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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라 (민 9: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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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날의 교회를 예표 하는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광야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서 광야 교회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광야교회는 갖가지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내부적인 불평불만의 위협도 대단히 큰 것이었고, 또 외부적인 적들과의 전쟁도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큰 위험이었습니다. 낮의 해도 위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많은 사람들이 낮에 광야에서 해를 쐬게 되면 일사병에 걸릴 수도 있고 쓰러질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낮의 해도 위험이요, 밤의 달조차 위험입니다. 밤에 뜨는 달은 대단히 요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한 사람들을 쓰러뜨리고, 귀신의 유혹으로 이끌어가기에 충분한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거기다가 밤이 되면 추위를 견디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처럼 광야교회는 편안한 요소보다 위험한 요인이 훨씬 많았습니다.

이러한 광야교회에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을 주셨습니다. 낮의 구름기둥은 인도하신다는 의미도 있지만, 햇빛을 가려주어서 시원하게 해주는 역할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다는 의미도 있지만 따듯함을 주는 고마운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 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시고, 임재하시고, 인도하신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교회는 갖가지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내부적인 위험도 있고, 외부적인 위험도 존재합니다. 더구나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사상적인 차이가 교회의 위험요소로 추가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북한의 김정일 지령문에는 한국교회에 슬그머니 침투해서 교회를 파괴하라고 하는 내용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국교회는 이모저모로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인천에 가서 연합집회를 인도했는데 목회를 오래하신 목사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내가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는 순한 양, 어린 양 같았습니다. 그런데 20년이 넘어가니까 이제는 천지가 개벽을 해도 끄덕하지 않는 선수가 됐습니다.” 자기도 처음에는 순한 양이었는데, 목회의 여러 가지 위험에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고, 이리 당하고 저리 당하고 하다 보니까 이제는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그려러니’ 하고 견디는 선수가 됐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저는 얼마나 우스웠는지 몰라요. “처음에는 내가 어린 양이었다”는 말에 아주 웃음이 터졌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다른 어떤 질문보다도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스스로 던져봐야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런 상황 가운데 있는 교회를 돌보시고 계신가? 하나님은 이런 위험에 처한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가? 하나님은 과연 교회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 계시는가? 이 질문들을 던져보고, 이 질문들에 대해서 ‘그렇다’하는 확신만 얻을 수 있다면 우리 성도들은 아무런 근심도, 아무런 염려도 없이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는 아이는 어떤 골짜기를 가든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는 어린 아이가 자꾸 “아버지 점심은 주실 겁니까? 저녁은 주실 겁니까? 아버지가 지금 나를 안전한데로 인도하시는 겁니까? 아버지, 자꾸 왜 이렇게 험한 데로 끌고 가십니까?”라고 말하면서 걱정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아버지가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가고 있는데도 자꾸 걱정한다면 그 아버지가 기분이 좋을 리 없을 겁니다.
“야, 이놈아! 내가 너를 인도하는데 너는 어찌하여 걱정, 근심이 많으냐?”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1.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식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면 어떤 방식으로 인도하실까요? 오늘은 이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이 필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름기둥이 장막, 즉 성막 위에 머물러 있다가 떠오르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하! 하나님께서 진행하라고 하시는구나”하고 그 구름을 따라서 진행했습니다. 그 구름이 여러 달 머물게 되면 그대로 그 자리에 유진해서 머물러 있었고, 그 구름이 떠올라서 가게 되면 하루가 될지언정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구름을 따라서 진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육신의 눈으로,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변 국가
인 이방 나라 사람들도 “아하! 저 백성은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는 백성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는 별도의 믿음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그들을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계속 이런 방법으로 인도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광야의 인도를 마친 후에는, 구름기둥도 사라지고, 불기둥도 사라지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도 그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지은 성전이 솔로몬 성전입니다. 솔로몬이 지은 제 1성전 시대에는 성소 안에서만 구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전에는 구름이 성소 위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제는 성소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열왕기상 8장 11절에 보면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구름이 성소 안에 가득했기 때문에 제사장이 능히 서서 섬기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스룹바벨이 지은 제 2성전 시대에는 구름이 완전히 걷히게 되어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인도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학개서 2장 9절에는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고 했습니다. 스룹바벨 성전이 비록 규모도 작고 영광도 덜 찬란하지만, 그 스룹바벨 성전에는 만국의 보배 되실 예수 그리스도의 발이 서게 되실 것임을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스룹바벨 성전에 헤롯 대왕이 개축해서 헤롯 성전이라 이름 붙인 그 곳에 발을 붙이시고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름기둥의 실체요, 불기둥의 실체로서 그 성전에 서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에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인도를 의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라가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그런 실체이셨기 때문에 복음서 시대에 교회는 하나님의 인도를 근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만 따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보혜사 성령님을 하나님의 교회에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의 마음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또 성령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in us’, 그리고 ‘among us’ 우리 가운데도 거하시고 우리 안에도 거하심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님은 이 시대에 우리의 구름기둥이 되시고 우리의 불기둥이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님의 인도는 구약시대처럼 가시적이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성령님은 불가시적인 존재라는 사실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불가시적인 것은 믿음으로 바라봐야 됩니다. 가시적인 것은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불가시적인 존재를 바라보는 데에는 우리에 두가지 믿음이 요구됩니다.

2. 우리에게 필요한 두 가지 믿음

첫째는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임재하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 가운데 보혜사 성령님께서 임재하고 계신 줄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 한마디를 해도 하나님 앞에서 해야 됩니다. 우리의 행동 하나라도 하나님 앞에서 해야 됩니다. 우리의 언행심사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 안에서 행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인도해주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광야의 길이 막막할 지라도, 때로는 험한 길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마음에 불평이 일어날지라도, 분명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길에 불기둥, 구름기둥이 늘 떠나지 않고 그들을 인도하였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보혜사 성령께서도 오늘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삶을 계속해서 인도해주고 계십니다. 로마서 8장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은 지금도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계시고,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고, 믿음으로 붙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에 임재해계시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 인도하실까요? 구약 시대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인도방식에는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3. 인도하심의 네 가지 특징

첫 번째로 하나님은 순종하는 백성들에게 구름기둥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백성들 마음속에 순종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인도가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안 듣는데 왜 말씀하시겠어요? 하나님께서 이리로 가라 하시는데 안 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왜 상관하시겠느냐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구름기둥을 주십니다. 출애굽기 13장 21절을 보면 구름기둥이 처음으로 나타난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13장 21절에 구름기둥이 처음으로 나타나고 민수기 9장에 구름기둥이 두 번째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출애굽기 13장과 민수기 9장의 공통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켰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을 지키고 난 후에 구름기둥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3
장은 첫 번째 유월절, 민수기 9장은 두 번째 유월절을 지키고 난 후에 구름기둥이 그들에게 임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유월절을 순종하여 지킬 때, 어린 양을 1월 10일에 준비해두었다가 1월 14일이 되면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집 안에서 어린 양 고기를 먹고, 쓴나물을 먹으며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이 세 가지를 먹으면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이처럼 어린 양의 피를 의지하여 유월절을 지키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나타났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될 것입니다. 순종하는 백성에게 구름기둥의 인도가 있습니다.

이 사실은 그 반대 사건으로도 입증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기둥이 떠난 적이 한 번 있습니다. 민수기 12장에는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하는 사건이 나타나 있습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과 결혼을 했다고 해서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누이 미리암에게 어떤 직분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모세가 지도자요, 아론은 모세의 형이지만 모세의 말을 듣는 대변인이며 대제사장의 직분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미리암은 모세의 누이지만 아무런 직분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미리암이 모세와 같이 다니다 보니까 자기도 모세와 똑같다고 생각하였거나, 아니면 모세보다 더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어찌하여 구스 여인과 결혼하느냐?”면서 모세를 비방한 것이지요.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한 것은 단순한 비방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계질서와 인도하심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미리암을 문둥병에 들게 하셨습니다. 문둥병이 들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민수기 12장 10절을 보면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걸려 눈과 같더라”고 했습니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중보기도를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칠일후에 고쳐주겠다(12:10) 말씀하셨습니다. 미리암이 진 밖에 쫓겨나 일주일 동안 문둥병을 앓았고,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그 때서야 깨달아 하나님의 치료로 일주일 만에 다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름도 다시 일주일 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막 위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백성에
게 임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여러분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원하신다면 먼저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마음을 정해놓고 인도를 구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무슨 뜻이든지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며 인도를 구할 때에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보게 될 줄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인도는 애매모호하지 않습니다. 헷갈리는 방식으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때에 수증기를 조금 피웠다가 누가 볼까봐 무서워서 싹 없애고는 “야! 내가 인도해줬는데 봤냐? 못 봤냐?”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낮에는 분명하게 보이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누구라도 볼 수 있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멀리서도 볼 수 있고, 가까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잘 안보여서 몰랐다고 핑계를 댈 수가 없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또한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하심은 언제나 방향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단 한순간도 애굽방향으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언제나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향합니다.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욕심입니다. 이 광야교회에도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파워가 대단히 강했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십시오. 여러분. 애굽은 죄의 땅이요, 노예의 땅이요, 마귀가 지배하는 땅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돌이켜 그 땅으로 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땅으로 후퇴하지 말고 계속해서 전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언제나 말씀과 일치합니다. 오늘 본문에 세 번이나 반복된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였고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유진하였고(18절) 혹시 구름이 장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을 좇아 유진하고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였으며(20절)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고 또 모세로 전하신 여호와의 명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23절).” 여기서 공통적인 내용은 여호와의 명을 좇아 언제나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여호와의 명령이라고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는 언제나 여호와의 명령과 일치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으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인도가 아닙니다. 어떤 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유
부남인데 성가대를 지휘하다가 예쁜 성가대원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 여자가 제 이상형인데 함께 살아도 됩니까?” 그랬더니 기도 중에 유리창에 “그래”하는 답이 나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응답은 유리창이 아니라 TV 화면에 선명하게 나타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은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자기 아내하고 평생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성가대의 예쁜 여자와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면 예언은사가 있는 사람을 찾아가거나, 아니면 어떤 경우에는 점쟁이를 찾아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예언이든, 환상이든, 꿈이든 하나님의 분명하신 말씀과 어긋나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가 아닙니다. 이사야서 8장 19-20절에 이사야 선지자는 이 원리를 분명하게 선포했습니다.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하리라” 아무리 신접한 자와 마술사가 듣기 좋은 예언을 해도 말씀과 맞지 아니하면 오히려 그들이 생명을 마치게 될 것이라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신명기 29장 29절에도 이 원리를 강조합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오묘한 일(Secret things)입니다. 이것은 비밀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예정하셨고, 하나님만이 아시는 미래의 일입니다. 그런 것은 우리의 알바가 아닙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단지 나타난 일(Revealed things)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히 계시된 일을 배우고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계시된 뜻도 모르고 행치 아니하면서 미래 일을 구하는 것은 미신적입니다. 우리가 계시된 말씀을 모르고 미래의 일을 점치고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점쟁이한테 가시지 마세요.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실 것인지 그것을 알 필요는 없습니다. 오묘한 일은 여호와께 속하였고 오직 나타난 일은 우리와 후손에게 영원히 속한 것입니다. 율법의 말씀을 지켜 행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제일 중요한 포인트는 공동체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개인적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중요한 포인트는 공동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할 때에는 공동체의 뜻을 중요시 여겨야 됩니다. 잠언 15장 22절에도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도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교리를 교회회의를 통해서 결정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회의를 통해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할례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결정을 했습니다. 그 때에 예루살렘 회의의 의장이던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결정은 성령과 우리가 공동으로 내렸다.”

유명한 네비게이토선교회를 창시한 도슨 트로트맨(Dawson Trotman) 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뇌와 상식을 주셨을 때에는 벌써 우리를 상당히 인도하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두뇌로 생각하고 상식으로 판단하는 것만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단히 많이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다수가 믿음으로 생각하고, 다수가 믿음으로 판단하는 것은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인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결론

구약의 광야교회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인도하셨듯이 신약교회, 즉 오늘 우리의 교회에도 보혜사 성령님께서 임재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순종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불순종은 하나님의 임재를 거두어갑니다. 우리는 애굽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애굽은 죄와 마귀의 노예 된 곳입니다. 우리의 나갈 방향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나가야 합니다. 계시된 말씀을 사랑하고 존중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건전성은 계시된 말씀을 높이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신령한 것을 좆아 다닌다고 해서 신앙의 건전성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계시된 말씀을 중요시 여기고 사랑하며,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다보면 신령한 현상도, 성령님의 인도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구할 때에 나 자신만 생각하지 말고 공동체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에 성령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임하여 인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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