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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덴이 에덴되는 원리 (창 2: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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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에덴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이름 그대로 에덴동산에는 행복이 있었고 기쁨이 있었고 풍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이 좋았더라 말씀그대로 처음에덴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심이 좋았고 사람이 사는 데에도 최고의 행복이었습니다. 그 에덴안에는 온 세상을 적시는 네 개의 강줄기가 있었고 에덴을 더 에덴답게 만들었습니다. 처음강 은 뛴다 뛰다의 뜻을 가지고 있는 비손강이요 두 번째 강은 은혜의 뜻을 가지고 있는 기혼이요 세 번째 강은 결실의 뜻을 가지고 있는 힛데겔이요 네 번째 강은 능력의 뜻을 가지고 있는 유브라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서 시작된 네 개의 강줄기를 통해 온 세상을 적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뛰고 뛰는 비손을 통해 기혼의 은혜를 통해 힛데겔의 결실을 통해 능력의 유브라데를 통해 에덴의 행복이 에덴의 기쁨이 에덴의 풍요가 온 세상을 사람들의 삶에 마음에 넘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때 처음 사람들은 에덴의 행복안에서 에덴의 기쁨안에서 에덴의 풍요한에서 마음껏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에덴이 오염되어 버렸습니다. 차츰 차츰 점진적으로 오염된 것이 아니라 한 순간에 오염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오염은 간교한 마귀가 뱀의 옷을 입고 하와에게 찾아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말라 하시더냐 질문하면서 하와의 마음을 도적질 해버렸습니다. 마귀는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케 하였습니다. 마귀는 하와로 하여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이는 것에 마음을 두게 하였습니다. 사실 처음 에덴은 보이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하게 영적이요 은혜적인 장소였습니다. 은혜가 없으면 에덴은 에덴이 될 수가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마귀는 하와로 하여금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자신도 그리고 언약의 주체인 처음사람 아담에게도 먹여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선악과를 먹어버리는 순간 이제 더 이상 저들에게 에덴이 에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에덴은 죄로 오염되어버렸고 아담과 하와는 그 에덴에서 쫒겨나게 되어 버렸고 하나님은 그 오염된 에덴을 없애 버리기도 작정하신 것입니다. 에덴의 흔적인 유브라데만 남겨두고 말입니다. 문제는 오염된 에덴만 사라져버린 것이 아닙니다. 에덴의 진정한 행복의 삶이 기쁨의 삶이 풍요의 삶이 사람들안에서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 에덴의 아름다웠던 것들을 흘러 적시게 했던 네 개의 강줄기들도 말라버렸습니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는 이 말씀이 있기 전에는 사람들의 삶에 진정한 행복을 진정한 기쁨을 진정한 풍요를 상실한채 살게 되었습니다. 사실 처음 에덴도 보이는 환경이 조건도 기준도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바로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염된 에덴의 물줄기를 마셔버린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 보다는 먹음직 보암 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이는 것들이 삶의 이유가 되어버렸고 삶의 기준이 되어버렸습니다. 과연 오늘의 세상은 여전히 먹음직 보암 직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워 보입니다. 먹음직합니다. 먹거리들이 풍성하고 또한 먹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배부르기 위해 사는 인생들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보암직합니다. 보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행 못해 본 사람이 있으면 바보소릴 들을 정도로 보아도 족함이 없을 정도로 모든 환경이 보암직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안 되었던 인생들이 하나님 없어도 될 것 같은 것입니다.

오늘은 여전히 세상은 하나님이 없어도 되는 바벨탑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없이는 안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없이도 되는 인생이길 원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의 삶에 먹음직 보암직 탐스러워보이는 것들로 온갖 치장을 보지만 사실은 진정한 에덴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이 없습니다. 진정한 기쁨이 없습니다. 진정한 풍요가 없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더 먹음직 더 보암직 더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들에 마음을 쏟아보지만 더 이상 에덴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 삶에 처음 에덴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처음 에덴이 주었던 행복 기쁨 진정한 풍요가 다시 살아나야합니다. 말라버렸던 열정의 비손이 은혜의 기혼이 결실의 힛데겔이 능력의 유브라데가 다시 흘러야 합니다. 사실 에덴은 보이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에덴이 에덴 될 수 있었던 원리에 마음을 쏟아보아야 합니다. 

에덴이 에덴 될 수 있는 처음원리는 ‘하나님 안에서’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리 보이는 에덴을 꾸며보아도 진정한 에덴은 없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창조되었습니까? 1:26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였습니다. 27절에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면서 사람은 특별하게 창조되었음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말입니다. 2:7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입니다. 이제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생령 곧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영적존재가 된 것입니다. 생령을 거꾸로 하면 영생입니다. 이제 사람은 영생하는 영적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식물은 머리가 땅 아래를 향해 있습니다. 식물은 땅이 원하는대로 살면 됩니다. 동물은 머리가 옆을 향하고 있습니다. 환경이 원하는대로 환경에 적응하며 살도록 하나님은 본능을 주셨습니다. 학습하지 않아도 본능에 의해 알아갑니다. 안다는 것보다는 산다는 것입니다. 비 올 것도 죽을 때도 때가 되면 물고기가 태어났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새들은 학습하지 않아도 수천킬로를 날아 이동합니다.그 유명한 고베지진때도 사람들만 죽고 동물들은 살았다 합니다. 사람은요? 사람은 머리가 하늘로 향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대로 살아야 진정한 삶인 것입니다. 영적존재인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에덴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영적존재인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중요할 때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이루어도 하나님이 계산되지 않음은 진정한 행복일 수 없습니다. 영적존재인 사람은 먹을 것만 먹어서 입을 것만 입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영으로 살아야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영적교제를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

  에덴이 에덴 될 수 있는 두 번째 원리는 ‘가정안에서’ 입니다.

가정입니다. 가정은 인간의 삶에 있어 기본원리입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들고 제일먼저 가정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사회적으로 아무리 대단해져도 가정이 무너진 사람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길거리에서 마당을 쓸면서 살아도 가정이 안정된 사람입가엔 미소가 있습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인간은 행복이 없습니다. 마귀는 교회를 깨트리기 원하는 것 만큼이나 가정도 무너트리기를 원합니다. 요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가정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족은 하나님이 맺어주신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가족을 맺어 주실 때에도 일방적이기보다는 필요를 인식하게 하셨습니다. 동물들이 암수 짝지워올 때 아담은 그들의 이름을 지어주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는 짝이 없음을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아담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짝이 있어야 함을 먼저 필요를 인식하셨다는데 놀라움이 있습니다. 필요를 인식시키고 가정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가족관계를 절대관계라 합니다. 다른관계들은 상대적인 관계입니다. 자신의 사정에 따라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정은 절대적인 관계입니다. 이웃들과는 다릅니다. 가족문제가 안정되지 않으면 에덴이 에덴될 수 없습니다. 에덴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족을 맺어주실때는 돕는 관계로 맺어주셨습니다. 2:1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베필을 지으리라 하시고 입니다. 돕다는 하나님이 사람을 도우실 때 ‘돕는 여호와’ 할 때 쓰입니다. 상하개념이 아닙니다. 가족은 도움으로 완성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남보다 편하게 사십니까? 그것아십니까? 내가 편하기까지는 누군가가 희생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돕는 자이십니까? 가정에 가장 기본적 관계는 부부입니다. 자식에게 잘해 주는 것은 부부가 화목하게 사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면 부부가 중요함을 압니다. 잊지마십시오. 에덴은 가정안에서 입니다.

  에덴이 에덴 될 수 있는 원리 세 번째에는 ‘성령안에서’ 입니다.

창조의 배경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에덴이 에덴 될 수 있는 절대원리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창1:2절에 보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위에 운행하시니라 곧 하나님의 신입니다. 성령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있지만 하나님의 신이 운행할 때 창조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강력하게 임할 때 혼돈 즉 무질서가 질서로 공허 즉 텅 비어 있음이 충만으로 흑암 즉 어두움이 빛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어찌 창조되었다 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지음을 받은 영적존재입니다. 영적존재는 육만 만족되어서는 에덴이 에덴 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거듭나지 못했습니다. 육만 즐겁게 해도 어느 정도 즐거울 수는 있으나 나중 영적문제를 계산할 때에는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영의 사람들은 영이 기뻐야 기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적 사람들이 어느날 육적인 아쉬움을 갖고 한가해 집니다. 이렇게 예수만 믿다 좋은 세월 다갈 것 같고 주일날 어디도 한번 못가고 말입니다. 영의 사람들은 벚꽃 구경을 간다 해도 다 떨어진 뒤에야 갑니다. 우리는 영이 기뻐야 합니다. 영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충만은 모든 환경을 초월하는 능력입니다. 혼돈도 공허도 흑암도 문제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성령충만은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주고 싶은 최고의 선물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 했는데 바로 성령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가장 영적이어야 할 사람들이 육적인 것에 초점을 맞출 때 초라해지는 것입니다. 영이 기뻐야 합니다. 에덴이 에덴 될 수 있는 원리에는 성령안에서 입니다.

에덴이 에덴 될 수 있는 원리 네 번째는 ‘말씀안에서’ 입니다.

요1:1절에서 말씀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하였습니다. 처음에덴이 오염될 때에는 말씀이 말씀되지 못하고 말씀이 무너질 때입니다. 간교한 사단의 유혹앞에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마귀는 말씀을 가지고 장난합니다. 부분적으로 믿고 부분적으로 의심하게 합니다. 마귀는 오늘도 보암직 먹음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모든 것이 중요하게 먹는 것이 중요하게 화려한 것이 중요하게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무엇입니까? 복 있는 사람은 시1:2절에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을 말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은 모든 인생이 삶에 하나님의 원하심이 중요한 사람을 말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이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고전 13:6절에 진정한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나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함께 기뻐해야만 기뻐하는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말씀이 가라고 하면 가고 서라고 하면 서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어버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고 말씀을 좇아 어디든지 가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성령과 함께 창조의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에덴이 에덴되는 절대 원리는 말씀안에서 입니다. 말씀앞에 무너진 하와 아담을 보십시오. 그 아름답던 사랑도 은혜도 무너져 버렸습니다. 말씀을 가볍게 알았던 롯의 처는 소금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말씀을 믿어버리고 순종해 버리는 것입니다. 말씀앞에 온전히 서 있을때 선악과의 유혹을 이기는 것입니다.

  에덴이 에덴되는 원리 다섯 번째는 ‘노동안에서’ 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에게 에덴을 주실 때 완성품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창1:28절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하십니다.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는 것은 노동의 축복을 의미입니다. 일은 축복입니다. 선악과를 먹기전에도 노동은 있었습니다. 다만 선악과 이후에 땀을 흘러야 했고 수고한대로 열매를 얻기가 쉽지 않아진 것입니다.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는 것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나이를 먹어보십시오 일할 수 있다는 것이 복입니다. 전3:13절에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입니다. 일은 돈벌려고 하지 말고 일 자체를 즐겨야 합니다. 일의 목적은 더 잘 먹고 더 잘 입기 위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아담의 선악과 이후 처음 에덴은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제 그 에덴이 내 안에서 내 삶에서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보시기에는 우리의 보기에도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처음에덴도 보이는 환경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에덴을 완성품으로 주시지 않았다 했습니다. 말라버린 에덴의 강줄기들을 살려야 합니다. 어찌해야 한다 했습니까? 하나님안에서입니다. 에덴이 에덴되는 원리는 가정안에서 성령안에서, 말씀안에서입니다. 그리고 수고하는 것입니다. 이는 노동안에서입니다. 2006년 한해 에덴의 행복이 에덴의 기쁨이 에덴의 풍요가 우리마음에 우리의 삶의 현장에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비손의 강처럼 뛰고 뛰는 한 해, 기혼의 강처럼 은혜가 넘치는 한 해, 힛데겔의 강처럼 결실이 있는 한 해, 유브라데 강처럼 능력이 넘치는 한 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여! 에덴이 에덴되게 하옵소서!  - 아멘 -  (유재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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