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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1) - 자기를 부인하는 삶의 평안과 기쁨 (눅 9: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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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보게 되면 혹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세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모두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다른 사람보다 옳은 것 같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 같습니다.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은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릇된 사람이고 그리고 내 생각에 맞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착각을 우리는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해서 과연 그가 옳은가 그른가를 생각해 보기 전에 이미 판단해 버리고, 그리고 나와 다르다라고 생각하면 틀렸다라고 이미 정죄해 버리는 이와 같은 조급한 세상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게 되면 내가 항상 바르고 내가 옳고 내가 언제나 우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우리들에게 어떤 기쁨과 마음의 평안함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나보다도 못하고 또 뿐만 아니라 형편없는 또한 기본도 되어있지 사람들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기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늘 나는 불합리한 세상 속에서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기본이 되지 못한 사람들과 살아가니 불행하고 불평이고 불만일 수밖에 없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나는 내가 가진 것만큼 인정받지 못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보다 못한데 인정받고 하니 나는 억울하고 다른 사람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으니 마음도 편할 리 없고 행복할리도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분명한 것은 내 생각이 맞고 내가 더 나은 것 같은데 별로 행복하지 못하니 억울하고 섭섭하고 따라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늘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다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세태 속에서 과연 우리 성도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도라는 명찰을 달고 있지만 그 성도라는 명찰이 이세상속에서 똑같은 사람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도라는 명찰이 외형뿐 아니라 삶의 실제적인 능력까지도 부여함으로 말미암아서 나 자신과 또 내 주변의 사람을 기쁘고 평안하게 만드는 실제적인 행복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우리는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늘 은혜를 받으려고 작정한 사람은 늘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늘 시험을 받으려고 작정한 사람은 늘 시험을 받게 된다라는 사실입니다. 행복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늘 행복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만사에 불행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삶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삶을 통해서 주님의 백성으로서의 지상생활을 시작하는 성도로서 과연 이 세상에서 조차 기쁨과 은혜로 살지 못한다면 어찌 하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이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 속에서 산다면 우리는 당연히 이 세상에서의 삶도 천국의 백성으로서 느끼는 기쁨과 은혜 속에 우리가 해야 될 사역을 이루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천국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입증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최소한 세상에서 행복하지 못한 성도는 천국에 가서 큰 행복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최소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해 가면서 기쁨으로 사는 사람이 결국은 주님의 나라에 이를 때 기쁨과 은혜 속에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행복이라는 것은 물질의 과다나 아니면 지위의 고하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기쁨 속에서 이 세상에서 조차 기쁨과 감사와 은혜와 만족 속에 주님의 은혜를 감격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 때문에 내가 기쁘고 다른 사람까지 기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을 심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죄악과 사람들의 오역에 대해서 심판의 메시지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병든 자를 치료하셨고 배고픈 자를 먹이셨고 귀신 들린 자를 쫒아주셨고 용서와 자유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을 가로막는 악한 영의 세력들에 대해서는 단호하셨지만 자신의 기호나 아니면 자신의 생각 때문에 다른 사람과 다투셨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과 대결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용서하셨고 인내하셨고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셨던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오늘 주님을 따르는 삶 십자가를 따르는 삶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추구하는 삶에 대한 은혜를 우리는 나누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성경을 보게 되면 곧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길을 가게 되며 주님의 십자가를 짐으로 부여받게 되는 영광의 자리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한 어부지만 결국 우리는 이 세상 끝까지 스스로와 싸워가며 나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는 것입니다. 참된 성도는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이룸으로 행복해지며 그 영적 행복과 생활에서의 행복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때 예수를 믿는 것은 짐이 아니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문제를 좀 더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첫 번째 꼭 생각할 일은 자기를 부인할 때 비로소 사람의 평안과 기쁨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라는 것은 자신의 바른 모습을 보는 삶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모습 앞에 내 모습을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고 그리고 내 자신의 누추한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나 자신을 부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함을 본 자만이 자신의 죄악을 볼 수 있습니다. 죄악을 본 사람만이 자신이 진심으로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라는 것을 우리는 느끼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축복과 은혜는 자신의 잘난 점을 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죄악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주님 앞에 회개함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모습 앞에 비추어지는 나의 누추한 모습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나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내가 가야할 길을 보게 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 속에 자신의 누추함과 더러움을 보게 됩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는 영적인 체험을 통해서 자기의 부정한 입술을 정케 하는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그때 이사야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보고 자시의 누추한 모습을 보았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게 되었고 그때 비로소 주님 앞에 가야할 길을 보게 되었고 그 길을 향하여 자원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나 자신의 죄악을 보면 낙심뿐 아니라 죄악을 씻기 위해 주님 앞에 간구하게 되고 그 죄악을 씻어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무엇이든지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정해주신 역사를 감당하고 싶은 마음의 소망과 기쁨과 은혜와 능력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내 자신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비로소 바른 인간관계를 가지고 삶의 바른 성취를 보게 됩니다. 내 자신의 더러움을 보니 다른 사람을 볼 때 오히려 감사하고 귀해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그는 더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우리는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내가 주님의 용서를 받았다면 그도 역시 용서를 받은 사람이니 우리는 그를 귀하게 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나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내 주장을 버리고 하나님의 길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사건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천국에 복음을 전파 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 주셨고 병든 자를 고쳐주셨고 자연을 정복하셨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가운데 주의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사람들에게 비난 받아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신성모독이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예수님이 신성모독일 수가 없고 그것은 억지 논리였던 것입니다. 억울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들의 손에 잡혀서 고초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셔야 했을까요? 그것은 합리적이지 못하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더 큰 은혜의 섭리에서 보면 그것이 옳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작은 구도에서 보면 불합리 하지만 큰 구도에서 보면 우리는 그것이 매우 합리적일 때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참 억울하지요? 힘들지요? 고통스럽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참고 인내하며 견딜 때가 있습니다.

제가 늘 요즘 기도해주는 일 가운데 하나가 군대 가기 전에 청년들이 옵니다. 혼자오기도 하고 또 부모님들과 더불어서 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몇 마디 권면해주고 또 학생들 청년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군대에 보내지 않습니까? 그때 제가 꼭 이런 말 가끔 합니다. 군대가면 억울한 일도 많이 당하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일도 많이 당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여러 가지도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을 참고 인내하는 것이 마음이 커지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큰 진보를 이루는 것이니 크게 자라서 오라라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마음을 불합리하다는 것도 때로는 좀 참아 보기도 하고 내가 견딜 수 없는 마음속에 울분이 일어날 때도 참아보며 또 때로는 인내하는 것을 통해서 그 당시에는 그것이 억울하고 불합리한 것이지만 지내놓고 보면 우리의 마음이 커지고 넓어지는 것입니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내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을 내가 겪어보며 인내할 때 우리의 그릇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전에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을 이제 용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나는 그것보다 더한데, 나는 그것보다 더 큰 일도 용납받고 용서받고 나는 이해받았는데 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 우리는 큰 그림 속에서 우리 자신의 삶의 모습을 그려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보다 더 큰 구도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봐야 합니다. 내 눈앞에 보이는 작은 현장 속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더 큰 하나님의 은혜의 구도를 보아야 합니다. 이러할 때 억울한 일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합당하고 감사하니 우리 삶에 평안과 기쁨이 옵니다.

세상에서 우리를 가장 크게 망가뜨리는 것은 억울함과 섭섭함이라는 감정입니다. 이것은 미숙한 감정의 대표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숙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죠? 억울한 일이 없어집니다. 섭섭한 일이 없어집니다. 분노하는 일이 없어집니다. 마음에 어떤 일이든지 평안과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지, 아직 미숙해서 그래. 내가 잘 이해 못하는 거 같아. 내가 좀더 기도해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좀더 기도해보면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거야’라고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도 믿고 다른 이에 대해서도 믿고 무엇보다 그것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잘못을 압니다. 그리고 감사함과 더불어 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얼른 고칠 것을 찾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숙되었을 때입니다. 심지어는 다른 이의 잘못을 볼 때 그러면 나 자신은 어떠한가 생각하여서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며 회개합니다. 자신을 부인하니 결국 우리 마음을 비우게 되고 우리의 모든 일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 됩니다.

따라서 이제는 내 마음의 욕심이 없어지니 어떤 낙심도 없고 어떤 절망감도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낙심하고 절망하는 이유가 뭐죠? 욕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욕심이 없어질 때 내 마음속에 탐욕이 없어질 때, 욕심이 없어지고 내 마음속에 실망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많은 진정한 구도자가 얻었던 평안과 기쁨이 그때 비로소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마음에 평안이 없다, 내 마음에 기쁨이 없다라는 이유가 뭡니까? 욕심이 많다라는 것 아닙니까? 집착이 많다라는 것 아닙니까? 우리에게 그릇된 추구함이 너무 많다라는 것이 아닙니까?
결국 내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라는 것은 외적인 요건에 만족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내부적인 삶의 정리와 정돈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나 자신을 부인할 때 우리는 비로소 평안을 누리게 되고 그것이 우리들에게 기쁨으로 오게 됩니다. 주님 앞에 나 자신을 내려놓을 때 평안이 옵니다. 주님 앞에 내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버림받지 않을 것이라는 평안이 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을 불편이 여기는 것은 언제든지 내 자리를 잃을까하는 이와 같은 불편 때문입니다. 또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다른 사람이 나를 떠나지 않을까라는 이와 같은 초조함 때문입니다. 내가 이 일을 이루지 못하면 나는 어떻게 살까라는 조급함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야 말로 참된 기쁨입니다. 인간이 주는 변화될 기쁨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입니다. 이 기쁨과 평안이 있을 때 우리는 참된 정서적 안정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부인하게 되면 먼저 욕심이 없어집니다. 섭섭함이 사라집니다. 억울함이 사라집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평안과 기쁨입니다. 나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면 늘 마음에 억울함과 분노와 섭섭함과 그리고 우리 삶에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불만의 요소들이 우리 안에서 늘 충돌하게 됩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시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할 때 내 자신이 부인되어지는 즉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때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여 나를 내려놓게 되고 따라서 나를 부인하게 되니 내 마음에 거치는 것이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얻을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기를 소원드립니다.

두 번째 자기 십자가를 질 때 고통 뿐 아니라 기쁨과 평안이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을 능가하는 기쁨이 있기에 우리에게 기쁨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그에게는 늘 고통만이 가득 찼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에는 복음을 전하는 기쁨이 있었기에 고통쯤은 능가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즉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함에는 그의 사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는 순간에도 그 마음에 평안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는 돌로 치는 사람 뒤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미리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와 있는 성도님들 예배의 의문 때문이 아니라 예배의 기쁨 때문에 나와 있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마음에 영적인 기쁨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아침에 우리 성가대 나오시는 분들을 보니까 아침에 일찍 채비하고 오실 때 얼마나 일찍 나오셨겠어요? 일찍 준비하러 오시는 분들을 보니까 그래도 씩씩하게 마음에 기쁨으로 오시는 것 같습니다. ‘아, 내가 왜 이렇게 성가대를 맡아서 이렇게 고생을 하러 오나’ 그런 생각 안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 앞에 쓰임 받고 내가 하나님 앞에 귀한 은혜를 이룰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감사하다고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전에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 같은데 새벽기도회를 드리고 있는데 어떤 한 분이 올라오셨어요. 기도를 부탁하셔서 기도해드렸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목사님 제가 오늘 이후로는 제 목소리로 목사님께 기도를 부탁드릴 수 없습니다.’ 목에 암이 생기셨는데 이 부분을 다 절개해내셔서 이제 수술이 끝나면 그 다음에는 말을 못하신다고 합니다. 참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이제 이분은 영원히 앞으로는 목소리를 내어서 말씀을 못하시는구나.’ 여러분 목소리 낼 수 있는 것 축복이죠? 여러분 우리가 내 의사를 내 목소리를 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가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 얼마나 큰 기쁨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고 즐거움일 때 우리들에게 영적인 참된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삶은 그렇게 애를 써도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기에는 거리가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실망하지 않고 주님 앞에 끊임없이 다가가는 우리의 시도가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믿음은 완벽한 주님을 향한 신뢰와 행위가 되지 못해도 불안정한 비척거리는 행위일지라도 주님 앞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와 같은 모습일지라도 주님 앞에 돌아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부족 속에서 주님 앞에 나와서도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주일에 이렇게 여러 번 설교를 하잖아요. 한번 두번 설교하는 것보다 여러 번 설교를 하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힘이 들겠지만 그 힘 드는 것 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이 있기 때문에 설교하는 것이겠죠. 저는 요즘 2부부터 가서 중고등부에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제 마음속에 어른 7000명 대신에 몇 명 안 되는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설교하는구나라는 마음이 전혀 안 들었습니다. 저는 무슨 생각이 드는가하면 ‘야, 이 아이들에게 말씀을 주면 이 아이들이 수십 년 동안 더 오래오래 생각할텐데’ 제가 학생들한테 얘기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목사님하고 더 오래오래 믿음 생활 할 거니까.’ 지금 이것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사람은 예배시간에 딴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저는 그래서 중고등부 학생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요. 그 아이들은 저하고 더 오래있을 사람이잖아요. 그렇죠? 아직도 이해가 안 되십니까? 저는 너무너무 마음이 기쁜 것 같아요.

우리의 삶 속에 편안한 것만 좋은 것도 아니고, 이리저리 계산해서 모으는 것이 크다 작다라는 것만 해서 기쁜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정말 우리들의 마음속에 평안을 주고 기쁨을 주는 영적인 안온을 주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고통만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해야 될 사명과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영적인 기쁨과 은총이 있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은 일이 아니라 그것은 기쁨이에요. 여러분 운동과 노동의 차이를 아시지 않습니까? 억지로 하면 노동이고 기뻐서 하면 운동입니다. 여러분 종교적인 의무 때문에라면 노동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기쁨 때문에 이 자리에 있다면 그것은 운동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늘 노동으로 지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운동으로 늘 새로운 생기를 얻는 이와 같은 성도들이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참 이상하더라고요. 전에 예비군 훈련은 받았는데, 저는 요새 예비군도 못 나갑니다. 나오지 말래요. 그런데 예비군훈련을 받으러 가는데 그날은 무슨 훈련을 하나 보니까 산에 등산을 하는 것입니다. 예비군 훈련으로, 산에 가서 등산을 하고 그 산위에 올라가서 도시락 먹고 그리고 내려오는 것이 그 예비군 훈련이더라고요. 등산하는 거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그것도 투덜대는 사람이 있어요. 아니 직장에서 ‘오늘 예비군 훈련 받습니다.’ 하고 정식으로 하루 휴가를 내주잖아요. 정식적으로 하루 휴가내서 좋은 등산하고 얼마나 좋습니까? 노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것도 훈련이라고 생각하니까 그것도 투덜대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뭐든지 억지로 하면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좋아도 억지로 하면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기쁠 때 우리는 아무리 힘들어도 그것은 즐거운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고통이 아니라 기쁨과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부인하는 순간 우리들에게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소원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주님을 위한 거룩한 부담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야, 괜한 부담을 또 갖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죠. ‘내가 힘과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지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얼마나 좋을까?’ 하는 우리 마음이 우리 가슴속에 있는 것 우리는 보지 않습니까? 또 내가 할 수 없는 것도 내가 능력을 만들어 주님 앞에 그 일을 이루어 드릴 때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라는 것을 우리는 보지 않습니까? 주님을 믿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기쁨일진데 우리는 새로운 영적인 성숙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비록 힘들고 피하고 싶지만 그것이 기쁨일 때 우리에게 큰 힘과 능력이 됩니다. 내 십자가를 지지 않고 피해가려고 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그것은 결국 나를 괴롭히게 됩니다. 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결국 주님이 져야 합니다. 내가 지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지고 가야 합니다. 내 마음 괴롭고 힘든 것 못 참으면 다른 사람이 결국 그 일을 전가받게 되고 주님이 전가받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내 십자가는 아무리 피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지지 않는 십자가는 영광의 십자가가 아니라 재앙의 십자가가 되어서 내게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광의 십자가를 질 것인가? 재앙의 십자가를 질 것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내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데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도 있고 그 십자가를 타고 가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늘 내가 해야 할 수고부터 보이고 내가 부담해야 될 것부터 보입니다. 다른 사람을 어떻게 활용하고 부리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전에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협력하고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어요. 왜냐하면 나를 드러내 보인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왜냐하면 나를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때로는 많은 사람이나 그가 행한 모든 일을 아는 사람은 벌써 그 상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유명한 사람 별로 좋아하지 마세요. 여러분 유명해지려고 별로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께 받을 상이 없습니다. 여러분 수고한 것을 모든 사람이 다 알아버린다면 하나님이 줄 상이 없잖아요. 정말 주님이 세상 사람에 안 알아줘서 찾아서 ‘너 세상 사람이 안 알아줬으니까 이 상은 네가 꼭 받아야 해.’라고 주님이 주셔야 하잖아요. 늘 말씀드리잖아요. 주님의 큰 손으로 축복하시게 하라 우리의 영광을 가리울 때 주님이 큰손으로 축복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은혜를 진실로 체험하게 되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힘들고 무거운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렵지만 기쁘고 감사한 것이 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늘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돼서 나를 감추려고 하고 드러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 늘 주님 앞에 죄송해하며 사람 앞에 죄송해하는 겸손이 생깁니다. 그리고 내가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만 해도 감사, 감격합니다. 내가 수고한 것은 잊어버리고 내가 이루지 못한 것만 마음이 안타까워서 늘 죄송한 생각이 듭니다. 마치 세리의 기도처럼 얼굴을 들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눈물 흘리며 기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타고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수고도 하고 열심도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수고와 열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까지 받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반복되다 보면 익숙해져서 급기야는 본인의 수고와 평가와 박수와 위로와 격려를 사람으로부터 받아야만 평안해집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세상에서 얻는 유익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서 세상에 얻을 유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십자가 때문에 이름도 나고, 십자가 때문에 명성도 얻고, 십자가 때문에 환호도 받고 십자가 때문에 사람들에게 수고했다는 말도 많이 듣습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타고 가는 것이 됩니다. 급기야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니 내 생각과 계획대로 되지 않으니 마치 세상에서 실패한 것처럼 섭섭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지는 것은 세상에서는 실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승리이고 성공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는 것 내가 주님의 일을 하면서 모든 것이 성공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어찌되겠습니까? 급기야는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고 평가해 주지 않고 위치에 세워지지 않고 내가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급기야는 낙심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인해 이 세상에서 영광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영광을 얻을 수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익지 않은 음식을 먹으면 배탈도 나고 맛도 없습니다. 십자가로 인해서 이 세상에서 영광을 얻으려고 하면 익지 않은 음식을 먹는 것과 똑같습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받는 영광은 이 세상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서 얻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늘 말씀드리죠. 오늘도 한번 따라서 합니다. ‘말씀에 절대 복종, 자기를 부인하자,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라, 헌신하고 잊어버리라.’ 여러분 헌신하고 잊어버리라는 것을 수없이 얘기하지만 헌신하고 잊어버리지 않으면 남는 것은 시험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내가 여기서 얼마나 수고했는데, 내가 여기서 얼마나 애를 썼는데.’라는 생각이 들면 그 순간 드는 것은 시험밖에 없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다른 사람은 결국 그 말을 들을 때 마음속에 실망밖에 들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늘 우리는 새로운 마음으로 나는 무익한 종이라 수고하고 애쓰다 ‘내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언제나 부족하구나’ 정말 수고하고 애쓴 사람은 자기가 수고하고 애쓴지 모릅니다. 어쩌다 한번 수고한 사람이 자기가 수고하고 애쓴 것이 생각난다고 우리는 늘 말씀드리잖아요. 자, 우리 한번 꼭 따라서 합시다. ‘일부터 배우지 말고 헌신부터 배웁시다. 일에 익숙해지지 말고 헌신에 익숙해집시다. 일 잘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헌신 잘하는 사람 됩시다.’ 헌신을 잘하는 사람은 자신이 수고하고도 수고한지 모릅니다. 늘 헌신을 하니까 헌신인지도 잘 몰라요. 당연한 것이고, 늘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참 이상해요.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회개하는 사람은 늘 회개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 같고 하나님 앞에 부족한 것 같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날마다 용서해주셨으니 날마다 마음에 기쁨이 넘칩니다. 그런데 내가 회개할 것도 없고 회개도 잘 안되고 그러니 하나님 앞에 용서 받은 것도 없고 기쁨과 감격과 감사도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늘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것입니다. 왜 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왜 내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왜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을까? 늘 이 마음만 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의인은 늘 자신이 부족해서 회개할 것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 죄인은 자신은 늘 잘하고 다른 사람이 부족해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처벌을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주의 은혜와 능력과 영광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한 가지 더 말씀드립니다. 주님을 따를 때 기쁨과 평안이 있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라는 것은 짐이 아니라 힘입니다. 나 자신을 부인하게 되고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내가 져야할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을 따를 때 우리들에게 기쁨과 평안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며 동시에 축복받은 우리들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셔서 축복해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여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짐이 되는가 힘이 되는가는 우리의 영적인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입니다. 축복을 축복으로 아는 것이 기쁨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무슨 생각하고 있어요? 세 가지로 말씀드릴께요? ‘아, 예배시간이 왜 이렇게 긴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두 번째는 ‘예배시간이 늘 짧어’ 라는 사람들, 세 번째는 예배시간이 긴지 짧은지도 모르고 하나님 앞에 은혜받기에 몰두해있는 사람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죠? 세 번째 사람이죠? 이렇게 말할 때 양심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사실 내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늘 무아지경이라는 말을 하죠?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는지도 모르면서 그 일 가운데 취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바로 주님 앞에 이렇게 취해있는 성도님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축복을 축복으로 아는 사람이 축복의 백성입니다. 이런 말 드릴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한테 100만원짜리나 1000만원짜리 수표를 줘 보세요. 아이들이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그것 쓸 수 있겠어요? 아이들이 100만원짜리, 1000만원짜리 수표를 가지고 슈퍼에서 쓸려고 해보십시오. 아이들이 쓸 수 있겠습니까? 은행에 가서 100만원짜리나 1000만원짜리 수표 넣고 애들이 이것 저금해주세요 하면 그 은행직원이 가만히 둘 것 같습니까? 애들이 훔쳐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는 그것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내가 왜 축복을 받지 못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내가 왜 축복을 못 받는가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아이한테는 천만원짜리, 일억원짜리 수표주면 그 아이가 그것을 쓸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보세요. 그 아이에게는 무용지물입니다.

내가 왜 축복을 받지 못하는가 생각해보세요. 내가 축복 받을만한 여건과 자격이 안됐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유용하게 사용될 사람들에게 주어졌을 때는 크게 유용이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축복 받을 만한 은혜의 상태와 그릇이 되어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 자신을 부인하고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을 때, 주님이 우리를 충분히 인정하실 때가 아닙니까? 그리고 주님의 축복을 축복으로 아는 이와 같은 때가 아닙니까? 아이 들은 그것을 보고 쓸데없어 이게 뭐야? 하고 버려요. 아이가 돈도 아니야 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필요없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의미가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큰 축복을 의미 없이 그냥 버린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을 누리지 못합니까?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욕심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를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우리는 누릴 수 있어야 하고 주님으로 인해 우리는 결국 새로운 은혜의 세계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전에는 누리지 못했던 은혜의 땅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내 영적인 상태가 과연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주님의 뜻을 이룬다는 것이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말씀을 전하는 것이 맞는 옷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는 것이 평안과 기쁨일 때 우리는 은혜의 옷을 입은 것입니다. 주님을 따를 때 우리는 평안과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주님 때문에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범죄할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간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내게 구원의 감격을 회복시켜주시옵소서.’ 자 따라서 해봅시다. 구원의 감격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여러분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고 계십니까?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셨습니까? 구원의 감격 속에 겨워하십니까? 우리가 구원의 감격 속에 겨워하면 인간적인 다른 모든 일이 그렇게 큰 일로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인간사의 모든 일들이 커 보입니까? 아니면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까? 구원의 감격 속에 취해서 별거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까?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아주 배부르게 밥을 먹었어요. 배부르게 밥을 먹었어요. 여러분들이 그런데 음식상을 또 하나 받았는데 여러 가지 많은 것이 있어요. 그게 맛있게 보이겠다. 좋아 보이겠다. 크게 보이겠다. 그렇게 보입니까? 아니면 관심도 없어요? 여러분 어떻겠습니까? 배가 보른 사람은 모든 것이 있어도 관심이 없습니다. 맛있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배가 부른데 뭐가 맛있어 보이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배고파 보세요. 뭐든지 맛있어 보이죠. 여러분 그런 얘기 많이 하잖아요. 배고플 때 슈퍼가면 뭐든지 다 산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배부른 뒤에 슈퍼가면 생각이 달라진다고요. 우리가 영적으로 충만하면 세상일이 별로 안 커 보입니다. 인간관계가 별로 크게 안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이 여러 가지 화나는 일도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지 않고 그냥 의연하게 가는 것입니다. 의연하게 가는 거예요. 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의연한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믿음 안에 큰 영적인 거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행복한 사람들에게 있어지는 가장 큰 특징은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기대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뭐죠?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오래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지라는 것은 내가 이룸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부여하심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의 축복은 내가 성취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할일이 뭐죠? 하나님이 부어주실 은혜의 그릇을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귀한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해 행복한 성도들 즉 나를 부인함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평안과 기쁨이 있는 성도님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최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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