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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에 지치신 분들에게! (마 11:28-30, 사 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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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치유]라는 책을 쓴 “케이 아더”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상처받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실제적인 치유의 삶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좋은 책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위기의 시대요 갈등의 시대입니다. 현대인들의 위기와 갈등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자아정체성의 위기입니다. 둘째로 관계성의 위기입니다. 서로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습니다. 관계로 인하여 위기를 맞이하고 갈등으로 상처를 입습니다.

케이 아더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참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남편의 무관심과 구타로 인하여 가정은 별거하기에 이르렀고, 그 남편은 남편대로 받은 상처가 있어서 치유가 되지 않자 자살을 하고 맙니다. 별거중인 남편은 혼자 사는 것이 싫어서 아내에게 동정을 받으려고 전화를 합니다. “차라리 자살이라도 해야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죽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외롭고 고독하며 힘들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나를 좀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애원이기도 합니다. 마음에 생각을 그렇게 외적으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은 케이 아더는 매정한 말을 합니다. “죽고 싶으면 죽어요! 그래야 제가 당신의 유산을 상속받지요.”라고 매몰차게 말했습니다. 여인이 한을 품으면 무서운 것입니다.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을 품게 하지 마십니다. 우리나라 전설의 고향을 잘 아시지요! 한 품은 남자들이 있습니까? 한을 품은 사람들은 다 여자들입니다. 여인들이 날마다 부엌에서 가지고 노는 것이 무엇입니까? 칼입니다. 무섭습니다. 무도 내리치고, 고등어 머리, 갈치 몸도 내리칩니다. 남자들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미국 사람들 식사 할 때에 삼지창과 칼로 먹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사람은 어떻습니까? 젓가락 수저로 국물과 함께 마십니다. 얼마나 점잖고 부드럽습니까? 그래서 잔인성으로 말하면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미국사람들이 더 잔인함이 많습니다. 어쨌든지 남자들은 여인에게 한을 품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남편은 상처를 받기만 했지 그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프로이트는 그의 집단 심리학 이론 속에서 사이가 가까워 갈수록 미움도 자라나고 상처를 입게 된다고 했는데 쇼펜하우어의 우화 고슴도치 이야기를 인용하였습니다. 겨울날 아침이었습니다. 고슴도치 한 쌍은 추위에 떨며 지내다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데우기 위해서 몸을 마주했습니다. 그러나 몸을 가까이하면 할수록 몸에 돋친 수많은 가시가 서로를 찔러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몸에는 상처만 늘어날 뿐이었습니다. 고슴도치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몸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에 부딪쳐 상처를 입듯이 마음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입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성경은 상한 마음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1. 상처받은 마음은 무엇인가?

본문에서 주님은 이런 마음의 상처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수고라고 하는 말은 “너무 많은 일에 피곤하고 지친 상태”를 의미하고, “무거운 짐 진 자”라는 말은 “타인에 의해 무거운 짐을 진 채 계속해서 지쳐 있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란 말은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상처를 받고 지쳐 있는 상태에 놓인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선지는 말씀하기를 “마음이 상한 자, 포로 되고 갇힌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마음이 상한 자! 또는 포로 되고 갇힌 자라고 하는 말씀은 육은 물론이지만 영혼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처의 대부분이 마음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 슬픈 자, 위로, 희락, 근심 등의 단어들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사61:1,2)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다 마음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희락이 없습니다. 슬픔이 가득합니다. 위로가 없습니다. 근심의 검은 구름이 마음을 덮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이 상하였다는 말은 마음이 깨어졌다는 말입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깨어진 속에 무엇을 담으면 차겠습니까? 아무리 채워도 차지 않습니다. 돈으로 명예로, 학식으로 권력으로 쾌락으로도 아무리 채워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깨어진 마음, 상처 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상하면 곧 따라오는 것이 있는데 상한 마음은 결국 포로 된 마음으로! 포로 된 마음은 갇힌 마음으로 진전됩니다. 자신의 마음을 자신 스스로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앞에 불행이 도사리고 있게 됩니다.

2. 상처는 누가 치료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 의식이 발동합니다. 죄의식도 생기고, 수치감도 생기고, 열등감, 또는 분노와 증오와 미움이 생기기도 하고 좌절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자기 방어기제들을 사용합니다.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기도 하고, 다른 일로 보상을 받으려고 노력을 하기도 하고, 그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심리적인 작용들이 발생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현실을 도피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현상입니다. 결혼의 문제로, 이성과 교제 중에, 불안한 장래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고 우울해 질 수 있습니다. 부모의 폭력으로, 질병으로 인해, 신체적인 약점으로 인해, 인간관계의 스트레스로 마음이 깨질 수도 있습니다. 한 번 받은 상처가 잘 치유되지 않는다고 너무 낙심하고나 포기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이사야는 말씀하기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라고 하셨습니다.

상처받은 인생, 상처 받은 마음의 진정한 치료자는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마음 상한 자. 포로 된 자, 갇힌 자, 상하고 찧긴 영혼을 치료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상처를 주님께 내어 드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우상장사의 아들입니다. 그것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 상처를 드러내 놓습니다. 모세는 살인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에서 그 기사를 빼지 않습니다. 살인자라는 마음의 상처입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간음한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은 상처를 가질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상처가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상처를 주님께 내어 놓아야 합니다. 시41:3절에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마11:28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내게로 오면 쉬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성을 치료하시고 고쳐 낫게 하시며,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으로 내려 주신다고 렘33:6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 상한 자를 고쳐 주신다고 마11:28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독자를 잃고 상심해 있는 나인성 과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외동딸을 잃고 울고 있던 야이로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상하고 찢겨진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오라비를 잃고 울부짖고 있던 마르다, 마리아 자매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갇힌 자를 놓아주십니다. 포로 된 자를 자유케 하시는 분이십니다.(사61:1) 슬픔과 근심에 빠진 자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십니다. 사61:3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슬픈 자를 위로하시며 화관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쁨을 대신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근심대신에 찬송의 옷을 입혀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더 이상 슬퍼하고 근심하지 않도록 기뻐하며 찬송할 수 있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계21:4절에서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고 하셨으니 영원한 즐거움과 회복의 은혜를 내려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 이 복을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이 고달파 지친 여러분! 삶이 그대를 슬프게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 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우리 주님께 내어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치유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나의 아픔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아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에게 내어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상처로 울지 마세요. 주님을 바라보고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고 더 이상 근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찬송의 옷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상처를 치유 받으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상한 마음을 치유하기 위하여 주님을 배워야 합니다. 29절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주님을 배우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어찌 주님의 멍에가 가볍고 쉽겠습니까? 이것은 주님의 일이 쉽다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께서 새힘을 주시기에 얼마든지 감당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배우되 일하는 방법을 배우지 마시고 주님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배우면 주님 안에 있는 쉼이 나의 것이 되는 줄 믿습니다. 주님의 무엇을 배울까요?

첫째는 주님의 온유함을 배우십시오.

주님은 마음이 온유하십니다. 온유하신 주님은 우리가 온유하기를 원하십니다. 무섭고 사나운 사자나 호랑이는 멸종 위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온유한 양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단단한 이는 나이가 먹으면 빠져서 없어져 버리지만 부드러운 혀는 죽을 때까지 그대로 있습니다. 온유한 자 주에 온유한 자는 모세입니다. 민12: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온유하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1)온유함은 받아들임입니다.

모세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대적하여 문둥병자가 된 미리암을 위해서도 기도하며 그녀를 받아들였습니다. 내가 얼마나 온유한가는 내가 얼마나 사람을 받아드릴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에 의해서 왕위를 빼앗기고 피난을 갈 때 시므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저주했습니다. 그 후 다윗이 다시 왕위를 회복하여 돌아왔을 때 시므이를 용납하고 예루살렘에서 살게 해주었습니다. 사람의 그릇의 크기는 용납할 수 있는 한계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그릇이 크신 분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드리셨습니다.

2)온유함은 부드러움입니다.

모세는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과 한 번도 부딪힌 적이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모세는 부드러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부드러운 사람과 부딪히면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단단한 사람끼리 부딪히면 큰 소리가 나게 됩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내가 누군가와 부딪혀 소리가 난다면 둘이 다 단단하기 때문에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단단한 사람과 부딪힌다 해도 내가 부드러우면 소리가 나지 않는 법입니다. 내가 부드러운 사람이 되면 부딪혀도 소리는 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부드러워 지시기를 바랍니다. 온유함은 부드러움입니다. 이것이 주님 닮음입니다.

3)온유함은 길들여짐입니다.

사나운 말과 온유한 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기수에게 길들여짐의 차이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앞에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미디안 광야 40년의 훈련을 받고 난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길들여져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실 수 있었습니다.

둘째는 겸손함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친히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겸손한 주님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요13:1-15) 그렇다면 늘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들 앞에 나와 세상은 간 곳 없어지고 구속한 주님만 바라보실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쪼록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은 고통 중에 지나가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에 익숙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너무 많은 일에 피곤하고 지친 상태”이든, “타인에 의해 무거운 짐을 진 채 계속해서 지쳐 있든”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나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고 의지하시고, 그 분에게 나의 상처 된 마음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 모든 상처들이 치유함을 받고 영육 간에 강건함으로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윤정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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