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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피보다 진한 복음 (마 10:3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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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부터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한미FTA 라고 부릅니다. 한국 정부는 이 한미 FTA를 준비하면서 우선 스크린쿼터 기간을 반을 줄이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영화인들은 이에 반발해서 시위에 나서고 있습니다. 또 농민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관세가 폐지되면 미국의 싼 가격의 농산물이 밀려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도 교육과 의료산업에도 큰 조정이 일어나게 될것입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공산품과 서비스 산업이 미국 시장에 자유롭게 진출하게 됩니다. 수출이 늘고 국내 산업은 경쟁력이 강해질 것입니다. 또 일본과 중국과의 무역에서도 우위권을 잡게 됩니다. 그래서 이 무역 협상은 시대적으로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전략에 말리면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서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밀고 당기는 협상이 진행될 것입니다. 협상이란 양보하고 다른 것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보하는 분야의 백성들은 크게 반발할 것입니다. 잘 해도 욕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서 FTA 협상에 임하는 외교통상부의 한 직원은 전투를 하는 심정으로 준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실제 총칼을 들고 싸우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한국과 미국은 무역 전쟁 선전포고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도 전도를 전쟁하는 것처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도에 임하는 제자들이 비장한 각오로 임하도록 교훈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0 장에서 예수님은 주로 전도하는 요령과 주의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전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모진 환난과 핍박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것은 양이 이리 가운데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전도하다가 붙들려 심문을 당하고 고문을 당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위협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전도의 상이 큽니다.

이것이 이제까지 마태복음 10 장을 설교한 내용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전도자가 치러야 하는 댓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도에 임하는 제자들은 마음을 굳게 다잡으라는 것입니다.

34 절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이 본문은 충격과 혼란을 줍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를 뒤집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사실은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에 대한 상식을 뒤집는 말씀입니다.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입니다. 싸움과 분쟁을 일으키기 보다는 유순함으로 해결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천사도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직접 산상설교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의 평안을 얻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렇데 어떻게 정 반대의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일까요? 예수님이 칼을 주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칼은 평화의 반대말로 쓰인 단어입니다. 크리스천이 칼을 들어야 할 때가 있을까요? 있습니다.

에베소서 6 장에는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군사의 복장에 빗대어 영적 무장을 교훈하는 곳입니다. 군사의 전투복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투구를 머리에 쓰고 흉배를 가슴에 대야 합니다. 허리를 동이는 띠가 있어야 하고, 날쌔게 움직이기 위해 신발을 신어야 합니다. 그리고 칼과 방패를 듭니다. 여기에 칼이 나옵니다. 이 칼은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무장을 하고 누구와 싸울까요? 우리의 적은 마귀입니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1-12>

이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싸움의 대상은 마귀입니다.

전도는 죽어가는 생명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전도를 싫어합니다. 사단은 전도를 적극적으로 방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마귀와 싸워야 합니다. 전도현장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 충격적인 말씀을 이어서 하십니다. 그것은 이런 전투가 심지어 가족 간에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본문 35 절부터 읽습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 10:35-36>

이 구절을 단순하게 읽으면 이상하게 들립니다. 성경에 이런 구절이 나오면 건너 뛰고 싶습니다.

예수를 믿다가 가족끼리 원수가 된다니 이상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지만 가족끼리 불화하고, 원수가 된다면 어찌합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원수가 된다하니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예수 믿으면 불화한 가족이 화목해져야 합니다. 오히려 믿음이 분쟁이 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심오한 뜻이 있을까요?

예수를 믿다가 가족이 원수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37 절에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7>

예수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부모님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자식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선순위에 대한 문제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은 보다 근본적인 것입니다.

문제는 안 믿는 가족이 있을 때 생깁니다. 그는 가족보다 예수님을 소중하게 챙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는 것을 말립니다. 예수님을 못 믿게 만듭니다. 예수에 미쳤다고 비난합니다. 가족이 핍박자가 됩니다.

그렇다고 핍박에 꺾여서 믿음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영혼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핍박을 한다고 신앙을 접을 수는 없습니다. 견뎌야 합니다. 집에서 내쫓김을 당한다고 해도 믿음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사실 문제가 그렇게까지 확대되도록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안 믿는 가족이 있을 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믿지 않는 가족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지나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믿지 않는 가족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그 가족을 전도하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성경은 가족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복음 진리를 거스리면 거긴에는 타협이 없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구원을 위해서 가족 관계도 냉정하게 끊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최후의 방법입니다. 여간해서는 포기하지 말고 그 가족을 구원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7 장에 이혼을 허락한 구절이 있습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고전 7:15>

안 믿는 배우자가 이혼을 요구하면 해도 구속받지 말고 이혼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혼도 불사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을 빼앗아 가는 어떤 것에도 저항해야 합니다. 그것은 구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가능하면 견뎌보라고 했습니다.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화평 중에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이혼이 허락된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배우자의 간음한 연고와 짝믿음인 경우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피가 그 만큼 진하다는 뜻입니다. 혈육보다 더 앞선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보다 진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입니다. 때로는 복음 전파를 위해서 가족을 뛰어 넘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전도를 위해서 고통과 희생을 각오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바로 이 십자가를 지라고 했습니다.

38 절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당신의 십자가를 지기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십자가를 지리라는 것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십자가가 뭔지 알고 있었을까요?
요셉프스라는 역사학자 있습니다. 그의 책에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 역사가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활동하기 직전에 갈릴리에 아주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다라는 사람이 로마 정부에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로마 정부는 마리우스라는 장군을 보내서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이 때 붙들린 사람이 2,000 명이 넘었습니다. 마리우스는 본 때를 보여주기 위해서 2,000 명을 모두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길 양쪽에 이 천개의 십자가를 세우고 한꺼번에 처형을 했습니다. 그 장면은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천지 사방에 시체가 찢겨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나 십자가에 대해서 참혹한 추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을 때, 그것은 여간 도전이 되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어떤 고난보다도 극심한 고난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나를 죽이고 남을 살리는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2 차 세계 대전 때 일본 공군에는 가미가제 특공대가 있었습니다. 전쟁 막바지에 일본은 연합군의 상륙을 막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군비와 병력이 모자랐습니다. 결국 가미가제식 공격 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천 명이 넘는 대원이 조직되었습니다. 그들은 세뇌교육을 통해 자살 특공대를 명예롭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전투기에 500 Kg의 폭탄을 실고 다시 돌아올 기름은 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천황을 위해, 국가를 위해’란 구호를 외치며 출격했습니다. 그들은 조국의 승리를 위해서 비행기를 몰고 연합군의 군함에 돌진했습니다.

일본 육군도 그런 전술이 있었습니다. 대전차에 맞설 변변한 무기가 없으니 맨 몸으로 달려드는 것입니다. 지뢰를 등에 메고 탱크 밑에 깔리는 것입니다. 어렵게 사진을 한 장 구했습니다. 이 사진을 보면 참 무모하기 짝이 없는 백성들이란 생각이 듭니다.

최근에도 자살 폭탄 테러가 연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로 이라크와 팔레스틴의 피해 지역 가족들이 자살 작전에 지원합니다. 무엇이 이들을 죽음을 각오하게 만들었을까요?

십자가를 지라는 주님의 말씀도 어찌 보면 그런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각오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복음을 전하다 죽으라는 것입니다. 나도 십자가에서 죽을 터이니 너희들도 내 뒤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 장은 전도 파송장입니다. 10 장의 마지막은 이렇게 비장한 각오를 다짐시키고 계십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가미가제 특공대와는 다릅니다. 가미가제는 그냥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사실 죽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사는 것입니다.

39 절 마지막 절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죽으려고 십자가를 지면 사실은 산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진리입니다. 죽고자 해도 삽니다. 십자가는 남을 위해 대신 죽는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고난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고된 인생을 빗대 십자가라고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남을 위해서 사서 하는 고난입니다.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지만 자청해서 당하는 고난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을 위해서 혹은 이웃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입니다.

주님을 위한 고난은 주로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당합니다.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강요당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붙들려 갔습니다. 모진 매를 맞으며 고문을 당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일본 순사들은 이번에는 상처를 치료해주고 회유했습니다. 한 상 잘 차려주면서 맛있게 먹고 절만 한 번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 어려움을 잘 견뎠습니다. 이번에는 어린 자식들과 아내를 데려다가 그 앞에서 울게 했습니다. 불쌍한 가족을 보면서 이 목사님은 그만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거기서 그만 꺽이고 말았습니다. 신앙의 절개를 위해 때론 가족마저 미워해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그런 손해를 그냥 모른채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천배 만배 갚으십니다. 한량없는 주님의 사랑으로 그 십자가의 고통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전도는 곧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질 비장한 각오를 해야 합니다. 전도는 소풍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나를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주님의 은혜를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이라도 갚으려는 심정으로 십자가를 결단해야 합니다. 주 위해서라면 이 생명까지도 드리십시다.

어느 집사님이 인생이 고달팠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주님 너무 힘이듭니다.”하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루는 꿈을 꾸는데 자기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습니다. 너무 무겁고 힘이 들었습니다. 마침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목수이질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좀 작게 잘라 주세요.” 주님은 아무 말없이 십자가를 잘라 주셨습니다. 그래도 무겁고 큽니다. 집사님은 몇 번이나 십자가를 잘라달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천국까지 왔습니다. 천국에서 주님이 상을 주십니다. 그런데 십자가 크기만큼 상을 줍니다. 자기 십자가를 보니 손 안에 들어올 정도로 작았습니다. 깜짝 놀라 잠이 깼습니다. 집사님은 얼른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십자가지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 십자가를 기꺼이 지시겠습니까? 이 십자가를 지고 전도하러 나가시겠습니까?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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