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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2) - 진실한 헌신을 이루는 삶의 평안과 기쁨 (요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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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시작하여서 설 명절의 연휴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늘 설날에 분주한 날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요, 근본이라고 여겨서 오늘도 하나님 앞에 나와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모든 주의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특별히 오늘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모든 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기쁨과 축복이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우리는 아마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모세가 말했듯이 이 세상에서 우리의 자랑할 것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이 세상에 수고와 슬픔을 극복하고 이루어진 많은 승리의 사실들, 그리고 기쁨의 일들, 그리고 모든 행복한 마음들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는 이들이 역시 그들의 삶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누릴 수 있도록 우리는 그들의 행복을 기원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께 대한 헌신을 우리들의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과연 내가 주님 앞에 어떻게 헌신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있어서 어떤 행복이요, 은혜요, 은총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혜와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도의 응답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모든 일들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우리의 최고의 기쁨과 행복일 것입니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나가게 되면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기쁨과 은혜만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헌신과 충성이 우리의 더 큰 기쁨으로 마음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께 더 큰 은혜를 입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주님으로부터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하는 마음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제 그것을 넘어서 내가 어떻게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주님의 은혜에 보답할까? 내가 어떻게 내 삶을 주님 앞에 헌신할 수 있을까가 우리 마음에 관심사인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주님께, 그리고 주님의 교회에,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역사 속에 표현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헌신이 왜 중요한가? 그리고 우리의 헌신은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또한 우리의 주님께 대한 헌신이 어떻게 우리들에게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주는가 하는 것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다니 지역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베푸시는 장면에 참석하셨을 때 일어난 장면입니다. 오늘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2장과 같은 내용을 우리는 그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이 집이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가 순전한 나드 향유가 담겨있는 옥합을 가지고 와서 깨뜨려 주님의 발에 붓습니다. 그리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습니다. 이것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화를 내면서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300데니리온의 값을 받을 것이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면 얼마나 좋을 것인데 예수님의 발에 부어 허비하였다라고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300데나리온이라는 것은 큰돈입니다. 장정들의 하루 임금이 한 데리온이니 300데나리온이라는 것은 아마 열 달치의 봉급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강 1년분의 연봉에 해당되겠지요. 1년에 300일정도 일한다고 한다면, 그러니 얼마나 많은 돈이겠습니까? 한 수천만원정도 되겠지요. 그렇게 비싼 것을 가져다가 한번 예수님의 발에 부어서 그냥 허비하다니 가난한 사람들에게 팔아서 나눠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이 장면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그 가룟 유다의 분노하는 것을 제지 하십니다. ‘그 여인을 가만히 두어라. 이것은 내 장례를 준비하였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속 같이 있지 못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이미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은 가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제자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제 그리고 예수님은 다른 병행구인 마가복음 14장에서 이렇게 보충하여 말씀하십니다.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인의 행실도 같이 전파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얼마나 큰 행복한 일을 한 것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 내용을 가지고 진실한 헌신이 이루는 성도의 영적기쁨과 평안과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우리가 먼저 알 수 있는 것은 은혜 지향적인 삶과 계산 지향적인 삶이 있는데 헌신이라는 것은 은혜지향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지향적인 삶을 살아갈 때 주님께 대한 참된 헌신이 우리에게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계산만하고 산다면 늘 불만이고 불평이고 만족할 틈이 없습니다. 유다는 그 향유를 팔면 300데나리온 이라는 많은 돈을 벌 것을 알고 책망했습니다. 주님을 향한 헌신도 수치로만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진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자기의 모든 개인적인 유익을 취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될 때 그는 이와 같이 분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무엇을 해드렸는데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주었는데’라는 개념의 생각만 수치화시켜 계산하고나면 우리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계산은 내심 나 중심적으로 이루어지는 계산이기 때문에 정확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를 더욱더 불행하게 만듭니다. 항상 우리는 남에게 준 것은 커 보이고 남에게 받은 것은 작아 보입니다. 주님께 헌신한 것은 커 보이고 주님께 받은 축복은 우리에게 있어서 그렇게 커 보이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 우리 부패한 인생들의 마음입니다. 늘 계산만 하면 내가 준 것이 커 보이는 그 수치계산만 하면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계산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더 큰 축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제가 이런 말씀드리죠. 여러분 지갑에 돈이 한가득 있습니다. 그러면 물건을 살 때 계산합니까? ‘야, 이거 얼마인데, 지갑에 돈이 얼마가 있는데...’ 이 돈이 맞을까 틀릴까? 계산하고 삽니까? 아니죠? 그냥 사는 것입니다. 돈이 충분히 있어 계산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물건을 골라도 내가 치를 값이 충분히 있어.’라고 생각하면 위축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물건을 살 것입니다. 그런데 지갑에 돈이 몇 천 원 정도 들어있어요, 그래서 ‘내가 사는 물건하고 내 지갑에 들어 있는 돈하고 맞을까? 괜히 나중에 물건 들고 나가서 계산할 때 혹시 창피당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면 머릿속에서 부지런히 계산해야 합니다. 계산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계산을 능가하는 삶이 우리들에게 축복의 삶인 것을 생각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내가 얼마를 쓸까?’라고 생각할 때 내가 가지고 있는 은행의 잔고를 생각할 경우가 있겠죠? 그런데 은행에 잔고가 너무 많아요. 그러면 내가 누구를 도와줘야지라고 생각하면 내 은행의 잔고를 생각하지 않고 내손에 잡히는 것을 가지고 늘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계산하지 않고도 충분히, 주의 일을 하고 계산하지 않고도 충분히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과 은혜를 나눠주고 계산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축복과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계산을 능가하는 더 큰 축복과 은혜를 받기를 소원합니다. 계산하지 않고 도와줄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누리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계산이 무엇이냐 하면, 내게 얼마가 있는데 어떻게 헌신하고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까 하는 계산이 아닙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만큼 돕고 싶은데 하나님 내가 주를 위해서 이렇게 헌신하고 싶은데 나에게 차고도 넘쳐서 계산하지 않을 만큼 더 큰 은혜를 주십시오.’라는 것이 우리의 영적인 계산일 수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오늘 보면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가룟 유다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 사람은 왜 이렇게 어리석은 일을 할까? 아니 예수님 앞에 그 귀한 것을 다 부어버리다니 저런 헌신은 소용이 없어, 의미가 없어, 더 다른 일을 해야지. 우리는 하나님의 일도 다른 사람의 행위와 마음씀도 이해의 차원에서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 우리는 판단하고 비판하고 평가해버리는 하나님의 위치에 우리가 서버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볼 때마다 다른 사람의 마음씀을 볼 때마다 여러분 그를 이해하려는 관점에서 봅니까? 아니면 판단하고 정죄하려는 봅니까? 이해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늘 은혜고 축복입니다. 판단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늘 우리들에게 고통과 아픔과 그리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판단하고 정죄해버리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하려고 하면 늘 이해하고 오해하려고 하면 늘 오해해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도 이해하고 사람도 이해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어서 무엇인가 다른 사람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해와 배움의 마음이 아니라 판단과 가르치려는 마음이 들 때 늘 시험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늘 이해의 관점과 다른 사람들에게 배우려는 마음의 관점과 다른 사람에게 기쁨과 은혜를 느낄 수 있는 이와 같은 누림의 심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욱이 진정한 은혜를 지향할 때 우리 삶에는 평안과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나드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은 마리아는 이것이 값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계산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것을 최고의 주님께 드려야지, 나는 최선을 다해서 주님을 섬겨야지.’ 그 마음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계산하면 어떻게 헌신할 수 있겠어요. 계산하면 어떻게 헌신할 수 있겠습니까? 계산하면 헌신하지 못해요. 헌신하지 못하면 행복이 없습니다. 계산하는 사람은 늘 계산만 하다가 끝납니다. 실행은 아무것도 못해요. 이 세상에서 실행하는 사람은 계산을 능가하는 더 큰 마음의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계산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없어진 것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고 주님께 내가 드린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들에게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내게 얼마나 없어졌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기쁨을 주었고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도왔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 제가 늘 말씀드렸죠. 우리가 이 세상을 마치고 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쌓아둔 것이 남겠습니까? 베풀고 나눠주고 헌신하고 주를 위해서 사용하고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준 것이 남겠습니까? 우리는 과연 이 세상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뭐가 남겠다고 생각해요? 먹는 것이 남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입는 것이 남는 거죠. 잘 신는 것이 남는 거죠.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주를 위해 헌신한 것이 남는 것이고, 다른 이들에게 기쁨으로 베풀어준 것이 남는 것이고, 어려운 이들에게 무엇인가 내 것을 나눈 것이 남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들에게 남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의 삶은 빈한하게 살 필요가 있겠습니까? 나 하나 채우기 위해서 나 하나 마음의 만족을 위해서 나 하나 살지 못해서 바둥거리며 나하 나 만족하지 못해서 바둥거리며 살다보면 우리는 너무나 빈천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없어진 것 아깝게 생각하지 말고 주님께 드린 것이 무엇인가? 내가 어려움을 통해서 주님께 드린 것이 무엇인가? 또 내가 고통스런 삶의 장면을 통해서 내가 그것을 도움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헌신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항상 기뻐요. 그런데 내가 주님께 드린 헌신과 그리고 내가 주님께 드린 충성이 얼마인가? 그런데 나는 어떻게 얼만한 축복을 받았는가를 계산하면 우리는 한없이 슬퍼지게 됩니다. 헌신이 생각난다는 것은 은혜가 떨어진 상태입니다. 헌신하고 잊어버리라고 했지요? 내가 자꾸 헌신한 것만 생각나면 더 이상 헌신하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헌신할 것이 생각나야지 헌신한 것이 생각나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은혜를 행하여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은혜가 충만하면 하나님께 받은 것만 생각나요. ‘아, 내가 하나님께 이런 은혜를 받았는데, 내가 어떻게 헌신해야 될까? 내가 하나님께 이러한 축복을 받았는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기쁨을 나눠 줄까?’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섭섭한 것만 생각하는 사람은 늘 불행해져요. 감사한 것만 생각하는 사람은 늘 행복해집니다. ‘섭섭한 것은 잊어버리고 감사한 것만 생각하고 살자.’

저는 마음에 늘 한가지 새기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섭섭한 것 잊어버리고 감사한 것만 생각하자. 감사한 것은 평생 잊지 말고, 섭섭한 것은 즉시 잊어버리자라는 것입니다. 자 우리 한번 따라서 합시다. ‘섭섭한 것은 즉시 잊어버리고 감사한 것은 평생 잊지 말고 살자.’ 한번 은혜 입으면 평생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섭섭한 것은 즉시 잊어버리고 씻어버려야 해요. 그래야 우리의 정신적인 건강, 우리의 모든 영적인 평안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너 어디 한번, 내가 겨누고 있는데 한번 내손에 걸려봐라.’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상대가 한번 그 손에 걸릴지 몰라요. 그런데 그렇게 평생 살아가면 그 평생 살아가는 동안이 얼마나 불행한지 모릅니다. 상대방을 불행하게 하기 위해서 내 인생 전체가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대를 불행하게 만드는데 내 인생 전체를 불행하게 만들 만한 값을 치를 이유가 있나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정말 내게 섭섭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정말 그것을 기쁨으로 바꾸어서 어떻게 생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나를 섭섭하게 할 만큼 그는 환자구나. 그는 어떻게 기쁘게 해주어서 그를 치료할 수 있을까?’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가 먼저 행복해진 것입니다. 여러분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왜 우리들에게 축복의 말씀입니까? 원수를 갚으려고 끝까지 마음에 앙칼진 원한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 우리 마음은 절대 훈련할 수가 없는 감옥에 갇혀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원수를 사랑하는 이런 심정을 가지고 그에게 무엇인가 잘되기를 원하고 베풀기를 원하고 그에게 기쁨이 있기를 원하면 그 사이에 우리가 더욱더 큰 믿음의 영적인 거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미워하지 말고 살아야 되고 감사하고 좋은 것만 생각해야 합니다.

드리지 못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성막을 지을 때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아침부터 줄을 서서 기다렸어요. 그 줄 끝이 보이지 않아요. 나중에는 너무 많이 가지고 오니까 모세가 뭐라고 하지요? ‘이제 그만 됐다. 그만 가지고 와라. 이제는 다 돌아가라’ 여러분 이것이 헌신입니다. 헌신은 마지못해서 억지로 내게 있는 것 최소한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최대한 하나님께서 괜찮다 필요없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우리들에게 있는 모든 것을 최고의 것을 최선의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헌신입니다. 벌써 계산해서 ‘이만하면 되겠다. 이정도면 되겠지, 최소한 이 정도면 체면치레는 되겠지.’ ‘아니면 하나님도 이 정도는 봐 주실꺼야.’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헌신이 아니라 계산인 것입니다. 드리지 못해서 안타까운 마음,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기회를 우리는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직분 또한 헌신의 기회, 여러 가지 기회가 우리에게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게 주어진 직분이 있을 때 내게 주어진 헌신의 기회가 있을 때 우리는 그 순간과 기회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최대한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특별히 은혜를 지향하는 헌신이라는 것은 평안과 기쁨과 행복이 있어야 합니다. 계산을 지향하는 이해타산의 헌신이라는 것은 늘 피곤하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세요. 예수님과 빌립이라는 제자의 접근 방식이 다르잖아요. 사람들이 많아요. 어떻게 하면 좋겠냐? 빌립은 뭐라고 얘기합니까? ‘예, 200데나리온의 떡들 사다가 주면 딱 되겠습니다.’ 계산해 보면 딱 맞아요. 그만큼이면 딱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천 명을 먹일 떡을 누가 마련해 놨겠어요. 돈도 없지만 돈이 있어도 그것은 무용지물이고 소용도 없습니다. 그런데 쓸데없는 탁상공론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계산법이에요.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지요? 그 모든 것을 이미 파악하셨어요.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은 기적을 염두에 두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또 그 가운데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오병이어, 물고기 두마리 떡 다섯개를 어떤 소년이 가지고 왔습니다. ‘필요하면 쓰세요.’ 아니 오천명이 있는데 물고기 두마리 떡 다섯개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계산상으로는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와서 뭘 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소년은 그것을 가지고 왔던 것입니다. 그 물고기 두마리 떡 다섯개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오천명을 먹이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은혜의 방법입니다. '나 같은 것이 뭐 좀 하나님께 헌신한다고 해서 이 헌신이 의미가 있어지나?' 이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하는 마음, 내가 드리는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싶은 마음, 다른 이들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힘이라도 좀 같이 나누어 힘이 되고 싶은 마음, 이것이 헌신의 마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르밧 과부의 집에 있었던 얘기 아시죠?
엘리야 그릿시냇가에 있다가 때가 되어서 이제 그곳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사르밧 과부의 집에 도착하게 되죠. ‘이 집에 뭐가 있냐?’ ‘예. 밀가루 조금, 그리고 기름 조금 있습니다.’ ‘그것가지고 떡을 만들어서 나를 줘라.’ 선지자가 이렇게 요구를 하는데, 그 집은 참 한심합니다. 왜냐하면 이 마지막으로 있는 것 가지고 해서 먹고 이제 죽는 것입니다. 이제 먹을 것이 없으니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으로 있는 것을 가지고 엘리야 선지자가 오더니 그것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야속하겠어요. 떡 한 덩어리 만들 것 남았는데 이것을 달라고 하니, 그런데 생각을 한번 바꿔서 해보세요. ‘떡 한 덩어리 더 먹고 죽으나 아니면 뭐 한 덩어리 덜 먹고 죽으나 내가 죽기 전에 착한 일이나 한번 해보자.’ 그래서 선지자를 대접했어요. 그랬더니 집에 어떤 일이 일어나죠? 엘리야가 그것을 먹고 축복할 때 그 집에 밀가루 독과 기름병이 마르지 않는 축복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각의 전환에 따라서 이 삶이 전혀 달라지는 것입니다. 야. 내가 조금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야 내가 있는 것 가지고 마지막으로 남에게 도와줄 수 있는 이와 같은 접대할 수 있는 헌신할 수 있는 이런 기회가 있다라고 생각하면 우리들의 삶은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여러분 여기 어려워서 기도하고 있는 분들이 있지만 그래도 기도할만한 힘이 있잖아요. 기도할 만한 믿음이 있잖아요. 기도할 만한 하나님께 대한 소망과 기대가 있잖아요.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닙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많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은혜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계산을 지향하는 것과는 달리 소망과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 여리고 정탐꾼이 왔을 때 어떻게 했죠? 하나님의 은혜 속에 그들을 숨겨주었고 그는 목숨을 걸고 그들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여리고 성이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서 점령될 때 이 기생 라합과 그 모든 식구들은 살아남게 되었고 이 기생 라합은 예수님의 계보 속에 속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것들을 보게 되면 우리의 삶 속에서 과연 내가 계산으로 살 것인가? 은혜를 좇아 살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결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계산하는 것이 반드시 나쁘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계산을 할 줄 알면서도 계산을 능가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잖아요. 지갑에 얼마 들어있나 늘 계산하고 살지 말고 그 계산을 능가할 더 큰 축복을 누리며 살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얼마나 도와줘야 되나라고 계산하지 않고 그냥 내 손에 집히는 대로 도와줘야 되겠다라고 생각하고 살 수 있는 이런 정도의 축복의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제가 한 가지 분명한 것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자 따라서 합니다. ‘사는 대로 살아집니다.’ 자, ‘사는 대로 살아집니다.’ 어떻게 생각하고 사는냐에 따라서 살아집니다. 계산하고 아둥바둥 살아가는 사람은 평생 아둥바둥 살아요.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은혜대로 믿음대로 살아야겠다라는 사람은 평생 믿음대로 살아져요.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대로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인간적인 생각에 갇혀서 끝까지 그렇게 사시겠습니까?

두 번째 주님을 사랑해서 진실한 헌신을 이루는 삶은 궁극적으로 행복한 삶이며 결국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것이 됩니다. 진실한 헌신을 이루는 삶이야말로 행복한 삶이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큰 축복의 섭리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헌신이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면 모든 개념이 달라집니다. 사랑하면 우리에게 첫째 생기는 개념이 무엇입니까?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주지 못해서, 주어도, 주어도 안타까운 마음만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나 생각이라는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 분위기가 어떤 것에 의하여 좌우되느냐에 따라서 우리 인생이 결정되니 우리는 지혜롭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적 지배를 받는가? 아니면 사단의 지배를 받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랑해서 주면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 됩니다. 받는 것보다 더 기쁜 것이 주는 기쁨입니다. 사랑해서 주면 그것은 견딜 수 없는 큰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께 대해서는 주님이 내게 무엇을 주시는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주님께 헌신할까? 우리의 마음에 소원이 그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힘과 역사를 이룹니다. 헌신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주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어떻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면 내가 어떻게 주님께 헌신할 수 있을까는 것은 자연히 따라 오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 걸인이 있었어요. 무엇인가 주려고 했는데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베드로가 마지막으로 주머니를 털고 털고 터니까 손에 마지막으로 잡히는 것이 뭔지 아세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었어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가진 것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아무것도 없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는 누구도 없어요. 모두가 마지막으로 털고 털다보면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으로 딛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 없어요. 다 누구에게든지 줄 수 있는 것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소년들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께 올릴 영광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님께 올릴 영광의 기회가 왔죠. 뭡니까? 왕의 진미를 먹지 않았습니다. 우상에게 제사 드린 재물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먹지 않았어요. 그리고 채소만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그 일을 결정했을 때 이들의 얼굴은 다른 사람보다 더 수려했던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이와 같은 요소들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어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가? 생각하기 전에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모든 삶을 드릴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은 한없이 기쁘고 감사한 것입니다. 저는 가끔 기도하다 보면 정말 이런 생각이 나야 하는 것일까? 왜 이런 일을 해야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날 정도로 정말 우리 교회가 해야 될 많은 일들이 생각이 나는 것 같아요. 결국 우리가 져야 될 부담이고 짐인 것 같아요.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그것은 짐이 아니라 힘인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런 일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지, 주님의 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저 무엇인가 쌓아두고 뭔가 원하는 것 이루려고 하고 과시하고 그것으로 끝난다면 그 삶이 무슨 의미가 있고 교회는 또 무슨 의미가 있고 성도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축복 받으려고 살지만 시간이 지나면 헌신하려고 살잖아요. 제가 여러분께 여쭤볼께요. 축복받기 위해서 사십니까? 아니면 헌신하기 위해서 사십니까? 아니면 잘 모르시겠습니까? 여러분 어떠세요? 내 믿음이 지금 축복을 위해서 살고 있는가? 헌신을 위해서 살고 있는가? 헌신이 참된 축복이라는 것을 아는 수준에 와 있으면 나는 정말 헌신하고 싶습니다.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어느 집을 심방하는데 정말 제 마음에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 집 앞에 뭐라고 써 붙여놨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내 삶의 전부입니다.’ 이렇게 써 붙여놨어요. 목사의 마음에 참 감동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 생애의 전부입니다.’ 내 삶을 주님께 다 드리고 싶은 것이 우리 성도들의 마음이에요. 그것이 우리의 삶의 큰 축복입니다.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축복입니다. 제가 주님 앞에 무엇을 받아서가 축복이 아니라 내가 주님 앞에 무엇을 드려서 축복이 아니라 내 삶이 주님 앞에 온전히 드려질 때 그것이야 말로 가장 큰 축복인 것입니다.

헌신이 이루어지는 삶이야말로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헌신이 이루어지는 삶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것을 얻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이름이 온 세상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그대로 여인의 행실이 전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헌신은 일단 내 것이 없어져야 되요. 여러분 교회도 헌신한다고 하고 내 것 없어지지 않고 헌신한다면 이것은 헌신도 아닙니다. 헌신한다는 것은 일단 내 것이 없어져야 합니다. 오늘 이 여인은 나드 향유를 부었죠? 이 여인에게 나드 향유가 없어졌어요. 비싼 것이 없어졌어요. 재물이 손상되고 손해 됐습니다. 헌신했는데, '어, 헌신했는데 나는 잃어버린 것 아무것도 없어.' 이것은 헌신도 아니에요. 헌신하면 내 것 뚝 떨어져서 없어져야지 헌신입니다. 남의 것 가지고 그냥 아니면 다른 것 가지고, 내 것 없어진 것 없는데, 일만하고, 이건 헌신도 아닙니다. 헌신은 내 것이 뚝 떨어져 나가 없어져야지 헌신입니다. 그리고 그 떨어져 나간 부분은, 비워진 부분은 주님께서 채워주시는 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헌신한다고 하고 내 것은 아무것도 잃어버리는 것 없고 손해도 없고 그냥 나는 헌신해 이것은 헌신도 아닙니다. 헌신은 ‘헌신하고 나니까 내 것이 뚝 떨어져서 없어져 버려야 해요.’ 그래야 헌신입니다. 그리고 그 부분은 주님께서 새롭게 축복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헌신은 내 것이 없어지고 주님이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헌신한 삶은 후회가 없습니다. 쌓아둔 삶은 후회가 남고 아쉬운 것입니다. 헌신이 이루어지면 남는 것도 없으니까 결국 우리는 후회할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 떠날 때 뭘 후회하시겠어요? 내가 뭘 쌓아두지 못하고 가서 후회하실 것 같아요? 쌓아둔 것을 다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지 못하고 간 것이 후회될 것 같아요? 저는 쌓아두지 못해서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적어도 내게 있는 것을 다 헌신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후회할 것 같아요. 왜죠? 하나님 앞 에 우리는 아무것도 못 가지고 가니까요. 하나님 앞에 뭘 가지고 가겠어요?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천국 창고에 쌓아 둔 것 밖에 없잖아요. 여러분 그때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시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남는 것이 어디에 있다고요? 천국에 있잖아요. 여러분 천국에 쌓아두는 것이 남는 것입니다.

헌신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뜻과 섭리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주님의 장례를 예비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주님의 일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이 여인의 행실이 전해집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소자를 대접하면 그것이 주님을 대접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별것 아닌 헌신이 큰 역사를 이룹니다. 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우리가 말씀드렸잖아요. 별 것 아닌 오병이어가 큰 기적의 하나의 재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큰 위대한 일은 그것이 큰 위대한 일이 될지 몰랐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야, 이것을 하면 큰 역사가 이루어지겠다.’ 이러면 큰 역사가 아닙니다. 자기가 큰 역사를 이루는지 내가 큰 일을 이루는지, 그것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들에게 이루어져야 그것이 큰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절대 훌륭한 일을 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내가 지금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훌륭한 일을 별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정말 나는 당연한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일이 큰 위대한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평가받지 못해도 주님에게 평가받을 것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고 싶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에서 헌신해야 합니다. 여건이 안 되어서 헌신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없어서 헌신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헌신할 수 있고 그 때 우리에게 참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입니다. 주님과 세상에 대한 우리의 헌신의 마음은 인간적인 박애주의나 그 어떤 동정심, 심지어는 위장된 선보다 훨씬 더 상위에 있는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박애주의에 굉장히 뛰어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좋아요. 아주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도 사실은 거짓말이었어요. 마음에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의 형식적인 논리라도 그 박애주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뭔지 아십니까? 주님을 사랑함으로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이루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서 종종 문제가 일어날 때가 있는데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세상의 방법을 가지고 교회에서 그대로 실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110볼트짜리를 220볼트에 사용한다고 하거나 220볼트짜리를 110볼트에 그냥 사용하려는 것입니다. 거기서 뭐죠? '파지직' 하고 그 기계가 망가져버리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방법으로 세상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주님의 방법으로 그 일을 해야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에서도 주님의 방법으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주의 일을 하게 되면 그것은 박애주의나 아니면 어떤 동정심이나 아니면 위장된 선보다 훨씬 더 상위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다 보면 결국 세상에 큰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다보면 우리는 결국 세상에 큰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주님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구제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나치게 쌓아두어도 가난하게 되려니와 남을 풀어 구제하는 자는 더욱더 부하게 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의 법을 따라 가다보면 저절로 세상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칭찬받으려고 하는 것 아닙니다. 주님의 일을 하면 그 일이 세상에서 평가받는 일이 될 뿐이에요. 세상에서 평가받으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려고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나의 출발, 믿음에서 출발해서 인간적인 갈등을 해소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세상에서 기쁨을 이루는 것입니다.

동정심을 능가하는 더 큰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동정심은 사람을 약하게 합니다. 사람을 세워주는 역사를 미루게 합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주님으로 인해서 일어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은과 금 한 푼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죠. 빵과 복음이 필요한 곳에 우리는 빵과 복음과 선교의 역사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물고기 한마리 잡은 것은 한 끼 먹여주는 것이지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은 평생 먹여주는 것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어요. 배가 고픈 사람한테 물고기 잡는 법 가르쳐주면 그 사람 배우지도 않습니다. 그 사람 오히려 화만 냅니다. 분노만 쌓게 됩니다. 배고픈 사람한테 일단 빵 한개 라도 줘서 배불리고 나서 정신을 좀 찾은 다음에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배고픈 사람에게는 빵 한 덩이라도 줘서 일단 배고픔을 면해서 정신이 차려진 다음에 우리는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우리 오해하시면 안 돼요. 우리가 영원한 삶의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만 가르쳐주면 안 돼요. 왜 예수님이 천국의 복음을 전하면서 배고픈 자를 왜 먹였고, 왜 병든 자를 고쳐주셨고, 왜 귀신들린 자에게 귀신을 쫓아주셨고, 왜 슬픈 자의 마음을 위로해 주셨습니까?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병행해야 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했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했죠? 이것이 뭐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떡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의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주의 복음을 전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그들에게 무엇인가 도움이 될 것을 주어야 합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잖아요. 선언적으로 살지 않고 실천적으로 산다는 것이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말로만 끝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말로만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에요. 말과 동시에 우리의 삶으로 전해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럴듯하게 말을 하고 논리는 개발해내지만 실제적인 생활의 삶에 있어서는 번듯한 논리만큼 그의 삶이 따라주지 못하니 우리 삶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성경말씀을 말로 전할 뿐 아니라 우리의 생활로 전하는 삶이 돼야 합니다. 100번 말하면 뭐합니까? 그의 삶 속에 그와 같은 삶이 있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동정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세워줄 수 있는 우리의 삶에 실제적인 역사가 함께 주어져야 합니다. 동정은 일회적인 것이지만 그 사람을 세워주는 것은 영원히 우리들에게 있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는 방법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나눔은 동정이 아닌 형제, 자매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동정이 아닌 사랑을 베풀고 나누고 세워줘야 합니다. 이게 뭔지 압니까? 한순간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소년 소녀가장을 돕는 일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최소한 10년 이상 같은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죠? 최소한 10년 이상의 계획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드렸죠? 한순간 그냥 우리 사정이 될 때, 또 마음의 여유에 의해서, 또 이런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책임지려고 생각하면 그것은 참 피곤한 것입니다. 여러분 내게 사정이 되어서 정말 최선껏 도와주는 것하고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책임지고 내가 저 일에 대해서 끝까지 내가 해결하겠다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해결하고 책임져야 하겠다라는 차원으로 들어서면 그것은 갑자기 피곤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피곤을 감당하고 그 피곤을 내 것으로 쌓아놔야 결국은 그것을 내 것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고 진정한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피곤한 부분까지는 안 가려고 합니다. 돕는 것도 피곤하지 않은 적당한 선에서, 그러나 우리는 피곤해지고 정말 때로는 곤고해지는 지경까지 나아갈 때 진정한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기분이 좋은 선까지만 하는 것은 헌신도 아닙니다. 정말 내게 피곤하고 어렵고 고통스럽고 내가 정말 여러 가지 괴로울 지경까지 나아가서 거기서 마지막으로 ‘야 이것이 참된 기쁨이고 평안이고 즐거움이구나’라고 느낄 수 있을 때 우리는 참된 헌신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연민이 아니라 믿음의 자세에서 결코 상태가 나아서 그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당연한 일을 하게 될 때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과 방법을 배우고 우선해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가? 주님의 방법인가? 주님의 때인가? 라는 것을 확신했다면 우리는 그 다음에 전력투구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바로 이와 같은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헌신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참된 기쁨을 주고 헌신이라는 것은 참된 평안을 주고 우리들에게 참된 행복을 주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주의 성도들에게 주님을 향한 끝없는 하나님의 축복의 마지막 목표까지 도달하는 아름다운 헌신이 이루어져 최고의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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