그들에게 이런 저런 할일을 지시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높은 자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낮은 자들에게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 나라에 높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대제사장들도 있고 바리새인도 있고 서기관도 있었습니다. 열심당원도 있고 사두개인도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성전을 장악하고 있었고 바리새인들은 회당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치도 장악하고 종교도 장악하고 있는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높은 사람들과 전혀 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일반 백성들, 평민들, 세
리, 죄인, 어부, 할 수 없어서 자기 몸을 팔아먹고 사는 창녀들과 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심령은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자랑할 것도 없고 내어 놓을 것도 없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더 진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더 사랑하시고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나라에는 너희 높은 사람들보다 오히려 세리와 창기가 먼저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 나는 약하고 무능하다고 좌절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약하고 무능하고 지친 사람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높고 강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약하다고 할 그 때에 함께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그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약할 그 때가 곧 강함이라’ 사람은 내가 강하다고 생각할 때에는 약한 존재입니다. 내가 강하다고 생각할 때부터 고꾸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는 약한 존재입니다. 무능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나는 피곤한 존재입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라고 고백할 그 때에 전능한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낮고 진실한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마음이 자고한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겸손하고 낮은 사람,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낮은 자와 함께 계십니다. 낮은 짐꾼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제사장을 통해서 짐꾼을 임명하셨습니다. “게르손 자손은 그 모든 일 곧 멜 것과 처리할 것에 아론과 그 아들들의 명대로 할 것이니 너희는 그들의 멜 짐을 그들에게 맡길 것이니라”(27절)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통해서 짐꾼을 임명하신다는 것이 바른 질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짐꾼들이 자기 마음대로 짐을 선택하고 마음대로 짐을 운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짐꾼에게는 제사장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만이 있을 뿐인 것입니다. 28절을 보겠습니다. “게르손 자손의 가족들이 회막에서 할 일이 이러하며 그들의 직무는 제사장 아론의 아들 이다말이 감독할찌니라.”

아론에게는 네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술이 취해서 다른 불로 분향을 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셋째아들인 엘르아살과 넷째 아들인 이다말이 제사장의 계보를 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게르손 자손이 짐을 싸고 운반할 때에 그것을 감독하는 사람이 막내아들인 이다말입니다. 아론의 막내아들입니다. 나이 어린 이다말이 게르손 자손의 모든 것을 지휘 감독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게르손 자손이 이다말에게 “어린 네가 무엇이라고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다말을 임명하시고, 이다말 제사장을 통해서 짐꾼들에게 사명을 각각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다말이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짐꾼들은 늘 순종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늘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짐꾼들에게는 일할 시간도 명백하게 명시가 되어 있습니다. “30세 이상으로 50세까지 회막봉사에 입참하여 일할 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23절)고 했습니다. 레위인들도 정년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50이면 은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레위인들의 일할 수 있는 연령이 점점 젊어지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20세에서 50세까지가 됩니다. 일꾼이 모자라면 시작연령이 낮춰지는 경향이 있지만 은퇴연령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레위인이라고 해서 “나는 평생 하겠다.”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레위인도 정한 시간 안에 봉사하고 은퇴하라고 했습니다.

3. 짐꾼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

세 번째 짐꾼을 향한 명령은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주시는 명령인 줄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짐꾼은 깨끗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정결케 하라 너는 이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케 하되 곧 속죄의 물로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로 그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게 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 또 그들로 수송아지 하나를 번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그 소제물로 취하게 하고 그 외에 너는 또 수송아지 하나를 속죄 제물로 취하고”(민 8:5-7) 레위인들이 짐을 지고 갈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깨끗한 것입니다. 깨끗하지 않으면 짐을 질 수 없는 것입니다. 몸도 속죄 제물로 깨끗이 씻고 옷도 빨고 그리고 몸에 터럭이 없도록 삭도로 미는 것입니다. 레위인들은 깨끗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되 더러운 영을 가지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거짓의 영이나 탐심의 영이나 더러운 영을 가지고 일을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악령들은 성도들에게도 들락날락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의 일을 할 때에는 더러운 악령들을 다 토해내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해서 일을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는 짐을 지는 자는 경외심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짐을 지는 사람이 경박한 자세를 가지고 일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도 술취해서 분향하다가 죽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지성물에 접근할 때에 그 생명을 보존하고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너희는 이같이 하여 아론과 그 아들들이 들어가서 각 사람에게 그 할일과 그 멜 것을 지휘할찌니라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 것은 죽을까 함이니라”(민 4:19-20)고 했습니다. 고핫 자손들이 지성물을 운반하는데 지성물에 호기심을 가지고 법궤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고 열어보고, 아론의 지팡이를 휘둘러도 보기도 하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이 모세가 받은 두 돌비인가?” 하고 만져보고 사진 찍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지성물을 경박하게 다루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경외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자세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무슨 사업을 하든지 “이것은 주님이 내게 주신 짐이다.” 하고 경건하고 성실하고 진실한 자세로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건들거리면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가정일도 성실해야 합니다. 교회일도 일단 맡으면 성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성실한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되 경외심을 가지고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로 짐을 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로 짐을 지는 사람은 전투정신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합니다. 주의 일은 전쟁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공사에 입참하라” “count serve”(와서 섬기라)고 되어 있지만 원래의 뜻은 ‘war the warfare’(전쟁에서 싸우라) 이런 뜻입니다. ‘봉사에 입참하라’는 것은 ‘전쟁에서 싸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막을 운반하는 것도 영적인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서 무엇을 하든지 이것은 전쟁입니다.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쟁을 하려면 적을 바로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적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사람들끼리 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사람은 우리와 인격도 다를 수 있습니다. 또 사람에게는 악령이 들락날락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진짜 적은 마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로 마귀를 상대로 싸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악령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워도 물러나지 말아야 합니다. 전쟁에 나가는 사람이 전쟁이 어렵다고 후퇴하면 되겠습니까?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
기를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우리는 약하지만 어깨에 짐을 지고 음부의 권세를 향해 나갑니다. 그러면 음부의 문이 견딜 수 없어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절대로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마귀는 패배한 존재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기도로 나가서 싸우고 믿음으로 싸우고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에서는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싸우면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하고는 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마귀가 좋아하는 짓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한 봉사는 영적인 전쟁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전투정신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는 즐겁게 일해야 합니다. 저는 강남중앙침례교회의 목사라는 짐이 작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 짐은 즐거운 짐입니다. 목사의 짐은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깨닫고 그것을 증거 하는데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짐을 주셔도 그 짐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같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일을 할 때에 즐겁게 해야 합니다. 짐을 지고 갈 때에 인상 쓰고 싸우며 간다면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감당할 능력과 기쁨을 다 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결론

어떤 폭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폭군이 일꾼에게 일년 동안 쇠사슬을 길게 만들라고 시켰습니다. 그래서 이 일꾼이 쇠사슬을 부지런히 만들었습니다. 고리를 만들어서 연결하고 또 연결해서 쇠사슬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폭군이 일년 뒤에 오더니 “쇠사슬이 짧다 일년을 더 만들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일년을 더 만들어서 더 길게 만들었습니다. 2년 뒤에 온 폭군은 그 쇠사슬을 받아들고서는 자기 신하에게 명령합니다. “이 쇠사슬로 만든 저놈을 묶어라 그리고 땅을 파서 그 사람을 집어넣어라.” 여러분 마귀는 그런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을 실컷 부려먹고 자기가 부려먹은
그 일로 그 사람을 묶어서 땅속에 파묻습니다. 그것이 마귀의 역사입니다. 평생 부려먹고 쇠사슬로 묶어서 펄펄 끓는 지옥 불에 던져 버리는 것이 마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를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마귀와는 통보도 하지 말고 단절해야 합니다. “마귀님 나 떠나겠습니다.” 하고 인사할 것 없습니다. 통보 없이 마귀와 단절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짐꾼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세상 짐을 지지 마시고 마귀 짐을 지지 마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짐을 지고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짐은 가볍고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자기의 짐을 잘 진자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