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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박 넝쿨을 준비하신 하나님 (욘 4: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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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설날입니다. 지난 해 추석 때에도 주일과 겹쳤었는데, 이번 성 명절도 겹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모두가 함께 하는 예배에 불편할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아주 기념이 될 만한 그런 뜻깊은 주일을 맞았습니다. 옆사람과 새해 인사 나누기를 원합니다. "주안에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성도 여러분의 가정과 산업에 놀라운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복을 받아야 할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또한 복을 누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더 나아가 복의 근원의 자리에서 복을 나누어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이자 또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이 우리의 이기적인 삶의 이유 때문에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요단강이 단과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부터 시작되어 모든 이스라엘 민족의 생명의 젖줄같은 갈릴리 호수를 이루지만, 요단강으로 인하여 맑고 큰 호수가 되었기에 또 다시 요단강으로 흘려보내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받은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나누어 주는 것이 복의 근원인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귀하고 복된 명절 주일 아침에 저는 '박넝쿨을 준비하신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사명과 용기를 회복하여 니느웨로 달려가 원하시는 말씀을 하룻길 동안 선포했을 때, 니느웨 성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백성들이 회개의 삶을 결단한 것입니다. 경건의 삶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보였던 그들이었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기우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운동력이 있어 좌우의 날선 검과 같다고 하신 말씀이 실감나는 장면입니다.

니느웨의 영적 대각성 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백성들로 시작된 회개와 고백과 겸손과 눈물의 대각성운동은 결국 왕까지 동참하는 국가적인 운동으로 승화되기 시작되면서 상상치 못한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왕이 권위와 명예의 상징인 조복을 벗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지도자의 각성은 상상할 수 없는 영향을 많은 사람들에게 미치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평양에서 일어났던 영적대각성 운동이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부흥을 위해 먼저 회개하면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음을 고백한 지도자는 다름아닌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국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것은 한국민의 종교의식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원산에서 개최된 기도모임에서 감리교선교사 하디의 충격적인 고백이 영적 대각성의 물꼬를 트게 된 것입니다. 한국교회 부흥의 장애요인이 한국인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안일한 사역자세 때문이라는 고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자성운동은 원산에서 평양으로 이어져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새해 부흥성회에서 불씨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처음 부흥회가 열렸을 때는 성령의 역사와 충만한 은혜의 물결이 그들에게 임하지 않아 냉랭한 가운데 계속되던 부흥회는 길선주장로의 고백을 계기로 막힌 은혜의 물꼬가 트여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시대와 민족을 초월하여 회개와 각성없이는 부흥은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한국교회의 기독교인의 수가 20만명이 되지 않았는데, 부흥운동의 열정을 회복한 그들은 전도 목표로 놀랍게도 당시보다 5배가 넘는 1백만명으로 정한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 성도 1,000만은 그렇게 시작된 믿음의 결과요 결단의 열매임을 잊지말아야 할 것입니다. 시작은 언제나 첫 걸음 부터 이며, 시작은 언제나 한 사람 부터 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흥의 물꼬를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열어야겠다고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 내가 길선주장로가 되어야 하고, 내가 하디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이 바로 그 부흥역사의 주인공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흥된 교회, 부흥된 공동체에 슬그머니 편입되어 편안하게 신앙생활 하려고 하지 마세요. 최근 한국교회 성도들의 흐름은 염려되는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교인들이 문화센터 같은 역할을 하는 큰교회에 슬그머니 편입되어 거기서 누릴 수 있는 여러 가지 편의와 이익을 누리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규모가있는 교회마다 이런 교인들을 붙잡으려 안감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설을 늘리고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그들을 붙잡으려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분명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열 명이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백 명의 자원봉사자나 헌신자가 필요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바로 그 보이지 않는 헌신자가 나 자신이고자 하는 결단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되다고 하신 주님의 정신이 살아있는 교회일 때, 진정한 의미에서 그 교회는 건강한 교회요 살아있는 교회요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5절입니다."요나가 성에서 나가 그 성 동편에 앉되 그 자리에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오늘 이 요나는 바로 이 여러분 자신으로 그렇게 적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요나라는 단어가 들리면 바로 여러분 자신의 이름을 적용하시면 되겠습니다. 요나가, 누구가? 황목사가, 요나가, 누구가? 하선이가, 요나가, 누구가? 우리 김권사님이, 그렇게 적용을 해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요나란 말이 백 번 나와도 백 번 그렇게 적용을 하세요. 그래야 은혜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요나가 성에서 나갔습니다. 지금 요나가 나간 성, 니느웨는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요나가 하룻길동안 말씀을 선포했는데, 하나님이 부탁하신 메시지를 선포했는데 놀라운 일이 생겼잖아요.

왕으로부터 왕의 조복을 벗었습니다. 왕의 명예와 권위를 벗어던지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는 일이 생겼고, 그래서 제가 이 성의 심판의 문제가 바로 당신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라고 하는 고백이 시작되었습니다.

너도나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회개와 각성의 운동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지금 니느웨성은 회개운동과 부흥운동이 일어나는 엄청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 성에서 요나가 나갔다는 것입니다.

막 부흥하려고 하는데, 막 은혜가 충만하려고 그러는데 지금 각성운동이, 회개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 공동체에서 요나가 나갔다는 것입니다. 왜 나갔습니까? 사명의 자리에서 거기서 회개와 부흥운동의 물꼬를 틀면서 거기서 앞장서서 해나가야 할 요나가 왜 나갔습니까?

사명의 자리를 떠난 그 요나의 자리 그 사명의 자리를 떠난 요나의 이유는 다름이 아니고, 혈기 때문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감정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셔도 괜찮지만, 저 이방 니느웨 사람들에게 앗수르 민족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은 난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극단적인 민족주의입니다. 평상시에는 일본선교합시다. 평상시에는 중국선교합시다. 국가적으로 무슨 갈등이 생기면 그 일본놈들 싹쓸어 죽여야지. 일본이 매년 몇 밀리씩 가라앉는다는데, 한꺼번에 가라앉으면 좋을텐데, 이런 생각들이 막 물밀 듯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 직전에 일본선교, 중국선교 위의 모습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가 않아요.

민족적인 감정이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선교적인 비전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매년 8월달이 되면 끊임없이 반복되는 한일간의 민족감정, 우리는 그 때마다 신앙보다 감정에 앞서서 또 한마디 거들지는 않습니까?

독도가 중요합니까? 사람의 영혼이 중요합니다. 일본의 영혼이 중요해요? 독도가 중요해요? 독도문제가 생기면 또 우리는 감정으로 치닫지요. 신앙의 성숙함이라고 하는 것은 감정을 넘어설 때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모습인 줄 믿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도 늘 감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바로 요나의 모습입니다. 요나가 성전에서 나갔을 뿐만 아니라 그 성 동편에 앉았다고 그랬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사명자로 서서 뛰어서 일을 해도 부족한 하나님의 일꾼이 그냥 앉아서 구경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입니까? 퇴보하는 모습이지요. 그렇게 앉아서 구경하는 사람의 특징이 있어요. 언제나 과거 지양적인 고백을 하지요. 나도 옛날에는 열심히 했어. 나도 옛날에는 할렐루야찬양대 했다니까, 나도 옛날에 교회학교 교사 했어.

옛날에는 청년회장을 시원찮은 그런 사람들만 시켰는지, 나도 옛날에는 청년회 회장 했다니까 꼭 과거 지양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뭐예요? 현재 부끄러운 현재의 현주소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앉아서 비판하고, 과거만은 들먹이면서 헌신의 자리에 있던 사람이 이런 저런 이유로 헌신의 자리를 떠나서 앉아서 구경하겠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짓고 있습니까? 자기를 위해서.... 이제는 좀 실속 좀 차려야지. 내가 처음에는 멋 모를 때는 물불 안 가리고 일 했는데, 이제 보니까 물불 좀 가려야지. 실속 좀 차려야지.

여러분. 주님의 일 할 때 물불 안 가리고 시간, 물질 가리지 않고, 헌신하던 모습이 아름다운 것입니까? 헌신 몇 년 해 보니까 꾀가 생겨가지고, 갈 데 안 갈 데 여기 가면 손해, 저기 가면 이익 골라가면서 다니는 사람이 지혜로운 것입니까? 누구를 따라서 배워야 합니까?

처음에는 새벽기도, 주일 저녁, 수요일 다 나오다가 조금 보니까 안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요. 목사님, 전 얼마나 나와야 수요일날 안 나와도 됩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새신자에게 누구를 따라가야 한다고 말해야 합니까? 당신도 한 3년 다니면 수요일날 안 다녀도 돼. 그렇게 말할 것입니까?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헌신의 자리에서 퇴보해서 앉아있겠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는데, 바로 그 주인공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요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누구라고요? 황목사입니다. 성이 또 별난 성을 대면 금방 알아 들으니까 흔한 성을 대야지요. 김권사님. 진권사님이라고 하면 금방 알아 듣잖아요.

그러면서 요나가 취한 태도가 뭐예요? 그 성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함이라. 구경좀 하겠다는 거예요. 이제는 구경 좀 하겠다는 것입니다. 잘 들 해봐. 나도 좀 구경 할게. 나도 예전에는 다 했어. 제일 교회에서 골치 아픈 존재가 옛날에 다 해 봤다는 사람들, 그리고 앉아서 구경하겠다고 하는 구경꾼들이 제일 문제지요.

교회성장학자 맥거브란(Donald A.McGavran)라는 분이 교회 최대의 적이 바로 요나와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좀 앉아서 구경해야 되겠어. 앉아서 평가 좀 해야 되겠어. 김권사, 박권사 이렇게 하는 거 아냐. 저렇게 해야 하는 거야. 참견좀 해야 되겠다고 하는 교회 성장의 암적인 요소들입니다.

암적인 요소는 밖에 있지 않습니다. 동에서, 구청에서 교회 성장하는 것 방해 놓습니까? 아니잖아요. 오늘 우리는 이 요나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구경하려고, 일꾼의 위치에서 이제는 구경꾼의 위치로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이제는 침륜의 자리로 자기의 자리를 옮겨 버렸습니다.

제임스 엠브로스라고 하는 분은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순종하면서도 마지못해 순종하거나, 불평하면서 순종하면 지금 불순종하는 것이 나을 것이 없다. 아, 무슨 일 하다보면 불평하면서 하는 사람이 있지요. 나오라면 나오긴 했는데 막 바쁜 데 나오라고 그랬다고 막 불평하면서 뭐 하는 사람이 있지요?

그런 사람들은 안 오는 사람보다 못 하다는 거지요. 왜? 온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니까 차라리 안 오면 그런 이야기는 듣지 않잖아요. 이왕 주님의 일 하시려면 기쁨으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마지못해 주님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건 마치 독을 마시는 것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일꾼의 자리에서 구경꾼의 자리로, 감사와 사명의 자리에서 불평과 불만의 자리에 와 있는 이 요나는 위해서 6절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박넝쿨이 어떤 것인지 기억이 나십니까?

나이가 많으신 분들은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우리 학생들은 박넝쿨이 무얼까? 옛날에는 물 뜨는 바가지라고 할 수 있는 박이라고 하는 호박과 비슷한 그러나 호박은 삶아서 먹지만, 박은 반을 쪼개서 속에 있는 것은 끄집어 내고, 그늘에 말리면 딱딱하게 표피가 굳어서 물을 뜨는, 쌀을 뜨는 음식을 담아두는 그런 것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박이 주로 옛날 초가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다 덮는데, 거기에 박이 둥그렇게 열립니다. 박도 크지만, 그 박넝쿨에 달려있는 잎사귀도 굉장히 큽니다. 우리 어릴 때는 놀 때 호박잎이나 박넝쿨 잎을 하나 따면 여름 더울 때, 비가 조금씩 올 때는 머리에 쓰면 머리를 가릴 정도로 박넝쿨의 잎사귀는 호박잎사귀가 굉장히 넓습니다.

그 양쪽 잎과 끝 사이를 자르면 조롱이 되어가지고, 개울가에 물이 조금씩 흘러 내리는데, 그것을 대고 흙으로 잘 해서 박 넝쿨을 잘 대면 물이 조옥 해서 폭포처럼 떨어지고, 물레방아를 만들면 물레방아가 돌아갑니다. 그런 놀이도 여름이면 한 번씩 하는 거지요.

이 박넝쿨을 주님께서 요나를 위해서 만드셨습니다. 지금 산 언덕에, 나무도 없는 산 언덕에 니느웨 성을 보면서 동편에서 니느웨성을 보는데, 요나가 보겠다고 하는 심보는 뭡니까?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구원하시고, 축복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하는 것을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저 니느웨가 어떻게 망하는가? 그 꼴을 한 번 보겠다는 것이지요.

그 퇴약볕에 산에 올라가서 앉아있는데, 그 못된 심보를 가진 요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퇴약볕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니느웨 망하는 꼴을 보겠다는 요나를 위해서 박 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순식간에 그늘이 되었습니다. 박 넝쿨, 호박 넝쿨이 우거지면 웬만한 비는 맞지 않을 정도로 우산의 역할을 합니다. 그늘이 생겼습니다. 마지막절에 보니까 요나가 박넝쿨로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퇴약볕에서 땀을 흘리면서 니느웨의 망하는 꼴을 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박 넝쿨이 생겨서 그늘이 되어지니까 시원해집니다. 중동국가는 35, 40도 온도가 높이 올라가지만 한 가지 습도가 없기 때문에 그늘만 되면 시원해 집니다. 얼마나 요나가 시원함을 느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요나를 위해서 박넝쿨을 준비해 주셨는데 그것은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괴로움을 면케 하심이더라. 이기적인 요나, 자기 밖에 모르는 요나, 오히려 하나님의 원하시는 모습에서 떨어져 있고, 벗어나있는 요나, 그런 요나를 위해서 박넝쿨을 준비해주셨습니다.

요나가 기쁨이 생겼습니다. 철학자 슐러는 말합니다. 기쁨은 자연을 움직이게 하는 용수철과 같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활기가 띄어 오르는 것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풀이 팍 죽어있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며칠 전 인터넷 뉴스를 보니까 우리 아드보카트 감독, 그 멤버 23명이 전지훈련을 하고 있는데, 지난 번 UAE에서 경기하면서 1:0으로 경기를 지고나서 그 날 밤에 사우디아라비아로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데, 공항에서 기자들이 보니까 분위기가 썰렁해서 아무도 말을 붙이는 사람도 없고, 말을 하는 분위기도 아니고, 선수단의 분위기가 아주 을씨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핀란드를 이기고 나서 거기서 홍콩으로 떠나는 그 공항의 분위기는 얼마나 분위기가 좋은지 잔칫집분위기로 바뀌어서 기자가 물어보기도 전에 서로 이야기하고, 서로 격려하고,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좋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환경에서 어느 때는 풀이 죽어서 말 붙이기도 어렵고, 어느 때에는 분위기가 싫어서 용수철처럼 막 튀어 오르고, 사람은 이렇게 감정의 동물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보면 그런 모습들이 많아요. 심한 사람들이 있는게 병이지요.

너무 감정의 굴곡이 심해요. 어느 때는 그냥 할렐루야, 놀렐루야입니다. 어느 때는 근데 목사가 말 붙이기도 어려워요. 인상 팍 쓰면서 무슨 세상의 근심을 다 지고, 걱정하는 것처럼 말 붙이기도 어려워요. 감정의 기복이 너무 심해요.

그러나 요나 하나님께서 그런 요나에게 기쁨의 기회를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같으면 그 얄미운 요나, 이제는 더 이상 은혜를 베풀고 싶지 않은 요나,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은 요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기쁨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요나가 기뻐하는 이유를 우리가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단순히 박넝쿨 때문이었습니다. 박넝쿨 때문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우리 사람의 기본적인 어떤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박넝쿨 때문에 심히 기뻐함이라. 요나는 왜 기뻐하고 있습니까? 요나를 바로 우리 자신으로 대입을 해 보고, 우리 사람으로 적용을 해 본다면 우리 사람이 기뻐하는 것은 언제입니까? 사람이 작은 것 때문에 울고 웃잖아요.

시험 들고, 시험 안 들고의 문제도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작은 말 한마디 때문에 시험에 들고 상처를 받고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 사람이 작은 것 때문에 울고 웃으며 산다는 것,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또 어떤 때에 기뻐합니까?

생각지 않은 것, 생각지 않은 것 때문에 우리는 슬퍼합니다. 요나 지금 생각지도 못 했는데, 이게 웬 떡이야? 그리고 이 불로소득 때문에 기뻐합니다. 공짜를 좋아하면 요나, 누구의 모습이예요?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복은 다 누리고 싶고, 나누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복은 다 받고 싶고, 봉사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좀 챙겨 주기를 바라고, 이런 모습입니다. 생각지 않은 것 때문에 울고 웃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요나의 모습, 박넝쿨 때문에 기뻐하는 요나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의 유익 때문입니다. 박넝쿨이 생긴 것 때문에 요나에게는 유익함이 생겼습니다. 내가 좋으면 웃고, 내가 싫으면 우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야 좋은 것이고, 내가 싫으면 싫은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생활의 연륜이 쌓여가면서도 여전히 내가 좋아야 좋은 것이라고, 내가 싫으면 싫은 것입니다. 언제까지 우리는 언제나 이기적인 감정에 신앙을 끌고 다닐 것입니까? 그 신앙이 얼마나 무거워요?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종교적인 너무 종교적인 사람들, 신앙의 모습은 있지만, 신앙의 능력은 없어서 늘 신앙의 자리가 자기의 삶에 짐이 되는 사람이 있어요.

아휴, 또 주일이 왔구나. 아휴, 또 뭐가 왔구나. 그저 부담스럽고 힘겨운 사람들, 자기에게 유익이 생겨야만 기뻐하는 요나의 모습,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이 요나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넝쿨을 예비해 주셔서 기쁨이 생긴 줄로 믿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요나에게 변함없이 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한 가지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읽어드리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제가 어제 인터넷에서 받은 글입니다.

제 어머니는 시장 한 귀퉁이에서 나물을 파셨습니다. 다리도 불편하신 몸으로 매일 시장귀퉁이로 나가 나물을 팔던 어머니, 그러나 나도 그런 어머니가 싫었습니다. 어린시절 저에게 시장근처를 지내는 일은 고통이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지나고 있을 때 다리까지 불편한 어머니가 갑자기 나를 부르면 어떻게 하나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초라한 어머니가 싫었습니다. 아버지도 없이 자라면서 궁색한 살림과 가난, 그리고 초라한 어머니가 너무나도 싫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원래 공사장에서 노동을 하던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공사장에서 사고를 당해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다리를 다치셨던 것입니다. 그 이후 어머니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물을 팔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부에만 매달렸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제가 이토록 초라하고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 길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끔 어머니가 절룩거리는 몸으로 학교를 찾아올 때면 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외면했습니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반드시 성공하겠다.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초라한 삶은 살지 않겠다.

결국 저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부자인 아내를 얻어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병원도 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헤어진 저는 매달 넉넉한 생활비를 어머니에게 보내는 것으로 아들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구질구질한 지난 날이 떠오를까봐 어머니를 직접 찾아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고향에 있는 모교회 선생님으로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집으로 찾아간 저를 맞아주시는 것도 선생님이었습니다. 제가 고향을 떠난 뒤에도 가끔씩 어머니를 찾아가 안부를 물으셨다는 것도 그제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조용히 계시던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난하지만 정이 넘치는 부부가 있었지. 어느 날 그 부부는 포대기에 싸여 가난한 아기를 발견했어. 가난한 부부였지만 아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그 아이를 안고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키웠어.

늘 공사장에 나가야 하는 부부는 할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공사장에서 일을 하곤 했단다. 그러다가 일이 터진거야. 포대기에 싸여 쌔근쌔근 자고 있던 아기 위로 철근 더미가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어.

부부는 급한 마음에 아이를 구하겠다고, 달려들었는데 결국 남편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아내는 다리를 다쳤단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전혀 다치지 않았단다.

오늘 설날입니다. 우리 어머님들도 많이 보이고, 아버님들도 많이 보이는 설날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부모님들을 찾아서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요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그렇게 이기적이고, 그렇게 자기 중심적이고, 그렇게 감정적으로 사는 그에게도 주님은 박넝쿨을 진실로 사랑의 손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왜 아버지 어머니를 공경해야 하는가 하는 설명이 필요없는 아주 중요한 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내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고 우리에게 놀라운 약속을 한 가지 하셨습니다. 이는 땅에서 장수하는도다. 약속있는 첫 번째 계명입니다.

다른 계명에는 약속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했는데, 부모를 공경하는 이 대목에서는 공경하는 자식들에게 약속을 한 가지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면 너희들이 땅에서 잘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부모님들 공경하는 일에 좀 더 부족함을 가졌던 자신들에게 박넝쿨을 예비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오늘 가정가정에서 다시 한 번 느끼고 누리면서 주님의 사랑에 충만한 평안의 가정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명절을 맞이해서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 일부는 부모님을 향해서, 형제를 향해서 또 일부는 주님의 성전을 지키면서 가까운 곳에서 부모님과 함께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땅에 부모를 주신 그 하나님의 깊은 의미와 그 은혜를 깨닫기 원합니다. 너희가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지 못한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주님,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먼저 부모의 공경의 실천적 삶을 살게 하옵소서. 때때로 연약하고 부족한 자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셨던 그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확인하며 하나가 되는 복되고 귀한 날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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