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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시작합시다! (요 2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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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 오라 하시면서,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인생이 새롭게 시작되는 순간이었는데요, 주님의 초청에 모든 것 다 버리고 따라나섰던 베드로, 그 후로 3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하며 제자 수업을 받았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 거듭나기 위한 훈련 과정이었죠.

그러나 3년의 수련 기간이 무색하게도,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맙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주님을 따를 것이요,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였지만, 그는 자기 입으로, <나는 예수 따위는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상태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데 있었습니다. 회개와 반전의 기회 자체가 사라진 것이지요. 지난 3년 동안 주님께 칭찬도 받았고, 천국 열쇠도 받았고, 반석이라는 이름까지 받았던 베드로였지만, 한 순간의 실수로 그의 인생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는 고기 잡는 어부로 돌아가고 맙니다. 우리 주님, 3년 동안 그토록 공을 들여 저를 사랑하셨건만, 그러나 베드로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 인생의 시계를 3년 전으로 되돌려 놓고 말았던 것입니다. 왜? 자신의 실수와 잘못으로 주님 주신 새로운 비전 자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일에 실패한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을 하다 보면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아니, 실패를 통해 우린 더욱 큰 성공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실패 때문에, 그 실패로 인해, 아예 꿈과 비전을 포기하는 경우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진짜 실패는 비전 자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이제 그에겐 고기 잡는 일 이외에 그 어떤 비전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3년 동안 체험했던 기적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3년 동안 들었던 말씀도 아무 효력이 없었습니다. 3년 동안 만났던 제자들도 더 이상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랬습니다. 배신자, 비겁자, 실패자라는 이름 보다 더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의 가슴 속에서 꿈과 비전이 사라졌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1장에서, 우리는 가장 극적이고 가장 감동적인 반전 드라마를 보게 됩니다. 자기 발로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되돌아갔던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다시 <베드로>로 돌아오는 반전 드라마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누가 보아도 구제 불능의 상태에서 베드로는 주님을 다시 만나 잃었던 꿈과 비전을 회복하고,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은 복 중의 복인 줄 믿습니다. 다시 시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인생, 가장 안 된 인생입니다. 다시 시작할 용기가 없는 인생, 가장 불쌍한 인생입니다. 다시 시작할 꿈과 비전을 상실한 인생, 살았으나 이미 죽은 인생입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은, 주님의 축복, 맞습니다.

해서 오늘은 <다시 시작합시다!>라는 제목의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 말씀 통해, 베드로가 디베랴 바닷가에서 만났던 주님을 우리도 만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여 우리 동광의 하늘 가족들, 지난해의 실수와 실패 다 내려놓고, 주님과 함께 다시 시작하여 마침내 승리하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2
그러면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새 해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하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가장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기 자신의 실패를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말로도 변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결국 베드로는 스스로 죄책감을 해결하지 못하고, 과거로 도망치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을 주저앉히는 가장 고질적인 병, 그것은 주님을 향한 죄책감입니다. 나와 주님만 아는 나의 죄, 나 스스로도 용납하기 힘든 죄, 바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우린 다시 일어설 수 없습니다. 그 죄를 여전히 끌어안고 있는 한,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의 죄책감이 주님과의 만남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죄인들, 늘 이렇게 오해합니다. <이제 주님도 나 같은 죄인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실 거야, 이제 주님도 나 같은 죄인은 돌아보시지 않을 거야, 이젠 주님도 나 같은 죄인은 포기하셨을 거야!> 이건 오해일 뿐입니다.

우리 주님, 회개하는 심령의 모든 죄를 십자가의 은혜로 정결케 해 주십니다. 주님께 용서받지 못할 죄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용서의 은총, 우리가 부끄러운 과거를 내려놓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입니다.

해서 부활하신 주님, 고기나 잡으러 가겠다고 고향으로 도망간 베드로를 친히 찾아오십니다. 그리고는 밤새 고기 잡느라 지친 베드로를 위해 조반상까지 차려 놓으시고 주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십니다.

만약 우리네 같았으면 나를 배신한 제자를 만났을 때, 우선 따귀 한 대 올려붙이고, 분이 풀릴 때까지 그 죄를 추궁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네가 나에게 그럴 수 있느냐?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였거늘, 네가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지, 어디 말 좀 해 봐라! 이 삐리리야~!>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책망하시는 대신, 베드로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비난하는 대신 격려해 주셨습니다. 분노하시는 대신 사랑하셨습니다. <밤새 고기 잡느라 얼마나 수고했느냐? 이 새벽에 얼마나 춥고 배고프냐? 어서 와서 조반 먹자!> 그렇게 베드로는 감격 속에 주님을 다시 만납니다.

요한복음 21장 15절을 보니,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예수께서 대화를 시작하셨다는 뜻이지요, 이 대목에서 한 말씀 고하고 갑니다. 내 사랑하는 가족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그래도 밥은 잘 먹인 후에 대화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잖아도 죄책감에 고개도 들지 못하는 아이, 밥 먹는 시간도 기다리지 못해서, 숟가락 들기도 전에, 여러 말로 질책하고 꾸짖는 것,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선 밥은 잘 먹게 해 주시고, 그 다음에 대화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아침을 다 먹고 나자 우리 주님,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하십니다. 15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무슨 뜻인가? <내가 너를 베드로로 세웠는데, 지금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돌아가 있구나,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보자, 너 아직도 나를 사랑하느냐?>

그런데요, 그 다음 장면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베드로가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너 아직도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을 듣고 베드로 자신이 발견한 놀라운 사실, 내가 아직도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베드로의 눈엔 하염없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 똑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하십니다. 왜?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했었기 때문입니다. 해서 우리 주님, 세 번 사랑을 확인하며, 한 번에 한 번씩, 세 번 부인한 죄책감을 다 씻어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가슴 속에 죄책감이 남아 있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어떤 실패 앞에서도 과거로 도망가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잘못 앞에서도 주님을 피해 뒷걸음질 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나의 모든 실패와 잘못을 안고, 오히려 주님께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 모든 죄 사하여 주시고, 조반 먹여 주시며, 우리의 마음에 사랑의 불씨를 살려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빛으로, 힘차게 다시 시작하여, 꼭 승리하는 한 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2. 사랑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던 베드로, 그는 스스로 주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맙니다. 나 같은 죄인은 이제 주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다는 거지요. 이제 나는 사랑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 되었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내 마음 속 죄책감은 내 모든 사랑의 관계를 단절시켜 버립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로 타락한 이후, 하나님을 피하여 숨어들었던 것처럼, 이 세상의 죄인들, 다시는 사랑할 수 없다는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생각 속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사랑에 대한 기대 자체를 포기해 버리는 거죠.

그런데 우리 주님, 자기 자신도 포기해 버린 인생, 베드로에게 친히 찾아오시어, 변할 수 없는 사랑을 확증해 주십니다. <너와 나는 끊을 수 없는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 무엇으로 끊을 수 있느냐? 아니,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 우린 계속 사랑할 거야!> 확증해 주십니다.

그런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물으심 앞에, 놀랍게도 베드로의 가슴 속에 사라진 줄 알았던 사랑의 불씨가 되살아날 뿐 아니라, 이제 나도 사랑을 고백할 수 있다는 자신감까지 생깁니다. <아, 그래도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나도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구나, 지금 그 사랑을 고백해도 되는 거구나, 이제 다시 사랑할 수도 있는 거구나!>
그렇습니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선 먼저 사랑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사랑이 깨진 상태로는 아무 일도 다시 시작할 수 없습니다. 아니, 억지로 다시 시작한다 해도 그 일이 성공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선 사랑의 관계를 먼저 회복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셨듯이 우리 서로의 가슴 속 사랑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오셔서 베드로에게 물으신 것은 오직 한 가지, 사랑이었습니다.

<고기 많이 잡았느냐? 돈 많이 벌었느냐? 출세했느냐? 승진했느냐?> 등등의 세속적인 것들에 대해선 일체 언급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한 가지, 사랑만을 확인하셨습니다. 왜?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 그것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관계만 회복되면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설날입니다. 가족들과 친척들과 친지들, 그리고 우리 하늘 가족들 서로 만나, 오직 한 가지, 사랑만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언제 결혼하느냐? 언제 승진하느냐? 합격했느냐? 돈 많이 벌어 놓았느냐?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냐?> 이런 것 묻지 마시고, 그냥 사랑만 확증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입술로 고백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을 고백하고, 사랑을 회복한 그 자리에서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며, 마침내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3. 소명과 비전을 회복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21장 15절에서 17절까지의 대화를 보면, 아주 단순명료합니다. 예수님의 질문도 똑같고, 베드로의 대답도 똑같고, 그 다음 주시는 말씀도 똑같기 때문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그러면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고 다시 시작함에 있어서, 거쳐야 하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은혜로 죄의 문제를 청산하는 단계요, 둘째는 주님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단계요, 마지막 셋째는 새로운 소명과 비전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 제자로 사는 단계입니다. 해서 주신 말씀, 이젠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처음으로 주셨던 소명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전도의 사명이었지요.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 이번엔 어린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전도에 이어 양육의 사명을 주신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베드로가 받은 소명과 비전, 전도와 양육, 크게 둘이군요. 왜 그러셨을까? 전도도 중요하지만, 양육이 없는 전도는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도했으면 양육의 과정도 책임져야 합니다. 마치 한 아이를 출산하는 것으로 부모의 책임과 의무가 끝나지 않는 것과 같지요. 낳았으면 양육의 책임을 져야지요. 해서 주신 말씀, 사람을 전도한 후까지 책임지라는 겁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그런데 19절 맨 뒤를 보니, 우리 주님,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주셨던 명령과 같군요. 그런데 왜 다시 나를 따라오라 하실까요? 그것은 지금까진 나를 제대로 따라온 것 아니니, 이제부터 제대로 한번 따라와 보라는 거지요. 실패를 딛고 새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는 거지요. 해서 주신 말씀, 18절인데요, 다시 시작하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 21:18 / (읽기 )

이젠 혈기 그만 부리라는 거지요. 이젠 젊은이의 객기 그만 부리라는 거지요. 젊어서는 네 마음대로, 네 본능대로, 네 생각대로, 네 느낌대로 살았다만, 이제 늙어서는 하늘의 뜻을 따라 함께 가자는 거지요. 그만 욕심 부리고, 그만 움켜쥐고, 이젠 두 팔 벌려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한번 순종하며 살아보라는 거지요.

# 3
고기나 잡으러 가겠다던 패배자 베드로가 주님을 만나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죄책감을 털어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비전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하나님은 크게 들어 쓰셨고, 우리 교회사에 지지 않는 큰 별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세상 속으로 숨어들던 비겁자 베드로를 불러 세상을 변화 시키는 주님의 사도로 세워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동광교회를 사랑하시어, 지난 25년 동안 은혜와 사랑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제 스물다섯 돌을 맞는 우리 동광을 다시 부르시고, 새 소명과 비전을 주셨습니다. 이제 그 사랑과 비전을 품고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다시 시작하되, 이젠 이 땅의 어린 양을 먹이는 일에 더욱 집중하려고 합니다. 특히 길 잃은 어린 양, 버림받은 어린 양, 끼니를 걱정하는 어린 양, 숨고 싶고 죽고 싶은 어린 양들을 잘 먹이는 일에 더욱 헌신하려고 합니다.

비록 그 일이 우리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남이 우리에게 띠를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끌고 가는 일이라 하더라도, 용기를 내어 주님과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주께서 은혜로, 사랑으로, 빛으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장 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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