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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설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라 (히 11:8~11,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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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소본능

오늘은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인 설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설이 되면 새 옷을 입고, 새 신을 신고, 세뱃돈을 받고, 떡국이나 만둣국, 떡과 지짐과 과일 등을 나누어 먹으면서 즐겁게 지냈습니다. 또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 제기차기 등을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우리 사회가 산업화되고 핵가족화 된 후로는 설 분위기가 예전만 못합니다. 또 생활수준이 향상되어서 평소에 잘 먹다보니 설이라고 해서 과거처럼 음식을 많이 준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변함없이 계속되는 설 풍습이 있는데 그것은 고향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전국의 고속도로가 귀성(歸省) 차량으로 만원을 이루었습니다. 이와 같은 귀성 풍습은 중국인들도 우리와 비슷합니다. 중국인들은 구정을 춘절(春節)이라고 부르는데 이 때 이동인구가 13억이나 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아무리 먼 고향이라도 하루 이내에 갈 수 있지만, 중국은 하루 이틀 거리는 가까운 것이고 일주일 동안 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우리처럼 특별히 설에 고향을 찾지 않더라도 인종이나 국적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본능입니다. 연어나 제비갈매기, 꿀벌, 개미와 같은 것들은 귀소본능(歸巢本能)이 있어서 먼 곳에 갔다가도 본래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는데, 사람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 역시 귀소본능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해서 고향을 떠날지라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오갈 수 있고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미국이든 유럽이든 비행기를 타면 금방 갔다 올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외국에 이민을 갔다가도 마음만 먹으면 돌아올 수 있습니다.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의 결단

그러나 과거에는 고향을 떠나려면 큰마음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번 고향을 떠나면 쉽게 돌아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먼 외국에라도 간다면 언제 다시 돌아올는지 기약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런 만큼 고향을 떠나려는 사람은 오랫동안 심사숙고했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셨을 때 고향을 떠날 것을 명하셨습니다.

“1)…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디로 가라고 행선지를 지시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네게 지시한 땅”이 아니라,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야할는지 알지 못한 상태에서 떠나라고 하시니 떠났던 것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이란 그때까지 그가 쌓아온 모든 생활기반을 의미합니다. 고대로 갈수록 친족의 중요성은 대단했습니다. 그것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담과 같았습니다. 요즘도 외국인들은 여러 면에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온 이주 노동자들을 보면 얼마나 많은 차별을 받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법과 제도가 미비했던 고대에는 외국인들이 이들보다 더 나쁜 대우를 받았습니다.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위험하고 불리한 상황에 몸을 내 맡기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즉시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했습니다. 창세기 12장 4절로 5절에 보니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5)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고 했습니다.

요즘처럼 차량에다 짐을 싣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수레에 짐을 싣고 가축 떼를 인솔해서 걸어서 600킬로가 넘는 거리를 가야 했습니다. 어디서 강도떼를 만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유력한 친척이 기반을 닦아 놓고 초청한 것도 아닙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행선지가 어딘지도 모른 상태에서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11장 8절에 보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했습니다. 과연,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장막에 거주한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몇 년쯤 지났을 무렵,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14)…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15)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 13:)고 하셨습니다. 이는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단 한 평도 차지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다만,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그를 장사할 막벨라 굴을 헷 족속에게서 산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는 가나안을 기업으로 약속받았지만 죽는 날까지 나그네로서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지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가난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육축과 은금이 풍부했습니다(창 13:2). 한곳에 집을 짓고 정착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는 날까지 장막을 치고 지냈습니다.

지금도 시나이 반도에 가면 베드윈 족 사람들이 장막을 치고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염소 가죽을 이어서 만든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지냅니다. 아무리 잘 지은 장막이라도 장막은 장막일 뿐입니다.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한 마디 불평 없이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이는 아브라함 뿐 아니라 그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같이 장막에 거하면서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지만 그들의 생활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나그네로서 장막에 거주했습니다.

고향에 돌아가지 않은 이유

그뿐 아니라, 가나안 생활이 힘들면 떠나온 고향인 하란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에서를 피해서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에게 가서 20년을 지냈습니다. 그 때까지 그들의 친족들이 하란에 살고 있었고, 언제라도 돌아간다면 반갑게 맞이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들은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15절에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라고 했는데, 이는 저희가 나온바 지상의 본향을 본향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떠나온 하란이 본향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지금 살고 있을 뿐 아니라 기업으로 받은 가나안을 본향으로 생각했기에 그곳에 계속 머문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떠나온 하란도, 기업의 땅 가나안도 그들의 본향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마음에 그린 본향은 어디를 말할까요? 10절에 보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고 하였고, 16절에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 땅에 있는 고향이 아닌 하늘 본향을 사모하면서 살았습니다.

퇴색되어 가는 고향

설에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보세요. 고향을 얼마나 사모했던지 좁은 차속에서 열 시간씩이나 갇혀 있으면서도 피곤한 줄 모릅니다. 귀성길에 겪은 불편함에 대하여 짜증을 내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고 대부분이 재미나는 추억거리로 삼습니다. 그만큼 고향은 위대합니다.

그러나 그처럼 위대한 고향, 꿈에도 차마 잊지 못하는 고향이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고향에 대한 생각도 점점 퇴색되어 갑니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인데, 도로가 나고 산이 깎여 나가고 도무지 옛 모양을 찾아볼 수 없을 때, 그토록 고향을 그렸던 마음은 허탈감에 사로잡힙니다. 고향에 가도 반겨줄 부모님이나 친지들이 없을 때도 역시 고향은 우리를 쓸쓸하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고향에 가던 발걸음을 끊고 맙니다.

정지용이라는 시인이 쓴 ‘향수(鄕愁)’라는 시를 보면, 매 단락마다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후렴으로 끝맺습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그런데 그 몇 년 후에 지은 ‘고향’이라는 시에 보면,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라고 고향에 대한 실망을 읊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지상의 고향은 우리가 영구히 사모할 본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믿음의 조상들이 보여준 본향에 대한 태도는 옳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위인들답게 이 땅의 고향에 연연해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의 도성,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 장막생활을 하면서도 불평하지 않았으며 아무리 어려워도 떠나온 본향인 하란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본향을 잊지 말아야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이번 설에 고향을 방문하고 친지들을 만나볼 것입니다. 이미 고향으로 떠난 성도님들도 많습니다. 고향을 방문하고 부모 형제를 만나는 것은 권장할 미풍양속입니다. 그러나 언제라도 우리의 영원한 본향은 이 땅의 고향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비해 두신 하늘의 도성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이 땅의 것에 집착해서 허탄한 것을 얻기 위해 아까운 세월을 허비하게 될 것입니다. 나그네가 자기의 신분을 망각하고 타국의 풍물에 마음 빼앗기고 그곳 사람들이 좋아서 머물러 살게 되면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고향을 상실한 사람은 불쌍합니다.

우리는 이북에서 피난 내려온 사람들을 실향민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명절이 되면 티비를 통해서 백발이 성성한 주름진 얼굴로 휴전선 철책선 근처에 가서 북쪽을 바라보면서 눈물짓는 실향민들을 대할 때마다 동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잠시 살다갈 이 땅의 고향에 가지 못하는 것도 그토록 서럽고 억울하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다리시는 영원한 본향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가련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날 하늘의 본향을 잊어버리고 떠나온 옛 생활을 동경하여 그리로 발걸음을 돌이키는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전도자의 사명을 버리고 사도 바울의 곁을 떠나 간 데마처럼, 세속의 손짓에 현혹되어 믿음의 길을 떠나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회에는 출석하지만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만족할 뿐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을 찾아볼 수 없는 신자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영적 신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악 세상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아 천국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비록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소속은 이 세상이 아니고 하늘나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일에 관심을 두지 말고 하늘 본향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현실이 좀 어려워도 낙심하지 않고 형통하다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성도님들께서도 여행을 떠나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마는, 때로는 지갑을 분실해서 끼니를 거를 때도 있습니다. 또는 먼 거리를 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절망하고 슬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생은 되지만 기꺼이 견뎌냅니다. 정 급할 때는 낯선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행 중에 잠시 어려운 처지를 만난 것일 뿐, 원래 거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어 여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노숙을 하더라도 슬퍼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라도 돌아갈 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이 없어서 노숙을 한다면 그처럼 처량한 처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따뜻하고 아늑한 집이 있으므로 여행 중에 겪는 어려움은 나중에 감미로운 추억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도들은 하늘에 예비 되어 있는 집을 생각하면서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늘에 예비하신 집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는 우리가 거할 처소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이 땅에서 작은 집에서 좀 불편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그 때문에 슬퍼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이 땅에서 크고 좋은 집에 산다고 해서 우쭐댈 것도 없습니다. 서울 강남의 어느 아파트는 분양가가 평당 3천만 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50평형 아파트의 분양가가 15억입니다. 그러나 그런 아파트가 아무리 고급스럽더라도 철근과 시멘트와 대리석으로 지은 것에 불과합니다. 한 30년 지나면 낡아서 재개발해야 합니다. 영국에는 시가 1300억 원 나가는 저택이 있다고 합니다. 대지가 7만 평이나 되고, 방이 103개, 수영장 5개, 볼링장, 50석 규모의 영화관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정도를 가지고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두신 집에 비하면 누추한 움막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21장에 보면, 장차 성도들이 들어갈 새 예루살렘 성에 관한 설명이 나옵니다. 시간 관계상 몇 가지만 소개하면,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므로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다고 합니다. 또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동서남북으로 세 개씩 도합 열 두 문이 있는데 문 마다 하나의 진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보석으로 된 기초석이 있고,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습니다. 성의 길도 맑은 유리 같은 정금입니다. 또 거기는 해나 달이 쓸 데 없는데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등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시록 22장에 보면,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나서 길 가운데로 흐릅니다. 그리고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달마다 맺힙니다. 그곳에는 다시 저주가 없으며 병들거나 늙거나 죽는 일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도들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대면하여 뵙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에는 새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움을 요점만 간략하게 계시한 것이므로 실제로 우리가 그곳에 들어가 보면 너무나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풍요로워서 할 말을 잊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이르기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사모한 본향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제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살면서도 평생 장막생활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가나안 땅조차도 하늘의 도성에 대한 그림자요 맛보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보다 신약의 성도들이 훨씬 복되다고 말씀합니다. 13절이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실제로 얻지는 못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자기 백성들을 구속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도들이 들어가게 될 하늘의 도성과 영원한 복락은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이 약속이 그들의 생전에 성취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했으며 다만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신약의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속하셨으며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이 예언대로 성취된 것을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 눈으로 본 것처럼 확실하게 알고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구세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과 그 분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들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의 예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명백하게 검증한 연후에 확신을 갖고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믿음의 조상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흔들림 없이 신앙의 경주를 완주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이 위대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과연, 그들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릴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분들을 인정하셨습니다. 16절 말씀이 이를 의미합니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출애굽기 3장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불붙은 떨기나무 불꼿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고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셨습니다.

그런가하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31)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32)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 22:)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심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은 자들이 아니고 산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수천 년 전에 죽은 저들이 지금도 살아있다니,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믿음의 조상들은 지금도 천국에 살아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의 도성에서 살고 있습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라

설을 맞이해서 고향에 가서 부모 형제, 친지들을 만나 회포를 푸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모처럼 따뜻한 인정을 느껴 볼 수 있는 것 역시 명절의 유익한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두에서도 말씀한 대로 이 땅의 고향은 세월이 감에 따라 우리에게 고향 상실의 슬픔을 안겨주는 역할을 합니다. 고향이 고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우리는 늙어가고, 고향 산천은 제 모습을 잃어 갑니다. 어렸을 적에 고향에 대하여 가졌던 감미로운 느낌은 추억 속에만 남아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땅의 고향에 계속해서 미련을 둔다면 결국 고향은 쓰디쓴 아픔을 우리에게 안겨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의 고향이 진정한 본향이 아님을 알기에 세상 사람들처럼 향수에 젖을 이유가 없습니다. 평생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땅의 고향은 나그네가 잠시 머물다 가는 마을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심으로 인생 나그네 길을 가는 동안 세상 유혹에 실족하지 아니하고 하늘 본향에 들어가는 그 날까지 날마다 승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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