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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툼을 피하는 법 (창 26: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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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사회의 가장 뜨거운 화두는 양극화입니다.
물질적으로는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념적으로는 보수와 진보를 축으로 갈등을 겪습니다. 이것은 사회적인 국가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앞에 직면한 삶의 문제입니다. 많은 가정들이 서로 다툼으로 양극화되어 있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심지어 교회들조차도 서로 갈등하면서 양극화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갈등과 다툼을 어떻게 해결 할 수 있는가? 정치인들은 나름대로 해법을 찾고 있습니다. 경제인들은 나름대로 경제적인 논리로 해법을 찾고 있습니다.그러나 이런 삶의 양극화 문제가 결코 정치적으로 경제적인 논리로 풀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굳이 요즘쓰는 양극화라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삶에 갈등과 다툼은 항상 있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신앙의 양극화로 인한 어려움을 겪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같은 설날은 더욱 그렇습니다. 다른 종교의 사람들이나 불신자들과 대립하면서 믿음과 불신 믿음과 반대와 공격의 양극화 되는 삶의 현실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삶의 갈등과 다툼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살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삶의 극한 양극화 속에서 갈등과 다툼을 겪었던 한 사람이 소개됩니다. 바로 구약의 대표적인 족장인 이삭입니다. 이삭은 땅에서 큰 부자로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에서는 이삭을 “거부”라고 합니다.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았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이삭의 축복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강조합니다.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라고 합니다. 이삭이 농사를 지었는데 같은 땅에서 농사를 해도 이삭은 100배의 소출의 결실을 얻었습니다. 그것이 기술이 좋고 방법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복을 주심으로된 결과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삭의 집은 크게왕성하고 큰 부자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이삭이 부자가 되어 잘 되게 되자 찾아온 결과가 갈등과 다툼이었습니다.
이삭이 거주하던 동네가 그랄지역이었는데 그곳 사람들이 이삭에게 떠나누기를 요청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삭은 그 지역을 떠나게 됩니다. 이삭이 그랄에서 떠나 한 골짜기에 이르러 거기서 우물을 파고 다시 정착하려고 합니다. 어렵고 힘들게 우물을 파서 물을 얻어 정착하려고 할때에 이번에는 그랄의 목자들이 나타나서 ‘이 물은 우리 것이다’라고 하면서 빼앗습니다. 다툼이 일어나면 이삭이 양보하고 다른 우물을 팠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도 나타나 ‘우리것이다’라고 하면서 빼앗습니다. 사막의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우물은 절대 필요한 생존의 도구입니다. 그리고 그 우물을 파는 것도 힘이 들고 우물을 팠을때에 물이 나오는 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삭은 무려 우물을 7번이나 팠습니다. 이삭은 성경에서 그렇게 업적이 두드러진 일을 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족장들과 비교해서 이삭이 가장 많이 한 일이 있는데 바로 우물을 판 것입니다. 왜 그렇게 우물을 많이 팠습니까? 우물 때문에 갈등과 다품이 일어나면 주고 다시 파고 주고 다시 우물을 파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삭을 보면서 세상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다툼이 일어날 때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도전을 받습니다.

첫째는 관용해야 합니다.
여기 이삭이 많이 소유할 때 갈등이 일어납니다.
16절에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고 합니다. 이삭이 큰 부자가 되어 잘 살게 되자 사람들이 시기합니다. 이삭이 부자가 된 것이 도죽질을 한 것도 아니고 부정을 저지른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삭을 대면하고 있었던 그 지역의 사람들은 이삭이 크게 부자가 되자 그를 시기했습니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소유는 나쁜 것이다”“부자는 나쁜 사람들이다”라고 하는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오해와 시기심으로 인해서 부자를 증오하고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이삭을 부자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은도 내것이요 금도 내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면 부자들이 정직하게 돈을 번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 하면서 역정을 내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도 서로를 정죄할만큼 깨끗하고 바르다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의에 근거해서 함부로 남들의 소유와 그 삶의 결과들을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분명히 인정할 것은 하나님은 물질 소유 성공도 형통도 만드시고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은혜로 주시듯이 어떤 사람에데 물질의 부의 은혜도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왜 그 사람에게 그런 복을 주셨는지는 오직 하나님의 철저한 주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 것은 본문의 이삭이 부자가 벌때에 부정한 방법으로 세상적인 재테크로 돈은 모은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을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복주심의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일도 하지 않았는데 그가 가만히 앉아서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이삭이 농사를 짓는 즉 수고와 땀을 흘리는 것과 하나님의 위로부터 주시는 복이 함께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과 함께 한 블레셋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삭이 큰 부자가 되고 자기들은 그렇지 못한 것에서 “시기심”을 갖았습니다. 14절에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라고 합니다. 여기 갈등과 다툼의 원인은 ‘시기’라고 합니다. 시기심은 다른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미워하는 마음입니다..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높아지는 것을 분노하는 마음입니다. 이삭이 성공하자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을 시기하였습니다. 이 시기심은 갈등과 다툼을 일으키는 핵입니다.

4세기 교부였던 가이사랴의 바실에 의하면 ‘사람들의 영혼에 뿌리내린 시기심보다 해로운 악덕은 없다“라고 합니다.”시기는 그의 활력을 갉아먹고 결국 그를 다 태워 없애는 질병“ ”시기는 가장 미개한 형태의 증오’라고 합니다.
여기 이삭과 이방인들인 블레셋 사람들 사이에 왜 양극화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바로 시기심때문이었습니다. 우리보다 더 부자인 이삭 우리보다 더 성공한 이삭 우리보다 더 잘 되는 이삭이 미웠던 것입니다. 어쩌면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이 자기보다 더 잘 된 것이 불공평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들의 생각에 이삭이 많은 노동력을 확보하여 농사를 짓는 것이 보였다면 자기들에게 일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불공평한 세상이라고 느낄 것입니다. 만약에 이삭의 땅이 더 좋은 땅이라고 생각하엿다면 이삭과 같은 좋은 땅을 확복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수 잇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삭만 복을 주시고 자기들에게 복을 주시지 않은 하나님에 대해서 불공평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 불만을 터트리면서 시기하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모든 외적인 조건과 환경과 상황을 불공평하다고 판단합니다. 물론 그것들이 일면 타당성도 있습니다. 잘 사는 사람들이 더 부자가 되고 신분이 좋고 집안이 좋은 사람이 더 잘되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저는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시기심의 종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시기심이 있는 사람은 옷을 갉아먹는 좀벌레처럼 사람을 갉아먹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누군가를 비난하고 흉을 보고 그를 끓어내리려고 욕을 하는 죄를 지어 결국 스스로 파멸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시기심의 갈등과 다툼이 있을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삭은 시기심으로 인한 분노로 공격을 받을때 어떻게 합니까? 이삭은 잘못이 없고 문제가 없지만 그 갈등과 다툼을 피하여 조용히 그곳을 떠나갑니다. “내가 무얼 잘못했다고 너희들이 나한테 이러느냐” 맞받아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을 떠났습니다. 물론 대식구를 거느리고 한번 이사하는데는 많은 손해와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곳을 떠났습니다. 이삭은 모든 것을 관용한 것입니다. 다툼과 갈등을 이기는 비결은 먼저 관용하는 것입니다.

이땅에 오신 예수님은 양극화의 중심에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잘못해서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유대종교인들의 시기심때문이었습니다. 자기들보다 더 권세있고 인기가 좋은 예수님을 허용할 수 없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죄인의 누명을 씌우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였습니다. 그때 우리 주님은 자기를 공격하고 죽이는 저들을 맞밪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을 향해서 칼을 휘두르자 ‘이것까지 참으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칼”을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양극화의 문제는 우리 가정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 교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바로 우리들의 시기심같은 죄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좁은 마음 높은 마음 미워하는 마음들이 결국 시기심으로 나타나는 것이요 분노로 연결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삭은 관용했습니다. 그냥 포기하고 그냥 먼저 손해보고 먼저 양보하고 조용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선택했습니다.요셉은 비록 잘못은 없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판단한 것입니다. 여러분 관용이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축복을 받은 것도 의미가 있지만 그 축복을 어떻게 누리는가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내가 지금 영적인 복을 받은 사람입니까? 시기하고 미워하고 분노하는 사람에게 우리 주님의 용서와 넓은 마음을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물질의 복을 받았습니까? 조금 양보하고 손해보고 포기할 수 있는 넉넉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특별히 설날을 맞이해서 불신자의 여러분의 가족들과 부딪힐때에 먼저 관용하시기를 바랍니다. 물질의 복을 받았습니까? 조금 더 베풀고 나누고 주고 배풀어할 상황이있을때 우리가 함께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인내해야 합니다.
다툼이 있을때 가장 우리가 다스려야 할 부분은 바로 분노의 감정입니다.
이삭은 다툼이 있을때 화를 내지 않고 참습니다. 우물을 파놓으면 찾아와서 우리의 것이라고 빼앗습니다. 그러면 이삭은 다른 우물을 찾아 피하여 갔고 다시 우물을 파야 했습니다. 이삭이 많은 종을 거느린 지도자입니다. 이렇게 약하게 피하면서 화평을 추구하는 이삭을 향해서 어쩌면 종들은 이삭이 겁쟁이라고 뒤에서 수군거릴 수 있습니다.그러나 이삭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참고 또 참으면서 새우물을 팠습니다. 새로운 우물을 찾아서 계속해서 도전한 것은 바로 믿음의 인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툼이 있고 싸움이 있으면 포기하고 결국 원수와 대적자들에게 대해서 참고 또 참으면서 우물을 구하던 이삭은 결국 창26장 32절에 보면 세바라고 하는 곳에서 우물을 얻습니다. 마침내 방해받을 필요가 없는 새우물을 얻으면서 이삭은 풍성한 삶의 복을 얻습니다.

초대예루살렘 교회이후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가장 경건한 그리스도인들로 우리가 꼽으라고 한다면 청교도들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박해를 피해서 인내하면서 살다가 결국 미국으로 갔습니다. 물로 그곳에서도 많은 박해와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인내하면서 그들은 믿음으로 승리했습니다. 그들에게 한곁같은 신앙고백과 같은 모토가 있다고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그들은 서로를 만날때마다 이런 인사를 서로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직 않았습니다“.

성경의 이삭은 이땅에 오신 예수님을 가장 잘 보여주는 그림자이십니다. 이땅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갈등과 다툼의 양극화된 이 세상에서 가장 우리에게 본 보이신 것이 바로 인내이셧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경주를 하는 모든 주의 성도들을 향해서 이렇게 부탁합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얾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라고 합니다.

우리가 갈등과 다툼의 세상에서 날마다 살아갈 때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분노입니다. 우리가 억울하게 공격을 당하고 피해를 입을때에 얼마나 분노가 일어납니까? 사실 분노해야 할 상황에서 분노를 참을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분노할 때 그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분노”를 해결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화를 풀기 위해서 화를 적극적으로 발산하라고 합니다. 화가 나는 것이 본능이라고 그것을 그냥 푸는 것이 화를 해결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소변과 대변을 보고 싶다고 아무 자리나 가서 볼일을 본다고 가정하여 보십시오. 물론 어린아이들은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이 그렇게 아무데서나 소변을 보거나 대변을 보면 그 사람은 정신이 미숙한 사람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화가 난다고 아무데서나 화를 내는 사람은 마치 어린아이가 아무데서나 소변과 대변을 보는 것같이 미숙한 사람입니다. 비록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훈련을 통해서 소변과 대변을 화장실에서 보게 우리는 훈련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본능인 화도 훈련을 통해서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분노는 분명히 우리가 다스릴 수 있는 감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분노를 참을 수 있도록 하신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억울함과 힘든 것을 참을 수 있도록 새힘을 주십니다. 성경 잠16:32절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화가 나거 스트레스가 쌓일 때에 볼링을 치러간다고 합니다. 볼을 굴려 핀을 맞출때에 보기 싫은 사람을 생각하면서 공을 그 핀에 맞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이 쓰러져 스트라이크가 나면 마음에 스트레스가 풀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요 그런 해결방법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세상적인 방법입니다.

우선적으로 우리가 갈등의 세상에서 잘 참고 승리하려면 먼저 평상시에 마음을 잘 개발하여 놓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평상시에 잘 다듬고 가꾸어야 합니다. 여러분 마음은 마치 정원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합니다. 마음이 잘 다듬어져 길들여져 있으면 우리의 입술도 우리의 삶도 아름답습니다. 만약에 우리 마음 속에 화를 키우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도 화를 냅니다. 그러나 마음에 인내와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키운 사람은 그런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갈등과 화평의 세상 속에서 분노를 이기고 인내하기 위해서 말마다 바라보고 생각해야 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죄도 없으신데 공격하는 무리들과 사람들을 향해서 갖았던 마음이 무엇입니까? 바로 아비의 마음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 새가족들에게 반드시 하는 과정이 성향검사입니다. 그 성향검사를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의 자세가 부모의 마음씨를 갖고 있는가 성인의 마음씨인가 어린아이의 마음씨인가를 살펴봅니다. 또 부모의 마음씨도 비판적인 부모의 마음씨를 갖은 사람이 있고 양육적인 부모의 마음씨를 갖은 분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자유로운 어린아이의 마음씨를 갖은 분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양육적인 어린아이의 마음을 갖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씨 중에 정상적인 구조는 따뜻한 어버이의 마음씨가 제일 많은 사람들은 보통 정상적인 관계를 잘 하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어린아이의 마음씨가 많거나 이성을 앞세운 마음의 구조의 사람들은 보통 인내하기 보다는 자기 입장에서 손해가 오거나 아닌 것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공격하면서 좋지 않은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데 좋은 부모의 마음을 갖은 사람은 어려움이 오고 힘이 들어도 자기가 잘 참고 마음을 다스리고 이겨 냅니다.
아비의 마음으로 인내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마음은 바로 우리 주님을 닮은 마음입니다. 우리주님처런 아비의 마음으로 인내하시면서 삶의 다툼과 갈등을 이겨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오직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25절을 보면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고 합니다.

이삭이 하나님께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지금으로 말을 하면서 교회당을 세우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삭의 인생에서 단을 쌓았다는 것이 지금 비로서 처음 등장합니다. 이삭이 재산으로 인해서 시기를 받고 가는 곳마다 우물로 인해서 분쟁과 다툼을 겪고 나서 브엘세바에 이르러 비로서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이삭은 단을 쌓았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물분쟁으로 인해서 다툼을 갖고 힘들고 어려운 삶 속에서 전적인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하였습니다. 특히 이삭의 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이삭의 신앙을 감사의 신앙으로 일깨워주었습니다.

24절에 보십시오.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이삭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드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다툼과 분쟁을 넘어서 복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는 감사의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거기에 장막을 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종들이 거기서 우물을 파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 이삭의 순서를 보십시오. 먼저 제단을 쌓습니다. 다음에 장막을 쳐서 만듭니다.그리고 우물을 팝니다. 여기 순서를 보십시오. 제단과 장막과 우물입니다. 이삭은 다툼과 분쟁을 겪으면서 사람을 의지하고 중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으로 신앙이 바로 세워져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종종 세상에서 사람들과 생존권 때문에 다투고 분쟁을 겪으면서 마음이 황폐화되고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각다귀같은 인생으로 바뀌어질 위험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인생 속에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자꾸 짜증나고 다툼과 분쟁으로 계속되어질 때에 우리의 삶에 알게 모르게 원망이 찾아오고 부정적인 인생이 되어서 감사를 잃어버릴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삭은 사람들과의 다툼 속에서 사람을 너머 우리 인생 속에서 의지하고 좇아가야 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웃의 시기를 받고 있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삭처럼 하나님을 더욱 예배하고 찬송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종종 보면 사람들과 다툼과 분쟁을 겪으면서 그 앞에서는 화해하는 척 하고 뒤끝이 남아서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양보하고 손해보고 져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남아있는 상처 때문에 오히려 신앙의 마이너스가 되어 영적인 침체를 겪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툼과 분쟁을 경험하면서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는 단을 쌓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삭이 이렇게 감사의 제단을 쌓을 수 있엇던 것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영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아버지 아브라함은 가는곳마다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드렸던 사람입니다. 특별히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로 아버지의 사랑을 각별하게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아버지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던 모습을 보고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분쟁과 싸움의 세상에서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 단을 쌓는 모습을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과 어려울수록 더욱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의 자녀들로 세워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다툼과 싸움 속에서 어려운 인생살이를 겪었던 이삭의 이야기는 어떻게 결말이 납니까? 하나님이 결국은 이삭과 함께 있어을 복주시어 형통하게 하심으로 결국은 이삭을 거부햇던 사람들이 이삭을 찾아와서 오히려 머리를 숙이고 평화의 계약을 맺습니다.
이 한해는 우리모두가 다툼과 갈등을 넘어서 화해와 연합의 평화의 삶으로 하나님 앞에서 세워져가는 귀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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