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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뜻을 정하여(1) (purposed in his heart) -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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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초기의 도가(道家)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성은 갈(葛)이라고 하고 이름은 홍(洪)이며 호는 포박자(抱朴子)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영부월이정간 거정확이진언 차위충신야'(迎釜鉞而正諫 據鼎 而盡言 此謂忠臣也)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도끼로 맞더라도 바르게 간하며 가마솥에 넣어서 삶아 죽이려하더라도 바른말을 한다면 이를 충신이라 이르니라"는 말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에게 지극히 합당한 고사(古詞)라고 생각됩니다. 다니엘서는 구약의 계시록이라고 불리워 질만큼 구약에 있어서 계시적 영감의 결정체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을 받은 것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원년이었습니다. 그때 유다왕은 여호야김이었습니다. 그가 위에 있은 지 3년째 되던 해였다고 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공격한 것은 단번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 번이나 계속했습니다. 본문은 느부갓네살 왕이 첫 번째 공격해 왔을 때 일입니다.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전격 포위했습니다. 참혹하고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할례 없는 이방 군대가 성지를 침략했습니다. 이것은 유다 백성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불명예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죄 할 땐 언제나 이방인의 침략을 당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유다는 죽음에 이르는 수치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분명 유다의 국치입니다. 마침내 여호야김 왕은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이때 다니엘을 위시한 왕족들 일부와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다니엘은 예루살렘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유대 왕 여호야김 때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왕족과 귀족들을 사로잡아 갈 때에 그의 세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함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는 나이가 어리고 용모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머리가 영특하여 언어와 학술에 능통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을 시종으로 선발하여 3년간 갈대아인 학문과 방언을 배우도록 하였습니다.
본문 1장 2절에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기구 얼마를 그의 손에 붙이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의 묘에 이르러 그 신의 보고에 두었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벨론이 유다를 공격하는 당위성과 정당성을 웅변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과 왕과 왕족이 이방 정복자의 전리품으로 전락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성전 기명을 자기 우상 신전의 창고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한 성전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타락하고 부패한 종교의식과 외식으로 악용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 성전과 성전 기명마저도 이방인들의 발굽아래 짓밟히게 했습니다. 거룩한 성전의 기명들이 이방 우상 신전의 창고 속으로 옮겨져 버렸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정복지에서 빼앗아 온 전리품과 포로들은 바벨론 제국의 위용을 선전하는데 유감없이 사용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유능한 유다청년들을 자기 왕궁으로 데려온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들을 철저히 바벨론화 시켜서 전 유다를 바벨론화 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의 정책은 유대포로 소년들에게 큰 시험이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빼앗긴 삶에도 자기 뜻이 있을 수 있을까? 생존권마저 송두리째 빼앗긴 처지에서도 자기의 뜻을 세울 수 있는가?
끌려 다니는 삶인데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자신이 뜻을 세운다는 것은 바로 의를 위해 죽고자 하는 자의 투철한 역사적 사명의식만이 이를 가능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Ⅰ. 학문의 절대화를 상대화시키기 위함 입니다.

본문 1장 4절에 {곧 흠이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며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을 가르치게 하였고}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먼저 유다 청년들에게 갈대아 학문과 언어를 교육했습니다. 이것은 곧 바벨론 제국의 역사와 문화와 정치, 종교를 가르쳐 이 청년들을 통하여 전 유다를 바벨론화 하기 위한 정책이었습니다. 결코 학문이나 언어 자체가 악하거나 죄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당시 애굽이나 바벨론 제국 등에는 주로 법률학, 천문학, 수학, 점성학 등이 유행했는데 저들은 이러한 학문들을 미신과 결부시켜 다루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과학 지식을 가지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식에 도전하거나 불의의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세상학문을 연구하는 것을 핑계로 성경을 읽지 않거나 신앙생활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세상 지식을 숭상하는 지경에 이르면 그 학문들은 신앙생활에 시험거리가 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제국의 확장과 번영을 위해 유능한 히브리소년들에게 바벨론 학문을 주입시키려 했습니다. 참으로 인간적으로 제국의 장래를 끔찍이 생각하고 있다는 데서 평가할 만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학문을 배우는 것은 그 과학지식이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적 수단으로 활용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학문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시험이 될 때가 많습니다.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세상학문을 배타할 권리가 주어진 일이 없습니다. 더욱이 기독교인들이 세상학문에 대해 무식해도 좋다는 말은 성경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생활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학문을 할 때에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겸손입니다. 다음으로 지적호기심도 필요한 태도입니다. 학문에 있어서의 겸손은 너무도 중요한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조금 알면서 많이 안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학문적 진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열등감을 가질 만큼 겸손해야 합니다.

상대화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비판 가능한 것입니다. 절대화는 이것에 철저히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한 절대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세상 학문은 상대적 위치에 철저히 묶어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절대적이라는 부동의 가치관을 부여해야만 합니다.
기독교인은 우상을 배척합니다. 학문이든 재물이든 명예이든 세상의 것을 절대화하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론이 우상이 되면 그 이론은 이데올로기가 됩니다. 만약 기독교인이 이 세상에 있는 이데올로기를 따른다면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는 사람을 기계화시키고 박제화시키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Ⅱ. 물질의 절대화를 상대화시키기 위함 입니다.

본문 1장 5절에 {또 왕이 지정하여 자기의 진미와 자기의 마시는 포도주에서 그들의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 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이는 그 후에 그들로 왕의 앞에 모셔 서게 하려 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으로부터 저들에게 주어지는 음식물은 왕실에서 지정하여 주는 특수한 음식이었습니다. 그 음식물들을 통하여 저들이 육신을 튼튼히 기르고 아름답게 하여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왕실에 수종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의 숨은 의도는 ,다른데 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의 신앙을 알고 있는 왕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게 하므로 저들에게 신앙적 패배감을 심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의 진미와 왕이 마시는 포도주는 유대 소년들에게 큰 시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왕이 주는 음식물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은 자신을 더럽히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본문 1장 8절에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더럽힌다}는 말은 신성 모독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1) 왕이 주는 음식물은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1장 10-12절에 {무릇 물에서 동하는 것과 무릇 물에서 사는 것 곧 무릇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이들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니 너희는 그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을 가증히 여기라 수중 생물에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可憎)하니라}고 했습니다.
왕의 진미와 포도주들 중에는 이스라엘 선민들로서는 먹지 못할 부정한 음식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짐승이나 생물들을 먹지 못하게 함으로 선민의 몸을 거룩하게 구별하였습니다.
레위기 11장 44-47절에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이는 짐승과 새와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과 땅에 기는 모든 기어다니는 것에 대한 규례니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2) 왕이 주는 음식물은 우상제물이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9장 3절에 {저희가 여호와의 땅에 거하지 못하며 에브라임이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7-29절에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라고 했습니다.

Ⅲ. 정치의 절대화를 상대화시키기 위함 입니다.

본문 1장 6-7절에 {그들 중에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이시다]였으나 이를 {벨드사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벨(Bel)이여 그 생명을 보존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그의 친구 하나냐의 뜻은 [주의 은혜]였습니다. 이것을 {사드락}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갈대아인이 숭배하는 '태양의 영감'이라는 뜻입니다. '미사엘'은 [강하신 하나님]이란 뜻인데 이것을 {메삭}이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아쿠신 같은 분이 어디 있느냐?'라는 뜻입니다. '아사랴'는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란 뜻이었습니다. 이것을 아벳느고라 했습니다. 그 뜻은 '느고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이름은 인격의 대명사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지을 때는 그 이름 가운데 그를 향한 부푼 기대와 축복을 가득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이 없는 이름입니다. 목적이 있다고 하나 그 목적이 부질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강제로 고치는 것은 그의 인격자체를 무시하는 일입니다.

히브리식 이름을 바벨론식으로 고치는 것은 히브리 민족을 역사 무대에서 없애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이름을 개명하는 것은 바벨론 화하는데 반드시 해야 하는 첫 번째 과제 같은 것입니다. 참으로 정치적 횡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정치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데 대한 히브리 소년들의 의분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유다 소년들을 유일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히브리적 이름을 바벨론적인 우상신들의 이름으로 개칭해 버렸습니다. 이것은 참된 종교, 유일신의 종교를 말살하는 정책이었습니다. 이러한 악법의 실행은 선민의 정체성을 말살시키고자 함입니다. 우리는 지난 날 일본의 압제 아래서 이러한 창씨개명의 아픔을 체험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듯이 빼앗긴 삶에도 하나님의 뜻은 정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죽음을 불사하는 결단과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절대화에 대한 상대화 작업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전쟁입니다. 바벨론화는 이른바 종교 운동입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정책은 바로 바벨론화의 정책이었습니다. 이러한 바벨론 동화정책은 바로 적기독 운동의 술책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탄이 즐겨 쓰는 무기임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절대 교육으로 포문을 열었습니다. 일종의 바벨론화의 쇠뇌교육입니다. 그 다음은 절대 물질 만능입니다. 왕이 먹는 진미와 왕이 마시는 포도주가 바로 그것입니다. 절대 정치적 횡포로 말미암아 사람의 인격을 말살시키고 인간의 지, 정, 의와 영혼까지도 권력의 도구로 남용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고귀한 신앙생활을 빼앗아 권력의 시녀로 전락시키는 운동은 사탄이 즐겨 사용하는 수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우리의 이름과 함께 목적적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왕이 먹는 진미와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은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죄악이라고 했습니다. 계시록에는 이것을 가리켜 붉은 옷을 입은 음녀가 들고 있는 붉은 잔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종교는 절대를 지향합니다. 절대가 아니면 종교가 아닙니다. 이 세상이 학문을 절대 종교화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상대화시키기 위해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합니다. 육체주의, 과학지상주의, 황금만능주의를 절대 종교화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상대화시키기 위해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합니다. 아 세상 권력을 종교화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상대화시키기 위해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일을 하지 않기로 뜻을 정해야 합니다. - 아 멘 -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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