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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옥 안에서 구하는 유익 (빌 1: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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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전영화 중에서 빠삐용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잘 알려진 남자배우인 스티브 맥퀸이 주연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 주인공 빠삐용은 무죄이지만 살인죄로 누명을 쓰고 상어떼가 득실거리는 바다가 있는 악마의 섬으로 보내어지게 됩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가장 끔찍한 감옥에 갇히어 도저히 탈출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빠삐용은 끝까지 자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탈출을 시도합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탈출을 위하여 수십미터의 벼랑으로부터 야자열매를 채운 자루와 함께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탈출에 성공합니다. 그는 망망한 바다에 미끄러지면서 낡은 야자열매 포대 위에 엉거주춤 누워 이렇게 소리지릅니다. “ 난 자유다 이 놈들아 난 자유다”그러면서 끝없는 바다에 빠삐용이 모습이 사라지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납니다. 이 영화는 실존인물을 영화하한 것입니다. 빠삐용에게 인생은 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빠삐용은 자유를 쟁취해야 했습니다. 살아있는 생존만을 삶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유가 있는 삶을 살 때 삶은 생존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감옥과 같은 곳에서 우리는 자유를 위해 탈출하기를 소망합니다.

어떤 유머집에 보니까 사람에게는 6가지 감옥이 있다고 합니다.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도록 자기를 가두고 자유를 구속하는 감옥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자기 도취의 감옥이 있습니다. 공주병 왕자병에 걸린 사람들이 갇힌 감옥입니다.
둘째 비판의 감옥입니다. 항상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고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갇힌 감옥입니다.
셋째 절망의 감옥입니다. 항상 세상을 부정적으로 불평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갇힌 감옥입니다.
넷째 과거지향의 감옥입니다. 과거 옛날만이 좋았다고 하면서 현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갇힌 감옥입니다.
다섯째 선망의 감옥입니다. 내것의 소중함을 모르고 항상 남의 것만을 크게 보는 사람들이 갇힌 감옥입니다.
여섯째 질투의 감옥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못보는 사람들이 갇힌 감옥입니다.

인생이 감옥과 같은 환경에 갇히게 될 때 무엇을 바라고 살까요?
대부분 자기 유익을 따라 살 것입니다. 자신의 자유를 구하고 자신의 새로운 삶을 구하는 것이 보편적인 상식 선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입니다.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감옥 안에 갇히게 될 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감옥 안에서 매여있는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바울이 감옥안에서 구하는 유익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탈출을 시도하지 않습니니다. 바울은 감옥안에서 빌립보교회 성도들과 같은 교회를 향해 구명운동을 벌이지도 앖습니다. 바울은 감옥안에서 두려워떨면서 불안한 매일 매일의 삶을 보내고 있지도 않습니다. 감옥안에서 제대로 자지 못합니다. 감옥 안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합니다. 감옥 안에서 제대로 놀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기뻐하고 있고 오히려 유익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환경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비록 감옥 안의 바울과 같은 환경은 아니지만 우리에게도 어렵고 힘든 환경이 있을 수 있습니다. 힘든 환경 속에서 우리가 구해야 하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1. 감옥 안에서 복음의 진보를 구합니다.

본문 12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나의 당한일"은 그가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된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감옥은 기분좋게 갈만한 곳이 못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와 같은 불유쾌한 상황에서도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승리에 찬 어조로 "나의 당한 일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를 가져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가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이 괴로운 감옥살이로 인하여 실망하거나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의 당한 일로 인하여 침체의 늪에서 헤메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로마로 가기를 원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바울의 기도는 신기한 방법으로 응답되었습니다. 그가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끌려가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놀랍고 신비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별로 부자가 아니었던 바울이 로마에까지 가는데 교통비 한 푼 들지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로마에 가기까지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수 있었습니다. 죄수의 몸으로 호송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수많은 유대인들이 기회만 있으면 바울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 간수, 죄인들, 시위대 사람, 재판관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여기서부터 세계 복음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비록 자신은 매였지만 그래서 자신은 마치 퇴보하는 것같지만 복음진보의 기회로 여길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환경을 볼때 더 환경적으로 어려운 환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가령 아파트 평수가 큰 내집에서 전세 집으로 옮겨갈 수도 있습니다. 좋은 직장을 잃고 영세한 내 사업을 하는 환경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크게 사업을 하다가 모든 것을 잃고 작은 수입의 어려운 자리의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직장을 잃고 지금 백수로 있을수도 있습니다. 바울과 같이 감옥 안에 있지 않지만 환경적으로 감옥과 같은 삶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 나는 진보하기 보다는 점점 퇴보하는 정황에서 우리가 바울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현실을 무시하는 비현실주의자같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현실을 모르는 망상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환경에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생과 환경과 역사의 주인이심을 믿습니다.
롬 11: 36에 보면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여기 “만물”이라고 한다면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가정 직장 사업 모든 환경도 포함이 됩니다. 비록 그것이 고난의 환경일지라도 여기에 포함이 됩니다. 때로 내 주변에 나를 공격하고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 힘든 환경일지라도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지금 바울은 감옥의 환경 비난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의 환경 이 상황을 결코 원망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건과 환경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가 넓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15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니" 그리고 뒤이어 16절에서는 이들, 17절에서는 저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7절에서 저들이라고 언급된 사람들은 바울이 옥에 갇히자 잘됐다고 하면서 바울을 뒤에서 욕하고 비방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감옥에 갇힌 사건보다 더 괴로운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을 비방하고 욕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함께 복음을 위하여 일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바울을 욕하고 비방하고 침을 뱉기 시작합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깨 동역자되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욕을 당할 때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그러나 나는 비록 아프고 힘들지만 그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증거되는 진보가 일어난다면 바울은 그것을 유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가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모든 환경과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시고 긍정적인 해석을 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화) 작년부터 올해까지 서점가에 베스트셀러로 팔리는 책 중에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죠엘 오스틴이라는 미국의 목사님이 쓴 책입니다. 왜 이 책이 미국과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끄는 것입니까? 부정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긍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긍정의 마음으로 살기로 끊임없이 선택해야 합니다.
긍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긍정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부정적 면이 조금도 없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비전과 우리의 비전을 일치시키고 긍정적인 마음 자세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매순간 좋은 면을 바로보아야 합니다.
현재 어떤 순간을 지나고 있든지 올바른 태도를 유지하고 열심히 찾아보면 희망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제 삶을 책임져 주실 줄 믿습니다. 이 문을 닫으셨으나 더 크고 좋은 문을 여실 줄 압니다.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복을 주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겠습니다."
이런 긍정의 믿음 긍정의 에너지를 갖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환경에 있을지라도 부정적인 마음 부정적인 생각을 갖아서는 안됩니다.
미국의 성공연구소에서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들을 분석하였습니다.
4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째 자라온 과정이 온순하게 자란 사람
둘째 언제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셋째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는 사람
넷째 하나님의 열심히 잘 믿는 사람
저는 여기서 우리가 삶이 어려워지고 힘들면 자꾸 부정적일 가능성이 더 많아 집니다.
여러분 매일 죽는다 죽는다 하면 죽을 일만 생깁니다. 그 말대로 얼굴로 죽을 상이 되고 마음도 죽음 마음이 되고 삶도 죽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은 자동차 변속기와 비슷합니다.
자동차 변속기에는 전진기어와 후진 기어가 있는데, 우리는 차를 운전할 때 어떤 기어를 넣을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두 기어를 넣는데 드는 노력은 똑같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뜻대로 인생의 행로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긍정적인 생각을 품고 하나님의 복에 마음을 두기로 결정하면 어떤 어둠의 세력도 우리가 전진하여 목적지에 이르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러나 부정적인 생각을 품고 문제점과 불가능만 바라보는 것은 후진 기어를 넣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승리에서 멀어지는 일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복에 마음을 고정시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살아가시는 삶이 되어지시기를 바랍니다.

2. 감옥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기회로 여깁니다.

20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합니다.

감옥안에서 바울은 자기가 먼저 살거나 높아지거나 좋아지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 사람들은 막다른 환경,죽음의 환경, 배신이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이름이나 체면도 이제는 소용이 없습니다.때로는 신앙까지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인생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고자 했습니다. 그는 항상 주님을 존귀하게 높이는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높이되 그것이 이론이나 말이 아니라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여기 내 몸에서 라는 말은 단지 입으로만 아니고 이론으로만이 아니라고 바울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의 진보로 여겼습니다.

누가 바울에게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었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 내 인생의 의미는 오직 그리스도이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21절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고 고백합니다. 심지어 바울은 죽는 것이 더욱 좋다고 합니다.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위기 앞에서 내가 사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우선인 인생 이것이 바울의 신앙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삶이란 바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감옥안에서 바울의 인생의 목적은 오직 예수님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이런 인생관을 얻게 되었을까요?
육체대로 하면 바울은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의 한사람으로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그리고 가말리엘의 문화생으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어디에 내어놓아도 뒤지지 않는 가치와 조건들을 가졌습니다.모두가 부러워 하는 가치와 조건들이었습니다.그런데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그것은, 바울은 이러한 가치들을 모두 분토만도 못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인생관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바울은 정말 무엇이 더욱 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바울의 가문도 학식도 바울에게 새로운 생명 새로운 삶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도상에서 만난 예수님은 그에게 새인생을 주었습니다.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혀 새로운 가치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그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바울은 내삶이 관심은 삶고 죽음이 관심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관심이었습니다. 예수님만을 살리는 삶 예수님을 높이는 삶 예수님만을 오직 나타내는 삶을 살기를 소원했습니다.

3. 감옥 안에서도 교회을 위하여 사는 소망을 갖습니다.

25절-26 “내가 살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감옥 안에서 바울의 솔직한 개인적인 기대는 빨리 죽어서 주님이 계시는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지금 여기 이땅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교회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의 섬김으로 교회들이 풍성하게 회복되어져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이 넘치는 삶을 유익으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교회의 믿음의 진보와 교회의 기쁨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바울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빌립보 교인들이 풍성한 자랑을 위하여 고백되어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바울을 배척하는 많은 세력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대한 섬김의 소망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종종 우리가 신앙의 시험을 받고 영직 침체를 받을때가 언제입니까?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을 때입니다. 믿었던 사람, 함께 봉사하며 주님을 위하여 교제하던 사람들이 나를 배신하고 욕할 때 그 상처가 얼마나 큽니까?그때 우리 속에서 교회를 섬기고 싶은 그 마음이 달아납니다. 더 이상 얼굴이 보기 싫어서 아예 발길을 끊어버리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바울이 교회를 중요하게 여깁니까? 감옥 안에서도 잊지 못하고 섬기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일까요 ? 바로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교회의 주인은 우리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눈으로 보기에 불완전하여도 주님의 이름의 이름을 믿는 성도들은 주님의 피값으로 구속한 주님의 몸의 일부 주님의 지체인 것입니다.
그냥 육적인 시각으로 우리가 교회를 바라보면 온통 낙심거리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 세상적인 시각으로 목회자를 보거나 교회 장로님들을 보거나 성도님들을 보시게 되면 우리에게 많은 실망꺼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아픔과 문제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중심에는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문제의 원인제공을 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교회를 위하여 목사가 존재합니다. 장로님들도 교회를 위해서 존배합니다. 그런데 거꾸로 목사님들의 호구지책으로 교회가 존재하는 것도 되어서는 안되고 장로님들의 명예를 위해서 교회가 존재해서도 안됩니다. 언제나 목사나 장로님들은 교회의 소모품입니다. 주님께서 교회가 필요새서 교회를 섬기라고 보낸 섬김의 도구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실망스러워하면서 교회를 떠나고 상처받아서 낙오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배제할 수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목사님이든 장로님들이든지 교회에 하나님이 파송한 하나님의 동역자일 뿐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한국 교회 목사님들이 자주 하는 농담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목사님 한분이 천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무 열렬하게 환영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주변의 평신도들이 예수님께 항의했습니다.
“예수님 세상에서도 목사님들이 제일 대접을 많이 받았는데 천국에서도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며 환영하십니까? 너무하십니다”
이런 항의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너희들이 참으로 오해하였구나 목사를 차별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가 하도 오지 않아서 오랜만에 왔길래 너무 반가워서 내가이렇게 환영하는 것이란다”라고 하더랍니다.

저는 처음 부임하여 가서 목회한 교회를 잊을 수 없습니다 .신학대학원 3학년을 마치고 유학을 가려고 준비하다가 하나님께서 면소재지에 30여명이 모이는 작은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장년 중에는 제가 제일 나이가 적었습니다. 장로님부터 안수집사님 권사님 집사님 일반 성도에 이르기까지 전부 전보다 나이가 많고 신앙의 연륜도 전부 높았습니다. 역사가 40여년이 된 교회입니다. 과거에는 150여명까지 모인 큰 규모의 교회인데 광산이 폐광되면서 모두 이사를 간 교회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4년전이었는데 저의 나이는 이제 30을 갓넘은 새파란 나이였습니다. 인생의 연륜이나 신앙의 연륜이나 무엇으로 보아도 제가 그 교회를 끌어나갈 힘이 없음을 보았습니다. 단지 내가 좀 더 나은 것은 지식인데 교회는 신학교가 아니기 때문제 그것같고는 목회를 할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 제가 3년동안 목회하면서 배운 것은 신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다 버리고 다시 주님으로부터 배우려는 마음이었습니다. 주님이 보내주신 장로님 안수집사님 권사님들에게 배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신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곳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의 교장 그 교회의 머리는 바로 주님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얼마나 평안하고 하나되고 잘 부흥되는지 모릅니다. 장로님들은 장로님대로 성도들은 성도대로 서로 교회를 위하여 주님을 섬기듯이 섬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섬기려고 하는 삶은 결코 상처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삶일수록 상처를 받습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므로 내가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기 때문에 내 위신과 명예가 떨어지기 때문에 상처를 받습니다.그리고 상처받게 되면 결국 사소한 것으로 빌미를 삼아서 공격합니다.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사람은 저사람이 나를 어떻게 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주는 것입니다. 시간도 줍니다. 물질도 줍니다. 관심도 줍니다. 애정도 줍니다. 모든 것을 줍니다.여러분 형편이 어렵고 삶이 어려워도 마음과 믿음을 크게 하시면서 교회를 섬기고 사람들을 섬기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시간,자기의 애정,자기의 보람,자기의 가치관,자기의 삶의 모든 것을 교회를 위해서 주기로 한자는 감옥 안에서 있어서 기뻐할 수 있고 믿음으로 풍성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려운 환경 속에서 저와 여러분에게 참으로 필요한 삶은 주는 삶입니다. 섬김의 삶입니다.
나보다는 남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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