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삼상 19:18-24, 계 12:1-6, 막 1:12-13)

  • 잡초 잡초
  • 577
  • 0

첨부 1


1. 연동교회 이성희 목사라고 하면 교계에서 미래학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동시에 한국교회에서 영성학의 개척자이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어쩌면 매우 대조적인 것 같으나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내다보게 되는 미래란 결코 장밋빛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질만능과 기술의 발달로 인한 인간성 상실, 거기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신앙과 함께 하나님마저도 상실하게 되는 위기의 때가 바로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미래라고 하는 것이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우리에게 닥쳐오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미래는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마치 “마라나타(고전16:22)” 즉 “주님이 오십니다”라고 하는 미래지향적 대망의 인사가 “주님은 오셨습니다”라는 현재적 확신의 인사이기도 한 것과도 같습니다. 이와 같이 미래는 주님이 더 가까이 오시는 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더욱 주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 영성입니다. 아마 앞으로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나 그리스도의 교회가 제대로 그 역할을 감당하려고 하면 영적으로 든든하게 무장 해야 할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 말씀드린 이성희 목사가 쓴 「도시 속의 사막」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도대체 “도시”라는 말과 “사막”이라는 말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우리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비록 농촌에 살고 있어도 다 “도시인”들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삶의 패턴 중의 하나가 광야적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책에서 이성희 목사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가장 은혜로운 시기가 출애굽과 광야 생활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애굽에서 탈출한 것도, 그리고 아무 먹을 것도 없는 광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광야 생활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광야 생활이 요청된다고 했습니다.

까를로 까레또라고 하는 가톨릭 신학자가 쓴 「도시 속의 광야」라는 책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날의 생활 속에 광야를 마련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광야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 또 그런 시간을 말합니다. 즉 광야란 묵묵히 하나님을 찾는 구도(求道)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들어 쓰신 대부분의 위인들은 모두 광야를 통하여 연단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엘리야가 그랬으며 세례 요한과 바울도 역시 광야의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우리 주님도 광야에서 40일간 금식 기도하시고 사역에 임하셨습니다. 특히 2세기 이후 수많은 경건한 주의 종들이 광야를 찾았습니다. 그것이 중세와 그리고 지금도 가톨릭에서 연면히 이어 내려오는 수도원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도시 속의 사막」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광야는 태초의 말씀이 흐르고 있습니다. 광야에는 태초의 말씀이 들립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크게 다가옵니다. 광야에서는 숨어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캘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까를로 까레또는 “그대가 만일 광야에 갈 수 없다면 그대의 생활 가운데 광야를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의 복잡한 현실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그 말입니다. 우리의 원천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 광야에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하나님은 모세에게처럼, 엘리야에게처럼 우리에게도 새로운 은혜와 사명과 함께 능력을 주실 줄 믿습니다.

2. 오늘 사무엘서 본문을 보십시오. 그동안 다윗은 사울 왕에 의한 몇 차례의 죽음의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자기 시도가 거듭 실패하자 이제는 노골적으로 다윗을 체포하기 위하여 자기 부하들로 하여금 끈질기게 다윗을 추적하도록 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사울 왕이 통치하는 이 이스라엘 땅에서 어디 간들 숨을 곳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시11:1에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가?”. 그는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품안에서 피난처를 찾았습니다. 다윗의 진정한 피난처는 하나님의 품이었습니다. 시56:10-11에는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신앙이었고 이것이 다윗의 승리의 비결이었습니다.

오늘 사무엘서 본문 18절에 “다윗이 도피하였다”고 했습니다. 과연 다윗은 어디로 도피하였습니까? 시편의 고백대로라면 다윗은 “여호와께 피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사무엘서 본문에는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 나욧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라마 나욧이 어디입니까? 거기 누가 있습니까? 자기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세운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 사무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과 함께 라마 나욧에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라마 나욧은 원래 어떤 곳입니까? 삼상1:1에 의하면 선지자 사무엘의 고향입니다. 그리고 선지자 사무엘의 활동의 중심지였습니다. 사무엘은 여기서 선지학교를 세우고 많은 젊은 주의 종들을 길러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의 교회요 또 신학교 또는 수도원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 라마 나욧입니다. 이렇게 볼 때 다윗은 위기를 만나 하나님을 찾아갔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은혜의 장소, 예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여기가 다윗에게는 정말 광야였습니다. 그는 가장 어려울 때, 자기 생명이 경각간에 처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품에 피하여 찾아 온 하나님의 사람을 영접하시고 지켜주셨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품에 피한 다윗은 비록 왕이라고 할지라도 사울이 결코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아무도 너희를 내 손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 실패로 인하여 좌절하고 있습니까?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까? 도무지 홀로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까? 주님의 초청하시는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벧엘로 가지 말라. 길갈로 가지 말라. 브엘세바로도 가지 말라.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벧엘은 어디며, 길갈은 어디며, 브엘세바는 어디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한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말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광야로 나아가십시오. 거기 하나님의 말씀의 만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수가 있습니다. 낮엔 구름 기둥으로 밤엔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이 광야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미 하나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다윗에게 이토록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 계속 됩니까? 앞으로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왕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면 왕의 수업을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고도 했습니다. 금보다 더 귀하게 연단하기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비록 애굽 왕궁에서 모든 학문과 무예를 익혔고, 온 애굽 국민들의 신망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가 이스라엘 지도자가 되려면 그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 영성이었습니다. 그것은 왕궁에서 배울 수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배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기간이 40년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루아침에 모세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저 하늘나라 백성으로 합당한 사람들이 되려고 하면 이 세상에서 이런 연단을 거쳐야 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사도는 “너희에게 오는 불 시련을 이상한 일을 당하는 것같이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라야 우리 믿음이 금보다 귀하게 연단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금광석을 용광로에 넣고 고열을 가하면 먼저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금 아닌 것들이 다 타서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야 귀하고 값비싼 순수한 금을 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상태를 살펴보면 잡된 것들이 너무 많이 섞여 있습니다. 세상이 너무 좋습니다. 물질이 너무 귀하게 여겨집니다. 정욕의 유혹이 매우 끈질기게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세상의 명예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런 선악과 같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이런 “이전에 좋던 것들이 분토같이 여겨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이 가장 고상하게” 되어지려면 우리에게 광야가 있어야 합니다. 광야의 체험을 통하여 우리에게 아직 남아있는 불순물들이 녹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사랑하는 사람들을 광야로 내모십니다.

우리는 오늘 사무엘서 본문을 통하여 다윗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함께 다윗의 적들을 제압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동시에 보게 됩니다. 다윗을 잡아오라고 사울이 보낸 전령들이 라마에 갔을 때 거기 강하게 역사하시는 성령께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사울의 전령들이 오히려 선지자들 무리와 함께 성령에 충만하게 되어 예언을 하게 됩니다. 다윗을 잡기는커녕 다윗의 편에 서서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런 일이 3차례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사울이 직접 다윗을 잡으려고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그 사울마저 압도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왕이 완전히 무장해제 하고 옷을 벗은 채 예언을 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울처럼 결코 하나님과 맞서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종들을 잡으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슥2:8에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하나님)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품을 피난처로 삼으신 성도 여러분, 지금 잠시 어렵고 힘들다고 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쉬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영어로 된 속담에 “No Cross No Crow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반드시 우리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시기 위해서 마련된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면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저와 여러분도 승리하게 해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마음 밭에 잡초가 욱어지거나  돌같이 굳어지지 않도록 우리 마음 밭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비처럼 내려주신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파종하여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혀야 합니다.

이미 성령께서 떠난 사울은 이런 엄청난 체험을 하고서도 여전히 돌이키지 못하므로 결국 멸망하게 된 것 아닙니까?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미 결론을 다 알고 있듯이 사울은 절대로 다윗을 이기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확실히 믿고 하나님께 굳게 붙어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오동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