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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돈 문제가 아닙니다 (행 24: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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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눈 바꾸는 운동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물질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는 다니지만 아직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 물질적 부유함이 신앙의 척도가 되는 것을 옹호하는 논리도
이제는 유치한 기복주의에서 좀 더 체계화해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는 어디까지나 복음이 존재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모든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떤 평가를 내릴 것인가는
복음적인 관점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6:24절에
[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리라 ] 고 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일, 이것이 우리의 약점, 아킬레스건입니다. 그러나 로마 총독 벨릭스 앞에선 바울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신앙의 삶의 위치를 재점검할 수 있는
은혜의 말씀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군대 호위를 받으며 당시 총독이 거하던
가이사랴로 후송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변사 더들로를 데리고 와서 총독에게 바울을 고소합니다.

1. 변사 더들로가 법정에 선 바울을 무엇이라고 송사하며
이 말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은 무엇일까요?(1-5절)
변사라는 말은 법과 언변에 능한 사람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바울을 송사하기 위하여 변호사를 대동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변사 더들로가 총독 벨리스에게 바울을 무어라고 송사하는가 하면
언변가니깐 먼저 총독에게 아부성 발언을 합니다.
3절 [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무지 하옵나이다 ]
더들로의 논고는 의례적으로 재판장을 존중하는 차원을 넘어
지나친 아첨으로 시작됩니다.

아첨의 요지는
벨릭스의 뛰어난 통치력으로 민족이 깨어나게 되고
태평을 누리게 된데 대해 전적으로 환영하며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더들로의 말이 얼마나 아첨의 말인가 하면
당시 역사가 <요세푸스>나 <타키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총독 벨릭스는 뇌물과 여색을 좋아하여
심지어는 강도떼를 부추겨 약탈하게 하고는
약탈물을 나누어 가졌다는 이유로
나중에 유대인의 탄원으로 본국으로 소환되어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더들로는 바울을 모해하기 위하여
총독 벨릭스에게 지나친 아첨으로 논고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총독 각하, 더 괴롭히지 않기 위하여 긴 말을 하지 않겠으니
관용하여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5절 [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
변사 더들로가 바울을 보고 한 말
이 사람은 염병이고 소요케 하는 자요 이단의 괴수라 는 말
당시 그 지역을 다스리는 책임자에게 상당히 신경을 거스리는 말입니다.
1) 염병이라는 말
로이모스라는 말인데 흑사병과 같이 전염성이 강하고
감염이 되면 치명적인 전염병을 가리키는 말로서
당시에는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염병인 것입니다.

2)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 란 말
식민지 총독에게는 소요, 즉 반란은 가장 크게 다루는 죄목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소요케 하는 자라고 고소하는 것입니다.

3)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이 말은 종교적인 이단이란 말을 넘어서
로마에 저항하는 정치적인 나사렛이란 당의 괴수라는 말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한 구절로 묶어서 말한다면
이 사람은 염병들린 사람처럼 가는 곳곳마다 예수의 도를 퍼뜨려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는 말입니다.
더들로는 이런 말로 벨릭스 총독에게
바울이야말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위험인물이며
로마 정부에 반기를 들고 일어날 가능성이 많은 존재로
부각시키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로이모스 사람 - 물론 이 말은 변사 더들로가 바울을 향해
모욕적인 발언입니다만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처럼 로이모스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윌로우 크리닉 교회 빌 하이벨스 목사가
[ 예수를 전염시키는 사람들 ] 이란 전도에 관한 책을 써서
우리에게도 전도라 하면 - 전염시키는 사람
로이모스의 사람이 생소한 언어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디를 들어가든지 영향력을 주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전염성을 가진 로이모스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이 한 직장에 들어갔는데
그 직장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장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잘못된 것입니다.
껍데기 신자든지 사이비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디를 가든지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치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에게 한 말
행17:6절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 - 같은 말입니다.

우리 로이모스 전도대도 여기에 기인한 명칭입니다.
내가 로이모스의 사람이 되자면
내가 예수를 만나 나의 가치관이 바뀌어 지고
성령충만을 받아 내 마음에 예수의 열정을 품고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예수의 열병을 앓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변사 더들로가 고소하는 바울의 죄목 또 한 가지가 무엇인가 하면
2. 변사 더둘로가 송사하는 바울의 죄목이 무엇이며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6-9절)

성전 모독죄입니다.
6절에 [ 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
실지 유대인들이 볼 때는 성전 모독죄가 가장 큰 죄이지만
총독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슬쩍 뒤로 돌려놓은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고소당하고 있는 죄목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성전을 모독하는 자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 이유이지
그 이면에는 바울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는 것
더 깊이 올라가면 복음을 방해하려는 사탄의 계략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복음을 앉고 나아가는 길에는 항상 방해 세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 방해 세력이 때로는 세상 권세를 힘입고 가로 막기도 하고.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서도 핍박을 하기도 합니다.

이제 더들로의 송사에 대하여 총독 벨릭스는
바울에게 변론 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3. 총독 앞에서 대답하는 바울의 변명을 통하여 우리를 일깨워주는 영적 교훈이 무엇입니까?(10-21절)
바울의 변론의 내용이 10-21절에 나옵니다.
바울의 변론의 내용은 더들로가 고소한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 합니다.
더들로가 성전을 모독했다고 하는데, 11-12절에
[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지 열이틀 밖에 못되었고 ]
[ 저희는 내가 성전에서 아무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과 또는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
이렇게 바울은 고소당할 일이 없고, 하지도 안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13절에 고소자들의 증거도 분명치 않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바울은 한 것은 또 분명히 했다고 말합니다.
14-15절에 [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
그러니 나는 조상의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 - 즉 성경을 믿는다
나는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는다
바울의 고백은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믿고 부활을 믿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죄목이 될 수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16절입니다.
[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양심을 바꾸기도 합니다.
그래서 순간 아첨과 거짓말과 과장의 말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자기가 던진 그물에 자기가 걸려들기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주장한 것에 대하여 최후 보루는 양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누구 앞에서도 떳떳한 사람입니다.
바울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온갖 고난과 수모와 결박과 매를 맞았기 때문에
위대하다기 보다
그 누구 앞에서도 떳떳하게 설 수 있었기 때문에 위대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떳떳한 사람이기에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겪었던 일을 낱낱이 보고합니다.

17-20절까지 요약하면
바울이 전도 여행을 마치고 해외에서 돌아오면서
이방 교회의 구제헌금을 모아서 가지고 온 것과
하나님 앞에 결례를 드린 것을 다 이야기 합니다.
만약 당신들이 고발한 것처럼
해외에 있는 유대인들이 나를 반대한다고 하면
자기들이 직접 송사할 일이지 왜 당신들이 나서서 송사를 하는가?
그렇다면 이 재판에 나와서 당당하게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반박하면서 내게 문제가 있다면
내가 공회 앞에서 부활을 믿는다고 말 한 것 밖에 없다 는 것입니다.

재판정에서 자기를 변호할 기회를 갖게 된 바울은
이렇게 아주 사리가 분명하게 자기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송사하는 이들의 허점을 날카롭게 지적했고,
자신의 결백에 대해서도 주저없이 분명히 주장했습니다.
강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신의 신앙문제에 이르러서는
송사하는 이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양심의 거리낌 없이 떳떳하게 살아왔음을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복음 앞에서 당당한 바울의 태도는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할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사랑하는 내일의 가족 여러분~!
언제나 정직이 이긴다는 것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권력이 은폐하려고 해도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바울의 변론을 듣고 총독이 어떻게 판결을 내립니까?
4. 총독 벨릭스의 판결이 사도 바울에게 어떻게 내려졌으며 그 결과가 가져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22-23절)

22-23절에 보면 벨릭스 총독이 재판을 보류시킵니다.
[ 나도 이 도에 대해서 잘 안다
그러니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더 들어 보고 그때 가서 처결하자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누구든지 수종하는 것을 금치 말라 ] 고 하고는
재판을 끝냅니다.
벨릭스가 나도 이 도에 대하여 잘 안다 고 말하는 것은
벨릭스는 유대 지방에서 상당히 오랜 생활과
24절에 그의 유대인 아내 드루실라 덕분에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재판은 정치적 문제로 시작되었지만,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 유대인들의 비난이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음을 알고 그는 논쟁자들 사이의 대립 가능성을 없애고
그의 관할권 내의 평화를 유지하고자 재판을 연기시켜 버렸습니다.
총독의 재판 보류
물론 총독 벨릭스는 다른 혹심이 있어서 재판을 보류시켜 놓았지마는
여기에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의 간섭이 있습니다.
총독의 재판 보류는 바울에게 있어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작용을 한 것입니다.
만약 무죄다, 라고 했으며
사십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바울을 죽이겠다고 기다리고 있는데
감옥 밖으로 나오면 언제 어떻게 살해당할지 모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바울아~ 아직은 나가면 안된다 그래서 보류한 것입니다.
보류도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한가지 하나님의 은혜는
바울은 보호를 받으면서 휴식을 취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2년 동안 다른 일 없이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지루한 시간인 것 같지마는
바울에게는 영육 간에 재충전할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인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야생마처럼 뛰어 다니던 바울이 2년이나 갇혀 있었으니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본인은 몹시 답답했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휴식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전도여행을 3차례나 하면서 얼마나 험난한 세월을 보내며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지 모릅니다.
모르긴 몰라도 옆에서 좀 쉬어야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고,
몸을 돌보지 않고 뛰었을 겁니다.
그런 사람은 이렇게 강제로라도 가둬두지 않으면 쉬지도 않거든요.
비록 로마 군대에 갇혀 있었지만 안에서는 자유로웠어요.
친구들은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 안에서 영육 간에 휴식을 취하게 되고
후에 재판을 받기 위해서 공짜 배를 타고 로마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으리으리하고 장엄한 모습으로 입성하지 않고
죄수의 몸으로 오기나 했는지 알 수도 없는
이런 모습으로 로마로 들어가게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합니다.
이때 바울을 싣고 간 그 배를 가리켜 역사가 <토인비>는
'바울을 싣고 간 것이 아니라 유럽을 싣고 갔다'고 말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죄수 하나이었지만
그 죄수가 전한 복음이 유럽 전체를 살려놓았다는 말입니다.

재판을 맡았던 벨릭스 총독이 바울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5. 바울에 대한 총독 벨릭스의 관심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주고 있습니까?(24-27절)

그래서 24절 이하에 보면
수일 후에 그 아내와 함께 바울을 불러 예수에 관한 도를 듣습니다.
하지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 ” 에 대한
바울의 강론으로 생긴 두려움이 복음의 귀를 닫게 만듭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야기 하자 하고는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벨릭스에 관한 이야기 중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26절 [ 동시에 또 바울에게 돈을 받을까 바라는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 하더라 ]
총독 벨릭스가 바울의 인격에 대해서도 감화를 받았겠지만
총독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혹 바울이 자기에게 돈을 좀 안 갖다 주나 싶어서 불렀다는 것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돈을 밝혀도 그렇지 돈이 나올만한 건더기가 있는 사람에게 바라야지,
어떻게 바울에게 돈을 바란단 말입니까
평생 집도, 가족도 없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떠돌다가
유대인의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
벨릭스 총독이 '돈을 받을까 하여'
바울을 불러 더 자주 이야기를 했다고 하니
명색이 총독인데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걸까요?
아니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우리가 보기에는 벨릭스가 어리석어 보이지만
벨릭스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러는 것 아닐까요?
바울은 마지막 세 번째 전도여행을 끝내면서
간절한 소망은 로마로 갔다가 서바나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전도여행은 고린도 지역에서 마쳤습니다.
고린도는 위치가 예루살렘보다는 로마에 훨씬 가깝습니다.
바다 하나만 건너면 로마인데
바로 로마로 가면 될 터인데 로마와 반대쪽에,
그것도 멀리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돌아옵니다.
왜? 곳곳에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숨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도 예루살렘으로 가면 체포될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하는데
바울이 결연한 자세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까?
여기에는 와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기 전의 마지막 전도여행 중에
구제 헌금을 많이 모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막대한 헌금을 각 교회의 대표성을 지닌 사람들로 하여금
지참케 하여 함께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습니다.
바울이 어렵던 시절에 거액을 가지고 들어왔으니까
아무리 교회 내부 행사라고 하더라도 소문이 안 날 리가 없죠.
소문은 항상 조금씩 굴절되거나 과장되게 마련입니다.
구체적인 내막은 잘 모르면서
그저 바울이 부유층 사람들과 함께
어마어마한 돈을 가지고 왔더라는 소문이 났겠죠.
그래서 벨릭스가 돈 욕심을 내는 겁니다.
돈을 좀 우려내려고 해도 상대를 잘 골라야 하는데 잘못 짚었어요.
결국 돈은 한 푼도 안 나오고
벨릭스가 먼저 총독의 자리를 내놓고 떠나게 됩니다.

총독에게는 두 가지 관심이 있었는데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고, 하나는 돈에 대한 관심입니다.
어떻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요.
하나님도 좋고, 돈도 좋고 - 다 좋지요
그러나 어디에 더 관심이 있느냐? 가 문제입니다.
교회도 나오고 장사도 잘되고
교회 나와서 예배도 드리고 오후에는 골프도 치고 등산도 가고
교회 와서 찬송도 잘하고 노래방 가서 신나게 놀기도 잘하고
교회 와서는 하나님이 좋고 밖에 나가면 세상이 좋은 교인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지금 바울은 복음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지만
총독 벨릭스는 어떻게 하면 돈 좀 안생기나?
내게 유익이 있나 없나? 여기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돈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문제요 생명문제가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돈 많이 벌은 것을 칭찬할까요? 신앙 지킨 것을 칭찬할까요?
물론 사람들은 돈 많이 벌인 장로님을 칭찬하고
교인 많이 모은 목사를 칭찬할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신앙 지킨 장로, 경건한 목사를 칭찬할 줄 믿습니다.

크리스천 기업으로 꼽히는 몇몇 기업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경영 이념은
'주일은 쉽니다' 라는 문구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원 에벤에셀 같은 기업은 선전에 꼭 주일은 쉽니다 라는 문구를 넣습니다.크리스천 기업임을 표방하면서 주일날 일을 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를 않지 않습니까?  
진정한 크리스천 기업들은 '주일은 쉽니다' 하는 것을
그 어떤 경영 방침보다 중요시합니다.E-랜드 역시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본사는 물론 모든 매장들이
황금알을 낳는 날이라는 주일에 어김없이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E-랜드의 이름을 걸고 있으면서도
문을 닫지 않는 곳이 꼭 한 군데 있습니다.  
바로 강원도 설악산 입구에 위치한 켄싱턴 호텔입니다.  
E-랜드는 '아름답고 건강한 휴식을 제공한다'는 비전을 갖고
지난 95년 호텔업에 진출했습니다.  
그러나 주일 성수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일반 매장들은 주일에 문을 닫으면 그만이지만,
호텔은 토요일 밤 12시가 되었다고 해서
투숙객들에게 나가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그래서 고민 끝에 새로운 원칙을 정했습니다. 
주일에는 들어와 있는 손님 외에는 원칙적으로 영업 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호텔 내에서 원하는 손님들과 같이 아침에 예배를 드리도록 한다.  휴일은 교대로 다른 요일에 갖도록 하고,
덕스럽지 못한 일은 모두 폐쇄한다.'그런데 켄싱턴호텔이 크리스천 기업의 소유이긴 하지만
크리스천들만 투숙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실 그들의 요구가 아니더라도 호텔 수익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빠찡꼬 나이트클럽 등이 필요했습니다.하지만 호텔 측은 이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니 판촉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주일에 집중되는 결혼식과 각종 연회들을 모두 포기해야 했습니다.  
시작 후 2년은 장애물의 연속이었습니다.그래서 운영진에서 켄싱턴호텔의 경영 이념을 이해하는
고객들을 중심으로 멤버십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허니문을 오는 신혼부부들을 유치했습니다.  
주한 외국인들 역시 이들의 타깃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설악산을 찾는 이유는 진정한 재충전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좋은 서비스와 깨끗한 환경,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원했습니다.  지금 켄싱턴호텔은 다른 호텔들보다 외국인들의 투숙율이 매우 높다고 합니다.호텔 측은 얘기합니다.  
[ 판촉활동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주일 성수는 타협될 수 없기에 오히려 소중함을 느낍니다.  ]
켄싱턴호텔의 주일성수 원칙은 지금도 지켜지고 있습니다.  
돈 문제가 아닙니다. 주일이면 어김없이 예배를 드립니다.  
끝까지 주일성수를 지켜감으로써 이 호텔은
설악의 보석, 하나님의 보석으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우리도 돈 문제 보다 신앙문제를 더 우선적으로 여기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괴로워하고 고통당하는 것
한 번 하나님 앞에 고백해 봅시다.
[ 돈 문제가 아닙니다 ]

오늘 말씀의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1. 우리도 로이모스의 사람이 됩시다.
예수의 열병을 앓아 예수를 전염시키는 사람되시기 바랍니다.
2. 사건 앞에서 문제 앞에서 모든 것을 물질적 괁점에서
돈 문제로 바라보지 마시고
복음적 관점에서 신앙 문제로 바라보면서
돈 문제가 아닙니다 라고 분명히 고백할 수 있는 교우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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