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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려면 (벧후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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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고,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려면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으로(눅 22:30)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하며(마13:41;16:28;눅 23:42;요 18:36) 미래에 주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을(3:13)가리킵니다.

어떤 목사님의 재미있는 간증이 있었답니다. 그 분은 기독교 계통의 고등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몇 해 한 일이 있습니다. 담당 한 과목은 국어였는데 신학한 분이 교회를 개척하고 스승임 목사님에게 저녁 설교를 부탁하였는데 승낙하고 저녁예배드리러 갔다가 크게 낭패를 하고, 체면이 많이 깎인 일이 있었답니다.

개척한 이씨 성을 가진 목사님은 교회 이름을 '한소망교회'라고 했기에 교회 이름 풀이를 중심으로 설교 준비를 했답니다. '한'이라는 말에는 하나 뿐이라는 뜻도 있다, 대전을 한밭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큰 밭이라는 뜻으로 크다는 뜻도 있다, 바르다는 뜻도 있다, 이렇게 '한'이라는 글자의 뜻을 대여섯 개 정도풀어서 설교원고를 준비했답니다.

그런데 같은 날 오후에 같은 지방의 '한사랑교회'가 성전을 마련하고, 입당 예배를 드리는데 축도 순서를 맡아서 갔더니 그날 설교를 맡은 목사님이 하필이면 '한'자를 주제로 하여 설교하더랍니다. "'한'이라는 글자에는 뜻이 참 많습니다. 한글학회에서 나온「우리말 큰 사전」을 보면 열 개의 뜻이 있습니다. "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한의 의미를 가지고 설교를 하더랍니다.

그런데 설교 순서 전에 한소망교회 담임이고, 자신의 제자인 목사님이 신이나서 '한"자의 의미를 더욱 강조합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이 교회 이름을 왜 '한소망교회'라고 했는지 이미 여러 번 말했지만 오늘 저녁에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한'의 뜻을 설흔 개 정도 말하더랍습니다.

그러니 스승 목사님께서 준비한 내용을 다 이야기하고 심지어는 '한소망'에는 '한을 소망으로 풀자'라는 뜻도 있다고 했고, '한국의 소망'이라는 뜻도 있으니까 한국의 소망인 통일을 이루는데 앞장서는 교회가 되자라고 하면서 점심때 들었던 내용까지 보태서 성도들에게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스승 목사님 자신의  설교차례가 되었는데 무엇이라고 설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날 설교는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답니다. 그 다음부터 '한'이라는 글자는 스승 목사님에게는 '한 맺힌 글자'가 되었답니다.

교회에서 쓰는 '은혜'라는 말도 '한'이라는 말만큼 뜻이 많습니다. 그리고 범위가 아주 넓습니다. 예를 들면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 '은혜 많이 받으십시오.', '분위기가 은혜스럽습니다.', '은혜가 넘칩니다.', '은혜의 대잔치', '그렇게 하면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법으로 하지 말고 은혜로 합시다.',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등등으로 쓰이며, 그밖에도 많습니다. '한'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마찬가지로 이 은혜라는 말은 한 맺힌 말이 되어서는 안 되도록 해야 합니다. 말 그대로 은혜스러운 말이 되어야합니다.

우리가 많이 쓰는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하는 식의 말에는 은혜의 본래 뜻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은혜의 부분적인 뜻, 또는 본래의 뜻은 아닌데 굳어져 버린 것을 습관적으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의 본래의 뜻을 잘 알아야합니다.

은혜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은혜는 우리의 기본적인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에도 들어 있습니다. 사도신경의 끝 부분에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라는 말이 있는데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이것을 두 글자로 줄이면 '은혜' 이렇게 됩니다.??십자가는 은혜가 전해지는 통로입니다.


은혜는 무엇입니까? 모교단 교리적 선언 네 번째 조항이 은혜에 대한 설명을 잘 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과 기도의 생활을 믿으며 죄를 용서하심과 모든 요구에 넉넉하신 은혜를 믿으며," 라고 되어있습니다.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을 통해 죄사함을 받아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름받은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임과 동시에 은혜인 것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남님께ㅐ서 계신 이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 드리고있는 것, 그것이 은혜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종교개혁의 삼대구호가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sola fides)'오직 말씀으로'(sola Scriptura) 그리고 '오직 은총으로'(sola gratia)입니다. 은총은 은혜와 같은 말입니다.

믿음과 말씀에 대한 설교는 많이 했기 대문에 오늘은 은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은혜에 대해서 바로 그 의를 깨닫고, 정말 내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 받게 된 은혜에 대하여 진정한 감사를 새롭게 느끼게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아는 것도 중요하고 느끼는 것도 중요합니다. 느끼는 것 없이 알기만 하면 이론적인 신앙에 그치고 맙니다. 또 아는 것 없이 느끼기만 하면 감정적인 신앙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 둘이 잘 조화를 이루어야합니다.

성도여러분! 오늘 은혜에 대해서 그 의미를 바로 깨닫는 계기로 삼아 신앙생활을 하고, 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감사하며 은혜롭게 인생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본문 베드로후서에 이렇게 '은혜'라는 말씀이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은혜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장 1절을 봅니다. 앞부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평범한 어부인 베드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 그 베드로가 사도가 된 것, 은혜였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 베드로를 찾아와 "시몬아!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어 보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용서해 주시고, 사명을 다시 깨닫게 주셨기에 사도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저와 여러분들께서 성도가 되고.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1절 후반부에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의롭다 함을 입어 믿음을 갖게된 것, 은혜에 대한 간결하고도 힘있게 설명합니다.

2절에서는 은혜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하고 있고, 3절 앞부분에서는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한 능력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도 은혜입니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하심으로 우리에게 죄 ㅎ마과 구원과 영생과 천국과 이 땅에 사는 동안 필요한 것들을 값없이 주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값없이 받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선물들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가치가 큰 것은 값없이 받은 것들입니다.

이틀 전 중국에 장기 이식을 받으러 갔다가 부작용으로 어려움을 당한 사례를 보도하였습니다. 천진에 약 600명 이상 간이식 수술을 방았고, 저의 집안에 친척도 장기 이식 수술을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만. 어떤 분이 장기를 이식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 분은 장기를 구하기 위해 여러모로 애쓰고 있는데 장기를 이식해 줄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습니다. 이식해 줄 사람을 찾으면 그 사람의 장기가 거부작용을 일으키지 않나 검사를 해야 하는데 문제가 되는 일이 많습니다. 겨우 이식할 수 있는 장기를 만났는데 이번에는 너무 많은 돈을 요구해서 아직 장기이식을 하지 못했습니다.??이런 가운데서 이 분이 크게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은 너무나 귀한 장기들을 많이 우리에게 무료로 주셨구나!' 라는 사실을 그 때서야 알게 되었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귀한 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공짜로 받았습니다. 내 심장, 나의 눈, 내 지체들, 내 몸과 마음과 시간과 존재, 부모 형제, 처자, 조국과 자연, 태양, 물, 이 소중한 것들, 거저 받은 것들입니다.

거저 받은 것들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깨닫고 이 은혜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4절 이하, 우리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도 은혜입니다.

10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우리가 부름 받고 택함 받은 것, 은혜의 다른 표현입니다.

본문이 기록된 베드로후서에서는 이렇게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이어지다가 3장 18절에서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으리라."는 말씀, 즉 은혜로 끝을 맺습니다.

베드로후서는 거짓교사들, 영지주의자들을 경계하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성경인데 은혜를 바탕으로 하고 그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선교의 관점에서 읽어보면 창세기 1장 28절에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은 복음으로 땅을 정복하라는 선교 명령입니다. 아브라함은 선교사가 됩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보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는 것은 파송식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시내산에서 계약을 맺은 것은 선교민족으로서의 계약이며, 사도들도 선교사들이 됩니다. 성경의 끝인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선교의 완성이 됩니다. 이렇게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면 성경을 읽는 가운데 큰 은혜를 받고 도전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관점으로 성경을 읽는가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은혜의 관점에서 성경을 모든 성도님들께서 한번 새롭게 읽어보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는 이미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은 것 가장 값비싼 은혜를 받았고, 놀라운 은혜를 받아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에 달려 나올 때마다 얼굴을 활짝 펴시기 바랍니다. 환하게 웃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나왔다가 떠나간 어떤 성도에게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생각을 한해 보았습니다. 어제는 그 전화를 듣고 하루종일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제가 주선하여 어떤 단체에 빌려간 돈인데 "목사님 제게 돈을 이야기 하시는 겁니까?"라며, 오히려 과거에 교회에 다니는 동안 헌금을 했고, 그동안 그 이상 교회에 봉사를 했으니 그 돈을 왜 달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빌려준 돈도아니고, 자기 공장에 기계 바구어냐 하는데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제가 중간에 보증이 되어 빌려준 돈인데 그렇게 나오니 기가 막히는 일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을 가졌더니 감사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 황목사야! 앞으로 그런 사람이 교회의 장로가 되었으면 얼마나 교회에 부덕이 되겠는냐? 목회자에게 얼마나 가시가 되겠느냐? 그래서 내가 날려 보냈다."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저의 사모는 과거에 걱정하고, 염려하고, 그 아들이 시험쳤는데 어떻게 되었느냐고 전화도 해 보라고 해서 여러번 전화했는데 의도적으로 전화를 안 받았습니다. 거기에다가 그런 행동을 하니 저보다 더 기가 막히겠지만 그럼에도 저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이 있구나를 시간이 지나면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 얼마나 귀ㅐ한 은혜의 선물입니까?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이제 우리는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때까지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받기 위해 힘써야 할 줄 믿습니다. 어떻게 하면 은혜를 풍성하게 받아 믿음생활을 잘 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1. 겸손해야 합니다.

본문 2절에 "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성품은 온유와 겸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구약의 잠언서 3장 34절은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라고 말하고 있고, 신약의 베드로전서 5장5절 후반부에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한다면 그것은 가장 큰 교만입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살아가는 자세가 확립되어 있다면 그 분은 겸손한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은혜를 풍성하게 받을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를 많이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분문 2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많을 지어다."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알아야 면장도 하고, 알아야 은혜를 풍성하게 받습니다. 난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알지만 철저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알아야합니다.

헬라말로 그저 아는 것은 '그노시스'라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여기서 '그노시스'라는 말을 쓰지 않고 '에피그노시스'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노시스'보다 더 크고 철저하고 완전하고 구체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영지주의자들이라는 무서운 이단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영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자신을 영지주의자라고 했습니다. 헬라말로는 '그노시스트'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더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그노시스보다 한 단계 위인 '에피그노시스'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여기서 아는 것은 그저 책을 통해서 아는 것,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객관적인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지식은 영생을 가져다주거나 은혜와 평강을 풍성하게 해줄 수 없습니다.

컴퓨터를 배우는 분들, 운전을 배우는 분들, 책을 통해서 남의 말을 듣고서 컴퓨터를 잘 사용하거나 운전을 잘 알 수 있습니까? 아니지요. 실제로 컴퓨터를 두들겨야 하고 핸들을 잡아야합니다. 실수도 하고 자기만의 독특한 방법을 개발하기도 하면서 익히게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여기서 안다고 하는 것은 믿고 사귀고 같이 삶으로써 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를 깊이 사귀고 믿으며 그들을 체험하고 아는 삶 속에는 참으로 풍성한 은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정직한 사람들 되고, 겸손한 사람들이 되어, 특히 죄의 문제에 정직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되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깊이 앎으로 은혜를 풍성하게 받기 바랍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아야합니다. 받되 풍성하게 받아야합니다. 은혜를 받아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롬3:24, 딛3:7). 은혜를 받아야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느9:17). 은혜를 받아야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행15:11) 은혜를 받아야 위로와 소망을 받을 수 있습니다(살후2:16). 은혜를 받아야 다른 좋은 것들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 2절에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이 '은혜와 무엇'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사무엘하 2장 6절, 15장 20절, 요한복음 1장 14절, 그밖의 많은 곳에 은혜와 진리라는 말이 나오고 느헤미야 9장17절, 다니엘 1장9절에는 은혜와 긍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밖에도 은혜와 영화(시 84:11), 은혜와 권능(행6:8), 은혜와 자비(욜2:13 욘4:2), 은혜와 사도의 직분(롬 1:5), 은혜와 의의 선물(롬5:17) 등 많습니다.

이것을 은혜를 받으면 평강이 따라온다, 은혜를 받으면 진리가 따라온다, 은혜를 받으면 자비가 따라온다, 이렇게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나 은혜가 먼저 나옵니다. 은혜가 뒤에 나오는 경우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은혜를 받아야 평강도 누릴 수 있다' '은혜를 받아야 진리도 깨달을 수 있다' '은혜를 받아야 긍휼도 입을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말하면서도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서 축도의 원형을 제시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같이 은혜를 먼저 말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받아야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며, 영생를 얻지만 이 땅에서 다른 좋은 것들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기쁨도 누릴 수 있습니다. 은혜는 기쁨입니다. 은혜를 헬라말로 '카리스'( *)라고 합니다. 카리스는 '기쁨'을 말하는 '카라'에서 왔습니다. 은혜는 기쁨인데 일반적인 기쁨, 인간이 주는 기쁨과는 다른 기쁨입니다. 위로부터 주시는 기쁨입니다. 거저 주시는 기쁨입니다.

진정한 기쁨, 인간이 추구하는 참 기쁨, 그리고 평강, 그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1장 2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는 말씀의 숨은 뜻입니다.

은혜를 받아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누가 나를 사랑하는데 내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불행입니다.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는 것, 이것은 총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남달리 봐주고 사랑해 주시고, 관심을 가져 주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나에게는 그런 총애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데 이유 없이 곱게 봐주고 대우해 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2. 정직해야합니다.

본문 10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 중에 "거짓말하는 자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요한계시록에 말씀합니다.

잠언서 14장 9절은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자신의 죄에 대해서 정직해야 합니다.'나는 죄가 없어' 하는 것 정직한 것 아닙니다. 허세입니다. '죄의 문제, 별 것 아니야! 사람이 어떻게 죄를 안 짓고 살아? 더구나 요즘 세상에서 말이야!' 하는 것 정직한 것 아닙니다. 자기합리화입니다.

'죄의 문제, 쉽게 해결할 수 있어!' 정직한 것 아닙니다. 무식입니다. 무식해서 용감한??것입니다. '죄의 문제,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어' 하는 것도 정직한 것 아닙니다. 교만입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이 고 백이 있엉야 합니다. 성도는 용서받은 죄인이지만 그러나 계속하여 죄를 씻어내어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 작은 죄는 반드시 심판을 받고, 작은 죄때문에 지옥갑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는 심각한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 방법, 저 방법 다 써 보았지만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 공로 의지하여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직의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바울은 죄의 문제 앞에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하는 것은 가장 정직한 고백입니다. 루터도 죄의 문제 앞에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깊이 깨달았습니다. 루터는 수도원의 수도사였습니다. 그것도 수도원들 가운데에서도 아주 엄격하기로 유명한 수도원의 수도사였고 그곳의 수도사들 가운데서도 수도원의 엄격한 계율을 지키느라고 힘쓴 모범적인 수도사였습니다. 그런 루터가 자신을 죄인이라는 깨닫고 '어떻게 하면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매달립니다. 그 결과 '지금 천주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 가지고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하면서 일으킨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은 기독교를 공로의 종교에서 은혜의 종교로 전환시킨 사건입니다.

그 전까지는 교회는 자기의 힘으로 구원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착한 일을 통해서 구원 받을 수 있다', '독신 생활을 하면 구원 받는데 큰 도움이 된다', '성지 순례를 하면 구원에 도움이 된다', '성자의 유물을 보면 구원 받는데 도움이 된다'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유물에 대해서는 '무엇을 보면 연옥 생활이 몇 년 탕감된다', 이런 것들이 무슨 점수처럼 매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물과 관련된 '성배'등 영화가 나왔습니다.

최근에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유골함으로 추정되는 성서유물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고 있는데 천주교에서는그 유물을 어느 정도 평가할지 잠시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이런 것들은 선행과 경건한 삶을 격려하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내 공로를 내세우게 되고 내가 은혜 받고 축복 받는 것은 내가 잘 났기 때문이라는 나 중심주의에 빠질 수 밖에 없게 만듭니다. 공로주의는 결국 인간 자신이 중심에 자리잡게 만들고 자기의 의 가운데서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죄 의식을 없앱니다.

이런 것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은혜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믿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공로에서 은혜로 전환이 이뤄져야합니다. 루터는 "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 떳떳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이것을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독일 아우그스타나 신학대학 총장인 볼프강 좀머(Wolfgang Sommer) 박사가 종교개혁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퍽 도움이 되는 말을 했습니다. 그대로 옮겨드립니다.

" 루터의 신학적인 사상의 첫 번째 표제어는 '죄이다. 루터의 신앙 이해는 그의 죄 이해에서 출발한다. 루터의 모든 분투는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은 혜로운 하나님을 붙들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공로를 요구하지 않고 인간을 받아주시는 은혜로운 하나님이 나타난다."고 말했습니다. 철저한 회개를 톤ㅇ해 나의 죄에 대하여 정직하게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3.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11절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목적은 받은 은혜로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받은 은혜를 계속하여 천국가는 날까지 성령의 역사와 감동으로 깨달아야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생애의 모든 것을 '은혜' 두 글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소중하게 여겨야합니다. 은혜 받을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6장 1절과 2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였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은혜에서 떨어지면 안됩니다. 갈라디아교회의 교인들은 은혜에서 떨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5장4절에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갈라디아 교인들을 꾸짖고 있습니다.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면 안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0장 29절에서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꿔서는 안 됩니다. 유다서 1장 4절은 이단에 대해 말하면서 이단은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은 사람은 감사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저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해야 합니다(시145:7).

은혜 받은 사람은 여호와의 은혜를 보답해야 합니다(시116:2). 은혜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해야 합니다(롬5:2). 은혜 받은 사람은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해야합니다(고후9:8). 은혜 받은 사람은 은혜의 영광을 찬송해야 합니다(엡1:6). 이럴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더해 주십니다. 금년 한해 구원받은 은혜, 영생을 얻게 해주실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여 받은 은혜를 보답합시다. 충성합시다, 헌심합시다. 그것이 은혜의 삶을 이어가는 것이며, 그러한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 위에 은혜를 덧입혀 주실 줄 믿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은혜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은혜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은혜 받은 자로 합당한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나가서 좋은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 결국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복을 얻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예수님을 주시기까지 하셨는데 그 아들과 함께 좋은 것을 왜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 선물들이 전부 은혜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응답하시고 돕는 은혜에 계속하여 이르게 하시고, 성도의 모든 요구에 넉넉하신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 딸 이름이 성은입니다. 받은바 은혜에 감사해서 지은 이름입니다. 드라마 사극에서 신하들이 임금에게 '성은이 망극하여이다'라는 말을 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저것은 하나님께나 쓸 수 있는 말인데…'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성은(聖恩)은 '거룩한 은혜'라는 뜻이 아닙니까? 거져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진심으로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하면서 보은하는 자세로 살아야 마땅합니다.

이제 결론을 한 말씀으로 맺습니다.

성도는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 십자가의 구속함을 통해 죄사함의 은혜를 받았기에 자격이 주어지게 되었고, 이를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고, 피흘려 주셨습니다. 내가 죄 사함받고, 구원받은 것이 가장 위대한 은혜인데 이 한가지 사실만 바로 알아도 평생 감사하며, 헌신하며, 감격하며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았습니까? 은혜의 깊은 뜻을 깨달아 더 풍성한 은혜를 받고, 은혜롭고, 기독교의 성도다운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은혜안에 걸어가는 신앙생활로 영생의 복을 받으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아멘> (황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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