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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설날] 고향 가는 사람들 (히 1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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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인구의 약 절반 정도가 고향을 떠나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명절만 되면 고향을 가는 사람들로 교통전쟁을 치루기도 합니다. 가난하고 지지리도 살기 어려워서 떠난 그 고향, 이런 저런 이유로 떠나온 고향을 다시 그리워하고, 그 길이 고생길이고 시간과 비용을 상당히 들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고향을 찾아갑니다.

고향은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입니다. 고향에는 나의 시작이 있고 뿌리가 있습니다. 고향에는 나의 정취와 추억이 있고 나의 혈육이 있습니다. 고향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하나 밖에 가질 수 없습니다. 고향은 사고 팔수도 없고 옮길 수도 없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성공한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본능에 가깝게 고향을 그리워하고 또 고향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향 가는 사람들은 들떠 있습니다.

고향가는 길이 고달파도 고생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고향 마을에 내리게 되면 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정감과 안식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고향 집에서 반가이 맞아주는 부모님과 가족들 고향 사람들로 인하여 마음은 천국을 이루는 것을 보게 되어집니다. 그래서 고향은 마치 아버지의 넓은 가슴과 같은 곳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본향(고향)이라고 하는 이 ‘파트리스’라고 하는 단어는 ‘파테르’(father)라고 하는 아버지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고향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본향은 고향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고향이 두개 있음을 알려 줍니다. 하나는 ‘나온 바 고향’이고 또 하나는 ‘더 나은 고향’입니다. 이는 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이 사람들은 믿음의 조상들을 일컫습니다. 이 분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육신의 고향을 떠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더 나은 고향을 향하여 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이 교회시대에 성도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또한 성도는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출생한 사람들,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도가 된다는 것은 죽음으로 시작이 되고 떠남으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 떠나지 않은 상태는 아직도 거듭나지 않은 상태요 아직도 온전한 출발을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마16:24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사도바울은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믿음안에 사는 것,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다윗이 말한 대로 시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 한 곳, 죄 가운데 자라며 거하였던 이 육체의 고향을 떠나서, 평강과 희락과 의의 영원한 고향으로 가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 영원한 고향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첫째로 기쁨으로 살아 갑니다.
고향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기쁨과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히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확신에 찬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권고하고 있는 중요한 메시지 하나가 있다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빌3:1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살전5:16 항상 기뻐하라 :18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요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그 숱한 환난과 핍박가운데서도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들에게 다가오는 고향 때문이었습니다.

늘 여러분에게 기쁨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쁨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탄식하며 슬퍼하십니까? 지금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고 앞으로도 숱한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심지어 내 생명을 잃게 되는 위험가운데 직면하게 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할 수 있습니까? 평안히 기쁨으로 우리 조상들처럼 그렇게 인생의 못박석위를 걸으며 사자들의 위험과 불의 위험을 맞이 할 수 있습니까? 고향가는 사람은 그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 고향을 빼앗을 수 없듯이 이 기쁨을 빼앗을 수 없는 것이지요.

  둘째로 나그네로 살아 갑니다.
11:13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이 믿음의 조상들은 한결같이 장막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지방에 장막을 치든지 저들은 외국인이었고, 누가 봐도 나그네였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고향을 가는 사람은 고향에 도착하기까지 그 지점이 어디라고 할지라도 나그네입니다. 이방인입니다. 아무리 좋은 곳이 있어도 아무리 화려한 집이 있어도 거기에서 이 사람은 나그네입니다. 또 실제로 본인들로 그렇게 생각하고 생활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너무 집착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살되 여유가 있고 관용이 있고 또 이 세상에 참된 빛과 소금이 되고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이 나그네 정신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땅이 전부요 이것이 내 고향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것을 여기에 쏟아부어야 하고, 여기서 손해보면 안되고, 여기서 물러서면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외국인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인정하던 하지 않던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증명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수많은 땅을 차지하고 대궐같은 집을 짓고 호위호식을 하며 누리며 살던 사람도 마치 객처럼 지나가는 나그네처럼 다 지나고 지금으로 불과 150년 전만 올라가도 그 이전에 사람이 아직도 이 땅에 주인처럼 자기 땅처럼 살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 조차도 인생은 나그네길이라고 말들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 머물다가 모든 것 그대로 다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셋째로 인내하며 살아 갑니다.
오늘 본문에 히11: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간혹 어떤 분들 가운데서는 고향을 가다가 너무나 길이 막히고 힘들어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어 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차안에서 밤을 새우면서도 고생길을 돌파하여 고향으로 향하는 것을 보게 되어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에는 출발은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시련을 만나게 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이전으로 돌아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또 그러한 기회들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부터 술도 끝고 담배도 끊었습니다. 한동안 괜찮았는데 어느 시점에 가서 자꾸 직장이나 가족 모임에서 술담배를 해야 하는 상황들이 생깁니다. 또 그로인해서 불이익도 당하게 됩니다. 마치 외국인과 나그네가 괄시와 천대와 왕따를 당하듯이 말입니다. 그때에는 그냥 이전으로 돌아갈까하는 마음이 들때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꼭 이렇게 살아야 하나, 꼭 이길을 가야 하나...실제로 그렇게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고향을 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 고향을 집념하며 가게 될까요? 고향을 찾는 사람들의 이유를 들어보면 여러 가지 나름대로의 추억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향을 다녀오면 마음의 안정과 쉼과 새 힘을 충전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향에 가는 사람들의 가장 크고 중한 이유는 그곳에 자신을 반겨주는 사람이 맞이해 줄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또한 고향 찾는 발걸음의 기쁨이요, 그렇게 고생길을 감수하며 나아가는 이유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것이 믿음의 조상들이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서 살지만 기쁨 가운데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걸어갔던 이유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그 숱한 환경가운데서도 흔들림없이 오히려 기쁨으로 믿음의 길을 걸어갔던 이유입니다. 죽음의 자리에서도 이 세상을 실제로 떠나는 그날에도 기뻐하며 평안가운데 떠나며 다시 보자고 여유있는 미소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이유였습니다. 그 고향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눅15장의 탕자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타향에서 돈잃고 몸 버리고 거지가 되어 죽게 되었을 때,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하였던 진로는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고향을 가기로 결심을 한 것은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의 집과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풍족함이 넘치고, 그 아버지께서는 비록 나같은 탕아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자기를 그래도 맞이해 주리라는 그 소망이 그 기대가 그를 고향을 향하게 했습니다. 고향가는 길이 참으로 힘들고 어려웠을 것임에 틀림이 없었을 것입니다. 고향이 가까워지고 고향집이 가까워질 수록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가 고향 땅에 이르러고 고향집이 그 눈에 들어왔을 때, 그의 고향을 향한 고향 아버지를 향한 모든 기대는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기대이상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를 먼저 보고 달려나와 그를 안아주고 반가이 맞아 주었습니다. 누더기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새 신을 신겨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고 풍류로 잔치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지난 시절 모든 고생과 아픔과 배고픔과 설움은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이는 고향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이요, 우리가 거할 고향집의 모습입니다.

계7:14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21:4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가 저 천국에 이를때까지 이 믿음 굳게 잡고 기쁨으로 찬송하며 인내하며 담대히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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