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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큰 무서움과 큰 기쁨 (마 28: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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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누가 부활하신 주님을 봤다는 대목이 나오면 은근히 부화가 생기지요. 누구는 이런 신나는 일을 경험케하고 왜 나에게는 이런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의 면면을 안 보이는가 하는 심통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대합니다. 이 성경 속의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되기를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나는 지옥간다. 따라서 어떻게 되었든 나는 부활 사건을 내가 늘 소유할 수는 사건으로 만들어야만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부활이라는 것은 내가 소유할 대상이 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내가 퍼담아서 내 것으로 만들 사건이 아닌 이유가 하나님쪽에서 임의대로 발생시킨 사건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합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지옥에나 갈까요? 다행스러운 것은 부활 사건이나 그냥 미술 전시회장 벽에 그냥 박혀있는 액자같은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 부활 사건이 계속 일을 만들어 나가는 부활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을 일으킬까요? 바로 ‘믿음’을 우리 속에 만들어내십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 4:4-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사람이 항상 자신의 노동에 대해서 반대급부를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신에 대해서는 이런 태도를 갖습니다. 할 것 하고 받을 것 챙기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자기 존속본능에 입각해서 발생된 본성에 해당되는 반응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사실이 믿어져야 은혜로부터 주어진 믿음입니다. 바로 이 ‘은혜의 주입’ 인간이 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 부활하시는 주님만이 해내시는 사항입니다.

사도의 편지에 보면, 부활이 우리에게 어떤 믿음을 유발하는지 잘 나와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4에 보면,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구원받는 공식’이 확실하게 나와있습니다. 그 공식의 내용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심’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누가 뭐래도 확실하게 구원받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제일 납득이 안되는 대목이 바로 ‘우리 죄를 위하여’라고 되어 있는 곳입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개인적인 정치적 형벌의 피해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2000년 후에 태어난 우리 자신의 죄를 끌어들어가시는 죽음으로 간주하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진정 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죄에 대한 용서 장치’가 먼저 하나님쪽에서 수립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신기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에게 용서가 먼저고 그 다음에 우리가 품고 있는 죄 알기에 나서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렇게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그 공로를 드높이겠다는 겁니다.

따라서 부활 사건이란, 단지 예수님이 변화된 몸만 만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마음 속에 자신의 죄를 아는 것까지 범위를 넓혀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죄일까요? 누가복음 17:17에 보면, 문둥이 10명이 모두 예수님으로부터 병고침을 받아놓고서는 감사와 기쁨을 원천자의 몫으로 돌리기 위해 돌아온 사람은 이방인인 사마리아 문둥병자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다른 이들은 주님에게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당연히 나을 것을 나았다는 인식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은 결코 죄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병고침에 대해서 전적으로 감사할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여제자들이 큰 무서움과 큼 기쁨을 함께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상 못할 일을 접했습니다. 예상 못할 일을 접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작업이 인간들의 기대를 비켜가는 식으로 전개된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기대를 비켜가야만 하는 이유는, 그들이 전적으로 죄인인 까닭이다는 이유 말고 다른 이유는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 평소에, 전부터 하나님께서 일관되는 믿음의 일을 행오셨습니다.

그리고 구원이 주실 때는 기쁨도 함께 주셨습니다. 그들을 절망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 즉 보리떡 5 개와 물고기 2 마리로 이르킨 기적은 그들의 기쁨을 도리어 절망으로 바뀌게 한 기적입니다. 인간들은 은근히 인간들이 이해되는 식을 마음 속으로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 본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을 계속 따라다녔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즉 부활의 기쁨이나 구원받은 기쁨이 아니라, 자기를 위대하게 만드는 기쁨을 따로 얻고자 하는 본성이 들어있었던 것이고 그것을 우리 주님을 발각시킨 것입니다. 부활이라는게 무엇입니까? 죽었다가도 다시 사는 것이고 그리고 영원히 두 번 다시 죽지 않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 부활의 기쁨을 얻었다는 말은 이제 “하나님이 저를 죽으셔도 저는 왠지 기쁘고 즐겁기만 합니다”라는 마음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절망과 죽음 앞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다음과 같은 묻습니다. “기쁘냐? 나도 기쁘다”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무서움도 부활되었다는 기쁨을 뺏아갈 수는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믿음이 생기거든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온 것으로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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