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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보게 하시는 주님 (요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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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인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무엇을 보느냐?' '얼마나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 하는 사람의 관점이 그 사람의 가치와 인격과 미래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들어오는 정보의 80%는 눈을 통해 인지됩니다. 지금도 대부분 활자화된 언어에서 우리는 정보를 얻습니다. 그렇다면 2006년도 이해를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문제는 우리의 눈이 새로워져야 새로운 창조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결론인 것입니다.

마음의 눈으로 보는 세상 

유대인의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행복을 얻으려면 자기만족에서 멀어져야 한다. 가장 훌륭한 지혜는 친절함과 겸허함에 있다. 그래서 두뇌를 갈고 닦는 것보다 마음을 닦는 것이 더 소중하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먼저 보고 그 다음에 그의 두뇌를 본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얼마나 바르게 사는지 그걸 본다. 공짜로 써주는 의사의 처방은 믿지 말라.” 축복의 통로에는 생명을 지키는 부표가 있고, 행복한 삶을 만드는 지혜와 안내서가 있습니다. 축복의 사람은 항상 생명의 부표를 보고, 사랑의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살며, 축복받은 가정은 화목의 부표를 보고 서로 마음을 읽고, 격려합니다.

쌩떽쥐베리의'어린왕자'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내 비밀은 이런 거야. 아주 간단해. 오로지 마음으로만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단다”현재 우리는 외형적인 것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단편적인 판단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가장 중요한 것은 간과한 체 허구를 좇지는 않는지, 이제는 마음의 눈으로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골프 치는 사람들이 어느 날은 성적이 좋고 어느 날은 나쁘고 그러는데 골프공이 크게 보이는 날이 있고 작게 보이는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활을 쏘는 사람들도 과녁이 크게 보이는 날이 있고 과녁이 작게 보이는 날이 있는데 그것은 내 심리적 상태에서 오는 것입니다. 브라질의 세계적인 축구황제라고 불리는 펠레는 근시라고 하는 핸디캡을 정신력으로 극복한 사람입니다. 이 정신적 시각, 정신력이 말해주는 감각적 시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눈은 영혼의 창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눈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사랑스럽고 평화로운 마음도, 반면에 미움과 질투의 마음도, 먼저 눈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눈(렘5:21)이 있고, 보기는 보아도 겉만 보는 눈이 있는데 보지 못하는 눈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이요, 겉만 보는 눈이란 하와가 선악과의 겉만 보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러워 보여 속은 못보고 껍데기만 보는 눈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그랬습니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그 눈이 나쁘면 그 생활 전부가 어둡다는 말입니다. 시력이 좋은 사람들이 눈으로 무엇을 보면 그들의 몸은 세상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의 빛으로 가득 차 그 보이는 것을 통해 세상을 감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눈이 어두우면 빛도 볼 수 없고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눈이 성해야 합니다. 성한 눈으로 밝히 보고 밝게 깨닫고 밝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흐린 눈이 있고 나쁜 눈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눈의 시력은 마음의 초점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맺히는 상에 하나님이냐 물질이냐에 시각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심상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면 영적인 존재가 그 생명과 빛을 받아 밝을 것이나 마음이 물질적인 것이나 세상의 보물을 향해 있다면 영적인 지각이 어둠에 덮여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흐리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눈은 창문과 같아서 창이 깨끼 하면 맑은 빛이 몸 안으로 밀려들어오지만 창이 더러우면 그 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운 사람, 질투에 눈이 어두운 사람, 잘못된 경험에 집착된 사람, 바른 시각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특별히 걱정과 근심에 메여있는 사람들, 상황을 바르게 보지를 못합니다. 편견과 불신에 메여있는 사람, 미움과 시기에 메여있는 사람은 사람을 바로 볼 수 없고 사물을 바로 이해할 수 없고 세상을 바르게 살지 못합니다.

자신의 심상에 찍힌 영상에 따라 굴절된 가치로 사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사람은 환하게 열린 길을 전혀 볼 수가 없는 터널시야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터널 시야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 다양한 시각을 차단하기 때문에"자기 합리화"를 정당화하며 모든 것을 자기 필터로 끌어당겨 바라보게 합니다.

신령한 안목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전도하시다가 수전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이때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만나서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했습니다. 왜 주님이 이렇게 하셨을까요?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영안이 밝아야 합니다.

최고 밝은 눈이 믿음의 눈입니다. 이 눈은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요, 이 눈은 하나님을 아는 눈입니다. 그러므로 최고 지식의 눈입니다. 그리고 가장 멀리 보는 눈입니다. 창세전부터 우리를 부르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보는 눈이요, 먼 미래를 보는 눈입니다. 죽음 이후까지 보는 눈입니다. 참으로 신비한 눈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자기를 보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보통 눈은 남을 보는 눈이지만 믿음의 눈은 자기를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을 가지고 사물을 보고 다른 사람을 봅니다. 그런데 자기를 볼 수 있는 눈까지 열어주는 것이 영안입니다. 우리가 유리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밖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은을 칠하면 거울이 자기를 보여줍니다. 자기를 보려면 거울 앞에 서야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그 속에서 자기의 허물도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비젼도 영광스러운 존재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성경에서 그리스도 앞에 설 때만이 내 존재를 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나를 비교할 필요 없습니다. 다윗과도 비교할 필요 없습니다. 그도 죄인입니다. 거기에서 나를 본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나를 볼 때 내가 죄인 됨을 보며 주의 의를 봅니다. 주의 의가 나를 덮어줍니다. 그래서 나에게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보면서 나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어떤 사건을 보는 안목이 열린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입니까? 자기입니까? 그 부모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1-3)

세인들의 안목은 이러합니다. 만약 우리의 주변에 출생 시부터 불구의 몸으로 태어난 자가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보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명이나 팔자의 소관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 땅 위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므로 운명이나 팔자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사건의 저변에는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섭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하게 하신 것입니다(빌립보서 4:6-7).

제자들의 사고는 모든 인생의 고통은 죄 값이라고 보았습니다. 자신이 범죄해서 당한 것이거나 아니면 그 부모와 조상이 범한 죄 값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었으니 그 부모나 조상이 범한 죄 값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틀린 것이 아니지만 문제의 해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안목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이었지만 예수님은 긍정적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① 인간의 존엄성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죄의 고통 이전에 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 주기 위해서 입니다. ② 미래의 행복을 주기 위함입니다. 세인들과 제자들은 현재의 고통은 과거적인 것으로 보았으나 주님은 현재의 고통에서 미래의 기쁨과 감격을 보여 주었습니다. ③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이 땅 위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밀알로 살았습니다. 주님을 통해서 어두운 영혼에게 새로운 광명의 빛이 비치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는 흑암의 때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 보면 구걸하는 거지가 소경이 되어 불행한 생애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물을 보지 못하는 육신의 소경이 우리나라에 25 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지식의 소경도 있고 신령한 세계를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으로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육신의 눈은 떴어도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것은 영적 소경입니다. 육신의 소경은 볼 수 없어서 불행하지만 영적 소경은 더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소경이나 지식의 소경은 자신이 소경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영적 소경은 자신이 영적 소경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환경이 변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내가 변하고 내 눈이 신령한 눈으로 변하여야 합니다. 회개할 때 진리의 눈이 밝아집니다. 회개할 때 성령을 받게 됩니다. 회개할 때 신앙이 성숙하게 됩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시작됩니다. 회개할 때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대들보가 뽑혀나가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달라지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내 감각의 눈이, 내 영적인 눈이, 내 시각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새로워지려면 바르게 보는 눈을 가져야 됩니다. 눈이 흐려지면 만사가 잘못됩니다. 아무리 힘써도 소용이 없습니다. 유명한 삼손도 눈이 빠지고 나니 그 힘이 소용이 없습니다. 눈이 어두우면 힘도 돈도 자유도 소용이 없게 됩니다. 우리는 심령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주께서 주신 빛을 통하여 초점을 바로 하고 주님의 신령한 세계를 보고 흡수하고 소유하여 누리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복된 사람은 언제나 밝은 면을 바라보면서 말하지만, 불행한 사람은 언제나 어두운 면만 보고 말합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장미꽃을 보면서 "장미는 꽃은 아름다우나 가시가 있어 나쁘다"고 말하지만, 긍정적인 사람은 "가시나무에도 이런 아름다운 꽃이 피는구나"라고 감탄합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아침에 눈이 하얗게 내린 것을 보고 "아이고, 오늘도 길이 빙판이 되어 자가용 대신 지하철을 타야하다니 이제는 눈이 지긋지긋하다"라고 말하지만, 긍정적인 사람은 "아, 너무 아름답다. 내 마음도 이렇게 좀 아름다웠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합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비가 오면 "참 더럽게 비가 쏟아지고 있네"라고 하지만, 긍정적인 사람은 "시원스럽게 비가 오는 구나"라고 말합니다.

때와 시를 분별하는 지각이 생긴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 세상에 빛이라"(4-5)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우리 몸의 지체 중에서 눈의 역할은 참으로 귀합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가치관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것은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대 변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삶의 의식구조와 가치관의 변화가 없으면 안목이 바뀔 수 없습니다.

눈이 가장 맑은 곤충은 파리

이 세상의 곤충 중에서 눈이 가장 맑은 곤충은 '파리'라는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파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끊임없이 두 팔로 얼굴의 대부분을 다 차지하고 있는 눈을 닦습니다. 파리의 눈은 여러 개의 눈이 합쳐진 겹눈입니다. 겹눈에 먼지라도 앉으면 눈앞의 먹잇감이나 자기를 죽이려는 적들의 모습이 여러 개로 겹쳐 보인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낱눈들을 하나하나 티 없이 깨끗하고 반들반들하게 열심히 닦아야 합니다.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 열심히 눈의 청결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팔복 중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 했습니다. 파리가 눈을 닦는 것처럼 사람들도 열심히 마음을 닦아야 하나님이 보입니다. 마음의 눈에 먼지나 오물이 묻으면 딴 것이 보여 위험해집니다. 마음을 티 없이 깨끗하고 밝고 맑고 선하게 유지시키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눈을 열어 모든 것을 밝히 보게 하시는 분입니다.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영적인 안목이 열리고, 사건을 보는 안목이 열리고, 때와 시를 분별하는 지혜가 생기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고 오늘 우리 앞에 닥친 어려움을 통해서“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감사가 나오게 되며, 여러분은 범사에 형통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해인의 '보게 하소서'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당신은 나에게 두 눈을  선물로 주셨지만
눈을 받은 고마움을 잊고 살았습니다.
눈이 없는 사람처럼 답답하게 생동할 때가 많았습니다.
먼지 낀 창문처럼 흐려진 눈빛으로
세상과 인간을 바로 보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것들과는 거리가 먼 헛된 욕심에 혈안이 되어
눈이 아파 올 땐 어찌해야 합니까?
웬만한 것쯤은 다 용서하고 다 받아들이는
사랑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소서.

너무 가까이만 보고 멀리는 못 보는 근시안도 아닌
너무 멀리만 보고 가까이는 못 보는 원시안도 아닌
사물의 중심을 바로 못 보는 난시안도 아닌
밝고 맑은 시력을 주소서,

주여! 편견과 독선의 색안경을 끼기보다
기도의 투명한 안경을 끼고 살아가는 기쁨을 알게 하소서.
남을 비난하고 불평하기 전에 나의 못남과 어리석음을 먼저 보게 하여 주소서.

결점 투성이의 나를 보고 절망하기 전에
다시 한 번 당신의 사랑을 바라보게 하소서
다시 한 번 당신께의 믿음으로 눈을 뜨게 하소서
필요한 때에 필요한 것을 볼 수 있는 지혜의 눈과 분별력을 주소서.
살아서 눈을 뜨고 사는 고마움으로 언제나 당신 안에 보게 하소서
오늘도 샅샅이 나를 살피시는 눈이 크신 주님! 

(서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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