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모세의 건짐 이야기 (히 11:23-28, 출 2:1-10, 3:7,8, 행 7:20-34)

  • 잡초 잡초
  • 299
  • 0

첨부 1


  주일 아침마다 믿음의 조상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벨의 순교 이야기” “에녹의 동행 이야기” “노아의 방주 이야기” “아브라함의 축복 이야기” “사라의 웃음 이야기” 그리고 지난 주일에는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임종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삭과 야곱과 요셉은 모두 임종 시에 또는 그 전에 자녀들에게 장래 일을 말하면서 자녀들을 축복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주일 설교를 마친 다음 황선희 성혜진 이동혁 이수혁을 강대상 위로 올라오라고 했고 네 사람에게 각각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일날 세 사람이 자기들에게도 축복기도를 해 달라고 저에게 요청을 했습니다. 김혜선 사모님 박치원 장로님 안용재가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를 하는 사람들에게 축복기도를 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월요일 새벽에는 김혜선 사모님 부부, 화요일 새벽에는 박치원 장로님 부부, 수요일 새벽에는 안용재 부부, 목요일 새벽에는 최행덕 백혜란 집사님, 금요일 새벽에는 김홍영 박정희 집사님, 토요일 새벽에는 조명대 장충길 성도에게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했습니다.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하는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렇게 하라고 분부하셨고, 예수님께서도 사도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분부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동안 새벽에 나오면서 축복기도를 받기를 원하는 성도들에게 축복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다음 주에 다섯 명이 기도 받기를 요청해 놓은 상태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히브리서 11장의 순서에 따라서 모세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히11장은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을 “모세의 거절 이야기” 라고 할까 “모세의 고난 이야기” 라고 할 까 생각을 하다가 “모세의 건짐 이야기” 라고 정했습니다. 모세 라는 이름의 뜻이 ‘건짐’이기 때문입니다. 출2:10을 읽습니다.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모세란 이름의 뜻이 ‘건짐’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 있는 것은 ‘건짐’을 받은 모세가 나중에 자기 백성을 ‘건지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에 이르려 하노라”(출3:4-8) 모세는 ‘건짐’을 받은 사람인데 나중에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건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모세의 건짐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첫째, 모세는 아기 때 ‘던짐’과 ‘건짐’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아기 때 나일 강에 ‘던짐’을 받았고 그리고 나일 강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태어난 후 석 달 만에 어머니로부터 ‘버림’을 받고 나일 강에 ‘던짐’을 받은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고 가슴 아픈 일이고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히브리인들이 낳은 남자 아기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모세의 부모는 아기 모세를 죽이는 대신 갈대 상자에 넣어서 나일 강에 버리고 던지게 되었습니다. 행7:20을 읽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버리운 후에.” 모세는 태어날 때부터 아름다운 아기였습니다. 출2:2을 읽습니다.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 아름답고 준수하고 귀여운 아기를 갈대 상자에 넣어서 나일 강에 버리고 ‘버리고’ ‘던지는’ 일은 참으로 슬픈 일이고 비극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그 슬프고 아프고 불행한 경험이 모세로 하여금 후에 장성했을 때 슬픔과 아픔과 불행에 처해 있던 자기 백성을 ‘건지는’ 일을 하게 했다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이러니칼한 즉 기구한 일이었지만, 사실 인생은 기구하게 그리고 역설적인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기구하고 역설적인 방식으로 훈련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버림’과 ‘던짐’을 받게도 하시고 그리고 ‘건짐’과 ‘보살핌’을 받게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버림’과 ‘던짐’을 받은 아기 모세를 바로의 공주의 손을 사용해서 ‘건짐’을 받게 하셨고 ‘보살핌’을 받게 하셨습니다.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행7:21). 저도 어렸을 때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할 수 없이 저를 ‘던져’ ‘버렸’지만 저는 누군가의 손들을 통해 ‘건짐’을 받았고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바로의 딸이 모세를 건져다가 자기 아들로 길렀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기구하고 역설적인 방식으로 일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건지시기 위해서 원수의 나라인 애굽의 공주까지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모세는 ‘버림’과 ‘던짐’을 당했지만 애굽에서 누구보다도 월등한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최고의 학문을 습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행7:22). 하나님께서 저에게도 최고의 학문을 습득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람의 내일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애굽으로 팔려갔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고, 바벨론으로 잡혀갔던 다니엘이 바벨론의 총리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나일 강에 ‘버림’과 ‘던짐’을 받았던 모세가 애굽 공주의 아들이 되고 바로의 아들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가슴에 슬픔과 아픔을 지니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버림’과 ‘던짐’을 받는 일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어머니 요게벳의 눈물의 기도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사랑의 손길 때문에 ‘건짐’을 받았고 ‘보살핌’을 받았고 최고의 학문까지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아기 때 ‘던짐’과 함께 ‘건짐’을 받았습니다.

  둘째, 모세는 장성했을 때 또 다시 ‘던짐’과 ‘건짐’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장성했을 때 즉 40세가 됐을 때 바로의 궁중에서 부귀 영화를 누리는 대신 고통 당하는 자기 백성들 편에 서기를 원했습니다. 저들의 고통에 참여하기를 원했고 저들을 고통에서 구원하기를 원했습니다. 히11장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아주 귀한 결단이었습니다. 자기의 평안을 위해서 살기보다는 자기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 고난 받으며 살기로 결단한 것은 참으로 귀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행7:23,24을 읽습니다.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자기 백성을 건지려는 모세의 방법이 잘못된 방법이었습니다. 혈기를 쓰는 방법이었고 사람을 때려 죽이는 방법이었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칼을 빼어서 말고의 귀를 베인 방법과 비슷한 방법이었습니다.

  결국 모세는 애굽을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로의 궁중을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양 어머니인 바로의 공주를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에 나그네 되어”(행7:29). 아기 때 부모의 ‘버림’과 ‘던짐’을 받았던 모세가 40세가 되었을 때 또 다시 양 어머니와 바로 왕의 ‘버림’과 ‘던짐’을 받아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야속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모세는 나름대로 애굽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자기 백성을 구하려고 결단을 하고 그 첫 시도를 했는데 결국 바로 왕의 진노를 받아 애굽을 떠나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게 된 자신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야속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식을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차지하게 된 정치적 경제적 또는 학문적 힘으로 누군가를 노예 생활에서 구원하려고 애를 쓸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니게 된 정치적 경제적 또는 학문적 힘으로 목회의 일과 선교의 일을 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 모세도 그런 생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자기가 차지한 애굽의 정치적 경제적 또는 학문적 힘을 이용해서 자기 백성을 고통에서 구원하려고 노력하며 계획을 세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식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힘을 포기하게 하시려고 애굽의 바로에게서 ‘버림’과 ‘던짐’을 받게 하셨습니다. 40여 년 동안이나 미디안 광야에 ‘버림’과 ‘던짐’을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좀 너무 하시는 분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하나님께서 쓰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데는 40여 년이 걸린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최근에 「크리스천 투데이지」와 신년 대담을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원래 사람은 사람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참된 지도자를 배출하기 위한 교육과 육성도 필요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고난과 실패라는 역사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손으로 다듬어져야 참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고난과 실패라는 것은 도서관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현장에서 수고롭게 하면서 최소한 40년을 지나는 가운데 조금씩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참된 지도자가 배출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40년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모세는 40여 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 ‘버림’과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40여 년이 지난 후 하나님의 ‘건짐’의 손길이 나타났습니다.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 나무 떨기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행7:30-34).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완전히 ‘버림’과 ‘던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80세 노인이 된 모세에게, 그것도 양치는 지팡이 하나밖에 없는 힘 없는 모세를 광야에서 ‘건지시며’ 그를 들어 자기 백성을 ‘건지는’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너무 놀랍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80세가 된 모세는 자기의 무능을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는 본래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사람입니다.”(출4:10). 모세가 하나님이 쓰실 만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태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오랜 후에 사도 바울이 그런 고백을 했는데 사실은 모세가 그런 고백을 한 원조였습니다. 하나님은 무능해질 대로 무능해지고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모세를 광야에서 ‘건지시며’ 그의 손과 지팡이에 이스라엘을 ‘건질’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미디안 광야에서 ‘건짐’을 받았고 그리고 자기의 손과 지팡이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건지는’ 구원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칼한 역설적인 일이었습니다. 모세는 80세가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건져내는’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사건 이후 오늘까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9:24).

  셋째, 모세는 노년에 때 또 다시 ‘던짐’과 ‘건짐’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또 다시 40여 년 동안 시내 광야에서 광야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40여 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또 다시 ‘버림’과 ‘던짐’을 받게 됩니다. 모세의 시내 광야 생활은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계속해서 ‘원망’과 ‘적대’와 ‘배척’과 ‘버림’을 받은 생활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바로 순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출16:2). “이스라엘 온 회중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출17:1). “그들이 모세를 원망하여 가로되”(출17:3).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과 제사제도를 만들어 주시는 바로 그 순간부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무시’하고 ‘원망’하고 ‘적대’했습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는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라”(출32:1).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민16:3). “이튿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가로되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 하고”(민16:41).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민21:5,6).

  모세의 마지막 40여 년 동안의 광야 생활은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계속해서 ‘원망’과 ‘적대’와 ‘배척’과 ‘버림’을 받은 불행한 생활이었습니다. 모세도 인간인지라 원망하고 적대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므리바에서 분을 내며 반석을 두 번 내리친 일은 있었지만(민20:11), 그러나 모세는 원망하고 적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사죄의 기도와 축복의 기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출32:32).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해서 축복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신33:1).
  모세는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는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당했습니다. 신34:4을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이 구절을 칼빈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모세는 백성에게 약속된 기업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도자로 삼으셨지만 이제 그가 죽기 전에 좌천을 당하여 면목을 잃게 되었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사실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 중에서 모세보다 더 자격이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얼마든지 불평을 늘어놓을 수 있었다. ‘내가 이 백성들을 인도하느라고 얼마나 많은 시련을 당했습니까! 당신은 나의 손을 사용하며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나는 지금도 당신의 영예와 백성들의 구원에 대해 지치지 않는 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는 못 들어가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만 들어간다 구요? 좋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제 당신과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떠납니다.

다른 사람이나 쓰시지요.’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록 하나님께서 모세를 사람들 앞에서 면목 없게 만들고 그가 그렇게도 원했던 것을 거부하시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앞서 가게 하셨어도 모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친구들이여, 내가 여기서 죽어도 나는 나의 의무를 끝까지 수행할 것이요.’ 그는 백성을 원망하며 그들 때문에 그가 유업을 잃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의 입술에서는 아무런 불평이나 원망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입술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었다.”(칼빈의 신명기 설교). 모세는 마지막 순간까지 ‘버림’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시내광야를 지나 모압 평지에 이르러 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신명기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마칩니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애곡하는 기한이 맟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일을 애곡하니라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신34:5-12). 모세는 하나님께서 쓰시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마지막까지 ‘버림’을 받는 삶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모세의 죽음에 대한 신비가 있습니다. “그 묘를 아는 자가 없으니라” 라고 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모세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그 시체를 건사하셨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대하여 이렇게까지 간섭하신 것은, 마치 그가 에녹을 산채로 천국으로 옮기신 것과 유사하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더불어 끝까지 동행하신 증표라고 할 수 있다.” 유다서 9절은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과 천사가 모세의 시체를 그대로 내 버리지 않으시고 간수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버림’ 받고 ‘배척’ 받은 모세를 ‘보호’하시고 ‘간수’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손으로 ‘건짐’을 받았습니다.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모세의 시체를 간수하시되 세상에 두시지 않고 하늘로 데려가셨다고 생각해 봅니다. 에녹처럼 엘리야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하늘로 데려 가시려는 ‘구실’을 만들기 위해 모세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너무너무 귀하게 여기셔서 모세를 하늘로 데려가셨다고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그 모습이 변형되었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마지막에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신비로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모세는 아기로 태어날 때부터 처음 40여 년 동안 ‘버림’과 ‘던짐’의 삶과 더불어 ‘건짐’과 ‘보살핌’의 삶을 살았습니다. 두 번째 40여 년 동안도 ‘버림’과 ‘던짐’의 삶과 더불어 ‘건짐’과 ‘보살핌’의 삶을 살았습니다. 세 번째 40여 년 동안도 ‘버림’과 ‘던짐’의 삶과 더불어 ‘건짐’과 ‘보살핌’의 삶을 살았습니다. 모세의 120여 년 동안의 삶은 ‘버림’과 ‘던짐’의 삶과 더불어 ‘건짐’과 ‘보살핌’의 삶의 연속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버림’과 ‘던짐’을 받을 때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 ‘건짐’과 ‘보살핌’을 받으면 됩니다. 그리고 ‘버림’과 ‘던짐’을 받은 다른 사람들을 ‘건지고’ ‘보살피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모세처럼 세상에서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건짐’과 ‘보살핌’을 받는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건지고’ ‘보살피는’ 선교적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 우리들의 시체와 영혼을 하나님께서 ‘건지시고’ ‘간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모세의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김명혁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