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당신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살전 5:1~11)

  • 잡초 잡초
  • 303
  • 0

첨부 1


샤르니라는 한 프랑스인이 나폴레옹 황제에게 밉게 보여 감옥에 갇 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그는 친구들에게서 잊혀 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주 면회를 오던 가족들도 점점 멀어졌 습니다. 그는 너무나 쓸쓸했습니다.
그는 돌 조각으로 벽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
소망을 잃어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 바닥에 깔려 있던 돌 틈에서 푸른 싹 하나가 고개를 들고 나왔습니다.
샤르니는 간수가 매일 주는 물을 조금씩 남겨서 푸른 잎사귀에 부어주곤 했습니다.
그 싹은 마침내 꽃 봉오리가 생기더니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꽃이 었습니다.
그는 먼저 썼던 글을 지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썼 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신다."
소망이 생기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 옆방에 면회왔던 죄수의 딸이 이 감옥 안을 들여다보다가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감옥에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는 소문은 귀에서 귀로,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조세핀 여왕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여왕은 말했습니다.
"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는 이는 결코 나쁜 사람이 될 수가 없다."
그래서 황제에게 건의했습니다. 샤르니는 석방되었습니다.
샤르니는 감옥에서 핀 꽃을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생명이 다하기까지 가꾸었습니다.
소망은 생명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소망을 잃지 말고 전진하여야 합니다.
소망은 좋은 동역자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들을 가리켜 빛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빛의 아들들은 어두운 면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항상 밝은 곳만을 밝은 것만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과연 빛의 아들들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 다시한번 살펴보는 귀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먼저 살펴볼 것은 먼저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의 중요한 진리가 있다면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재림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을 가져다 주는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재림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기록된 데살로니가 전서가 다루는 중요한 문제가운데 하나가 바로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16절에 보면 주님의 재림을 영광스럽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재림하십니다. 반드시 재림하십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이 땅의 통치자로, 이 땅의 심판주로
그분은 분명히 재림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는 항상 이 의식을 가지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언제와? 이렇게 태평스러운데, 여기가 천국인데, 안오실꺼야?
혹시 이런 마음이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을 듣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분명히 오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읽었던 이 말씀 가운데에도 재림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들여다 보면 불신자, 즉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 예수 믿는 사람들의 재림이 전혀 다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에게 주님의 오심을 도적 같이 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해산의 고통이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오는 것 같이 다가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다시오심을 멸망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있어 재림은 멸망의 순간이요, 예측하고 준비하지 못하는 그 사이에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도적같이 오지 않고 그날은 즐거움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빛의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
빛의 아들들이기에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고 우리에게는 주님의 다시 오심이 밤에 홀연히 찾아 오는 도적과 같지 아니한다는 사실입니다.
낮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도적 쳐들어와도 쉽게 알아낼 수 있고 대비를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오심에 대해 대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몇 년 몇 월 며칟날 주님이 오신다. 이렇게는 알 수 없지만 주님이 오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으며 그 나라에 대해 대비할 수 있으며 대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를 어떻게 대비하며 살아갈 것입니까?

오늘 말씀에는 두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자지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육적인 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잠을 가리킵니다.
잠에 빠져 있는 사람은 누가 건들어도 쉽게 눈을 뜨지 못합니다. 어떠한 상황이 와도 전혀 감각이 없는 사람이 바로 잠을 자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자지 말라는 것은 무감각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각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감각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죄에 대한 문제도 감각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도 감각이 있는 자가 되어야 하고
성령께도 민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와 동행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민감해 질때에 우리는 자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두 번 째로 우리는 근신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7,8절을 비교해 보면 근신이라는 단어를 술취함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술취한 자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제대로 걷지 못한다는 것이죠,
바르게 가지 못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사람들, 즉 자제하지 못하는 것이 술취한 자들의 특징입니다.
근신이라는 단어는 그와 반대되는 말로 “술취하지 말고 맑은 정신을 가지라”
다른 성경에서는 이것을 자제하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근신이라는 말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한가지 목표만을 향하여 어떠한 유혹과 시험에도 자제할 줄 아는 삶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왜 그렇게 우리를 흔들리게 하는 것들이 많은지요.
어려움만이 유혹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힘든 것만이 시험이 아닌 것 같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를 편하게 하고, 오히려 우리에게 좋은 것은 가져다 주는 것이 시험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면 그만인데 그것이 나를 안주하게 만들고 그러한 여유로움과 풍요로움이 나를 바쁘게 만드는 것이 시험입니다.
나로하여금 신앙생활 가운데 분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생활에서 분주하게 만들어 오히려 교회를 등한시하고 신앙의 삶을 등한시하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야고보 사도는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약1:10). 즉 나에게 이러한 부를 허락하신 이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기에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의 제목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주위에는 우리의 생각에 따라서 우리를 향한, 우리를 자제하지 못하게하고 우리를 비틀거리게 하는 많은 유혹과 시험들이 존재합니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서 그러한 것들이 나에게 시험거리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근신해야할 것입니다.
  내 욕심을 채우려고 방종 가운데로 나를 몰아간다면 우리의 신앙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처럼 금방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대하며 전진해 나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 가운데 비틀거리며 넘어져서 잠이들어버리는, 술취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지 말고 근신합시다. 내 삶을 점검합시다.
모든 유혹과 시험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자제하고
목표를 향해서 전진해 나가는 우리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이제 내려놓읍시다.

이렇게 근신하며 나아갈 때에 이제는 우리의 삶에 채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8절입니다.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오늘 말씀 가운데 구원의 소망, 즉 소망을 나중에 말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의 주제가 재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근신하는 자들이 취해할 할 것은 믿음, 사랑 소망입니다.
믿음, 사랑, 소망은 빛의 자녀들의 삶의 원리입니다. 우리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원리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살아갑니까?
근신하기 위해서,
모든 유혹과 미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말씀이 기록된 데살로니가 전서 1장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었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너희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기억함이니
그렇습니다. 믿음, 사랑, 소망은 삶의 원동력입니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역사가 있는 믿음, 행함이 있는 믿음, 삶의 현장 가운데서 드러나는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수고하는 사랑,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 내 시간과 환경에 손해가 나는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가슴속에는 주를 향한 소망을 품으며 인내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내 삶에 충만할 때에 우리는 근신할 수있습니다. 자제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 나은 미래가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또 이 말씀을 보면 흉배와 투구로 군인들이 무장하는 무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군인들은 싸움도 잘 해야 하지만 잘 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당시의 로마 군인들은 적의 활이나 창으로부터 가슴을 보호하기 위해서 흉배(breastplate)를 붙였습니다. 주로 심장에 있는 가슴을 보호하기 위해서 누빈 가죽이나, 주조한 놋쇠로서 가슴에 흉배를 붙였습니다. 군인이 전쟁터에서 심장이 있는 가슴을 활이나 창으로 맞았다면 치명적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투구는 머리를 보호해 주는 중요한 군장(軍裝)입니다. 전쟁터에서 싸움하는 군인이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머리에 상처를 입게되면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군병들입니다. 철저히 무장해야만 할 것입니다. 자제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우리는 철저히 우리의 신앙의 무장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근신할 수 있으며 어떠한 적이 달려들어도 우리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안일한 신앙은 무너집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우면 가까울 수록 미혹하는 무리들은 더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끝까지 승리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노하심이 아닙니다. 우리가 패배하고 쓰러지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9절

한가지 더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나 하나만 무장하고, 나 하나만 단련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함께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할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는 이들 중에 근신하지 못하고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우리 같이 1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하라”

오늘 말씀에 보면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은 이미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며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교회를 이루어가고 있었습니까?
“권면하고”의 헬라어 “파라칼레이테”는 “충고하다”, “용기를 북돋우다”의 의미도 있으나,
본절에서는 '위로하다'의  뜻이 강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서로 권면해 주어야 합니다.
신앙의 경륜을 떠나서, 교회에 오래 다니고, 이제 막 들어왔고를 떠나서 우리는 서로 권면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주위를 둘러 보십시오.
무너져 내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위로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슬픔가운데 젖어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누가 가기를 기대하지 말고 여러분이 그들의 기대자가 되십시오.
먼저 가서 위로하십시오. 그들의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지체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손이요, 발이며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덕목이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덕을 세우다”라는 원래 “집을 세우다”의 뜻으로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도우라” 는 의미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우리는 함께 지어져 가야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어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안일주의에 빠져 살지 말고 서로의 성장을 위해 부단히 노력할것을 가르쳤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이며 그 사람의 신앙의 성장을 돕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이만큼 성장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사람도 신앙이 성장하기를 위해서 노력하고 기도하며 애쓰라는 것입니다.
덕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 쉬지 않고 노력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대하며 그의 나라가 임하기 까지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나라에 소망이 있다고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안일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 사랑, 소망을 품고 부단히 근신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이 교회이며, 우리는 함께 가야할 사람입니다.
내 옆의 형제가 슬픔가운데 있습니까? 위로하십시오.
그의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덕을 세우십시오.
이러한 모습이 빛의 아들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게 참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최창훈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