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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설날] 은혜받은 자의 삶의 태도 (대하 2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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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의 고유 명절인 설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양력을 사용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음력을 사용하여 오늘이 음력으로는 정월 초하루입니다. 만은 사람들이 고향에 갑니다. 모든 명절이 그렇지만 묵은해가 지나고 새해가 되면 조상의 은혜로 잘 살았다고 해서 조상에게 먼저 제사를 지냅니다.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받습니다. 그리고 화투 치고 전통 놀이하고 놀다가 집으로 돌아 올 때 부부끼리 서로 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형님은 왜 나만 부려먹으려고 하느냐? 동생 아이들은 공부도 잘 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갔는데 왜 우리 애들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좋은 직장도 취직하지 못했느냐”고 스트레스 받고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조상에게 제사 지내 주는 것이 은혜받은 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살아계실 때 충분히 효도하고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사람들이기 고향으로 가는 명절이지만 이렇게 섬기는 교회에 나와 신앙의 가족들이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오늘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이어 계속해서 유다의 왕들을 묵상하며 은혜를 받고 있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유다의 제 8대 왕 요아스가 나옵니다. 참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할머니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손자들을 다 죽일 때 유일하게 혼자 살아난 사람입니다. 형제가 모두 죽었는데 자신만 살아났으니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까? 생명만 살아났을 뿐 아니라 성전에서 자라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레위인도 아닌데 어릴 때부터 성전에서 자라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교육받은 행운을 누린 사람입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어릴 때 잘 믿는 부모 밑에 태어나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삶을 몸에 익히는 것이야 말로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이렇게 설인데도 하나님께 나와 예배드릴 수 있는 신앙적 환경을 가진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자신의 아버지는 23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성전에서 교육을 받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건강한 몸으로 7살에 왕이 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7살 나이에 유다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겠습니까? 요즈음 아버지 잘 만나 세 살에도 수십억의 주식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있는데 요아스는 7살에 입법, 사법, 행정권을 한 손에 넣은 왕이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은혜를 받았습니까? 자신의 노력에 의해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왕족의 혈통을 타고났다는 한 가지 이유로 받은 것입니다. 어느 날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로 대기업의 회장이 된 것입니다. 뜻하지 않게 성공하고 출세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이 되었고 왕같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이 태어났지만 거주할 집도 얻게 되었고, 결혼하고 자녀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소한 것이 아니라 큰 은혜입니다. 이런 큰 은혜를 받았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우리는 은혜를 받으면 은혜로 갚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생의 전환점에서 어떤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다면 그것은 '평생의 은혜' 입니다. 인간되기를 포기하지 않은 이상 잊지 말아야 할 몫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안면 바꾸기'를 예사로 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배은망덕한 사람은 그리 수명이 길지 못합니다. 옛말에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기는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아스 왕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사람이 받은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가 무엇이겠습니까? 생명을 살려주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받은 가장 큰 은혜가 바로 영원히 지옥갈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요아스는 한 살 때 죽었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악독한 할머니 아달랴가 그를 죽이려고 했을 때 제사장 여호야다의 부인이 유모와 함께 침실에 숨겨 그를 살렸습니다(대하22:11). 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의 부인 여호사브앗은 그의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가정에서 비참하게 출발한 그의 인생을 역전시켜 준 은인이 바로 제사장 부부였습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얼마나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는가를 보십시오.
제사장 여호야다는 목숨을 걸고 아달랴의 눈을 피해 성전에 6년 동안 숨겨 교육을 시키며 보호해 주었습니다. 매일 매일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기르는데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얼마나 어렵고 힘들게 아이들을 기릅니까? 그런데 자식들은 그 은혜를 까마득하게 일어버립니다. 유산만 탐을 냅니다.
그리고 요아스가 7살이 되자 제사장 여호야다는 위험을 무릎쓰고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혁명에서 실패하면 모두가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위험을 무릎쓰고 오직 요아스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에게 인생의 큰 빚은 진 사람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까?

이정도의 은혜를 받으면 평생을 다해 그 은혜를 갚은 삶을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 큰 은혜를 어떻게 갚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여호와의 마음에 드는 일만을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13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을 하였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여호야다의 베푼 은혜를 생각지 아니하고 그 아들을 죽였습니다. 왜 죽였습니까? 자신에게 거슬리니까 죽였습니다.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제 제사장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세상 방법으로 살고 싶은데 여호야다의 아들이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열차가 궤도를 벗어나면 파멸이 온다는 사실을 잊은 것입니다. 고기가 바다를 벗어나면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 것입니다. 욕망이 도덕을 지배해 버린 것입니다. 욕심이 은혜를 지배해 버린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여호야다가 죽자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여호야다가 죽자 유다의 지도층들이 요아스를 찾아와 아첨을 하였습니다. 믿지 않는 주변 일가친척들이 아첨을 합니다. 측근에 있는 임원들이 아첨을 합니다. 세상 유혹이 끊임없이 다가 옵니다. “편하게 살아라. 유익만을 쫓으라. 쾌락을 즐겨라. 옛날을 잊어라. 돈이 최고다. 언제 예수 믿었다고 그러느냐? 적당히 살아라. 그정도 했으면 되었지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냐?” 속삭이는 것입니다. 하와를 통해 아담을 넘어뜨렸던 사단은 집요하게 가까이 있는 사람을 통하여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아주 교묘하고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느 분이 염전에서 일을 하다가 소금 가마니를 바다에 빠뜨렸답니다. 그런데 건졌는데 금세 소금이 녹아 버렸답니다. 대부분 김장할 때 보면 소금에 바로 녹지 않기 때문에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소금은 애초에 바다에서 취한 것이기 때문에 담수와는 달리 바닷물에서는 금세 녹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구별되었기 때문에 세상과 섞이기 시작하면 금방 옛모습으로 돌아 가 버립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부자 집에서 자란 사모님이 계셨답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메이커를 사주었데요. 그런데 목사님 사모가 되고 개척 교회를 하다 보니 5년이 지나도 옷을 사 입을 수가 없어요. 몸에 좀이 쑤셔 목사님 몰래 빚을 내어 메이커를 사입었답니다. 간곡하게 아내에게 목사님은 부탁을 했답니다. 그런데 또 옷을 사입고 왔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왜 또 옷을 사입었느냐고 말하자 “아니 이 아름다운 옷을 보는 순간 사탄이 저를 유혹했어요” 그러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니 여보, 그럴 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큰 소리 쳐야지.” 하니까 사모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렇게 했지요. 그런데 사탄이 내 뒤로 가더니 '뒤에서 봐도 아름다운걸!' 그러지 뭐예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사명인 사탄의 집요한 유혹을 물리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요아스는 이 시험에 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자 자신이 어떻게 하여 그런 위치와 그런 풍요를 누리게 되었는지 그 은혜를 잊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분이 눈에 보이지 않자 그 큰 은혜를 망각한 것입니다.

요아스에게 측근들의 말을 듣고 무엇을 합니까? 누구의 말을 듣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3)” 요아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 전을 버렸습니다. 요즈음 말하면 교회를 떠나 버린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은 것입니다. 마음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신앙을 버리면 자유스러울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의 권력과 부를 마음껏 누릴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부를 성공으로 생각하는 오늘 이 시대에 그 유혹을 떨쳐 버리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신앙을 버리면 그것으로 행복해 질까요? 진정 자유로워질까요? 아닙니다.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바알과 아세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바알과 아세라가 차지해 버립니다. 왜곡된 성공욕이, 출세욕이, 쾌락욕, 명예욕이, 권력욕이 차지해 버립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되어 자신을 통제하고 그것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납니까? 그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는 것입니다. 가정에 임하고 삶의 현장, 사업터에 회사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잃어버린 멸망의 길을 가지 말라고 선지자를 보내어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은혜 안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래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수단으로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보냅니다. “너희가 여호와를 버림으로 형통치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겠다”는 말입니다. 무서운 말입니다. 하나님이 버려 버리면 갈 곳이 어디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버려 버리면 인간이 수단 방법을 다 강구해도 되지 않습니다. 어항에 갇힌 물고기를 보십시오.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어항을 빠져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요아스에게 기회를 줍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 오라는 것입니다.
요아스는 자신에게 살이되고 피가되고 다시 한 번 일어서서 회복하게 하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거절해 버렸습니다. 결국 무리들이 왕의 허락을 받아 스가랴를 성전 뜰에서 돌로 쳐죽여 버렸습니다. 어릴 때 자신이 은혜를 받았던 곳입니다. 그곳에서 은혜를 원수로 갚아 버린 것입니다. 배은망덕한 행위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으면 은혜로 갚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배신'은 '사기'와 마찬가지로 흔한 '인간심리'입니다. 그러나 배신한 사람은 잘 되지 못합니다. 행복하지 못합니다. 가드라는 사람은 “배은망덕은, 어떤 풍토에서도 자라는 잡초로서, 처음에는 너무나도 빨리 자라지만, 조만간에 시들어 버린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런 사람들 결코 양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복을 받지 못합니다. 성공을 돈과 동일시하는 사회에 살다 보니까 돈이 성공의 전부인 것처럼 보고 배신을 밥먹듯하지만 가만히 보십시오. 그런 사람들 처음만 반짝할 따름이지 장기적으로 결코 잘 되는 일이 없습니다. 스승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 밑바닥엔 배신자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다윗도 배은 망덕하고 베드로도 배은망덕했지만 그들은 깨닫고 돌아 왔습니다.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주셔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롬3 :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생명을 받았을 뿐 아니라 직장과 가정 자녀를 얻었습니다. 이것 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는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안됩니다(고후6:1).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어서는 안됩니다(유1:4). 은혜를 은혜로 갑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우리는 은혜받고 은혜로 시작했으니 은혜로 일하다 은혜로 마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은혜받는 사람의 대표적인 특징은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을 위해 무엇인가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보면 멀리서 오시는 집사님이 계십니다. 아주 멀리 이사가셨는데 우리 교회에 나오시고 계십니다. 남편이 돌아가셨는데 당시 우리 교회에 다니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다니다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남편이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게 되었는데 장례 치러드릴 교회가 없었습니다. 친척을 통해 장례를 치러달라는 부탁을 받고 저와 우리 성도님들이 가서 장례식 집례를 해 드렸습니다. 그 은혜를 잊지 못하고 멀리 이사갔는데 지금까지 우리 교회를 꾸준히 섬기는 모습을 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죽을 때까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살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요아스를 보십시오. 큰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은혜를 안 사람이었습니다. 요아스가 왕이 되자 마자 처음 한 것은 무엇입니까? 성전을 수리하는 것입니다.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 것입니다. 은혜로 시작하여 인생을 은혜로 마치려면

1)처음 은혜로 결심한 마음 마지막까지 변질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가 큰 은혜를 받고 입법, 사법, 행정권을 손에 쥔 왕이 되었을 때 성전의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악한 여인 아달랴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전을 망가뜨렸습니다. 여호와의 모든 성물을 가져다가 바알에게 드렸습니다. 그대로 놓아 두어도 시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결심을 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성전을 수리하기로 결심을 합니다(4). 이 결심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마음에 무엇을 결심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지속력만 있으면 그 마음의 결심은 실제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의 결심이 죽는 날까지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의 결심은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자 어떻게 바뀌어 버립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는 마음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마음이 돌짝밭이 되어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던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아마 형제처럼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충고도 거절해 버립니다.

2)처음 은혜로 가졌던 열정을 마지막까지 변질되지 않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고 왕이 되었을 때 얼마나 열정적이었습니까? 5절에 보십시오. 그의 열정적인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중수할 뜻을 두자 마자 무엇을 합니까?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바로 모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성전 수리할 세금을 빨리 거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레위 사람들이 빨리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만 끌었습니다(5). 무려 23년간 성전 수리하지 못했습니다(왕하12:5). 그 때 어떻게 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비록 자신의 생명을 살려 주신 분이지만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꾸짖었습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가 성막을 짓도록 세금을 부과하게 했는데 왜 성전세를 거두지 않느냐고 야단을 쳤습니다. 직접 왕이 진두 지휘합니다. 성전세를 거두는 것이 안된다고 신하들만 탓하며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헌금 궤를 만들어 여호와의 전 문밖에 두게 하였습니다. 방법을 바꾸어 시행하는 것입니다. 8절에 보십시오. 헌금궤를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직접 헌금하게 하였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백성들이 기쁘게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왕이 직접 제사장과 함께 공사 책임자를 임명하여 성전 수리를 하게 하였습니다.(12) 마침내 성전을 본래대로 아름답고 튼튼하게 보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여호와의 성전에서 규칙적으로 드리는 번제물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런데 여호야다가 죽자 무엇을 합니까?
여호야다가 죽자 마자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변질됩니다. 거짓된 신하들에게 속아서 아세라 목상과 바알의 신상을 섬깁니다. 어느 모임에 가니까 한 목사님이 어느 목사님에 대하여 흉을 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 목회 잘하시는 60대 목사님이셨는데 사모님이 돌아가시자 6개월도 안되어 재혼했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존경했는데 그것을 보고 마음을 바꾸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것입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그렇게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이 어떻게 여호야다가 죽었다고 한 순간에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바뀌어 질 수 있습니까? 그는 의존적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조금 발전하여 독립적 신앙을 가져야할 텐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가족치료사 보웬의 이론에 의하면 분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개별성과 연합성이 같이 작용한다고 합니다. 홀로 독립하고 싶은 욕구도 있고 다른 사람과 같이 있고 싶은 욕구도 동시에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홀로 있고 싶은 욕구는 독립성으로 발전하고 같이 있고 싶은 욕구는 의존성으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가정에서 자라면서 정서적인 삼각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자식 등으로 삼각관계가 이루어지는데 부모로부터 분화 수준이 낮을수록 의존성이 강하고 부모의 나쁜 점을 그대로 모방한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대 천해의 고아가 되어 제사장 여호야다를 아버지처럼 섬기며 살았으니 여호야다 죽자 홀로 서기를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의존적 신앙에서 주체적 신앙으로 더 발전하여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주는 확장적 신앙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아스는 의존적 신앙으로 살다가 어릴 때 신앙의 열정을 다 잃어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고 사람을 죽이는데 열정을 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결과는 불은 보듯 훤합니다. 자신의 경험하지 못했지만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가를 들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을 통해 이미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자신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여 선지자를 통해 다시 돌아오게 하려고 했습니다.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는 선지자의 경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왜 나의 계명을 어기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느냐? 너희가 나를 버렸으니 이제 나도 너희를 버리겠다.” 그래도 돌아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무섭게 파멸됩니다. 이루기는 어렵지만 파멸되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그 해가 다 갈 즈음에 아람 군대가 쳐들어 왔습니다. 숫자적으로 볼 때는 아람 군대는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아무리 숫자적으로 우세해도 하나님이 유다 편에 서지 않으니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적들에게 넘겨 주어 버렸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이 떠나자 아람 군인들이 심판의 도구가 되어 이스라엘을 진멸시켜 버렸습니다. 인생은 보기 보다 단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으면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머리 굴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신을 평생 동안 도와 줄 것 같은 사람들이 다 죽습니다.(23) 유다 지도층이 모조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백성들도 그를 진정한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람 군대의 공격 무마하기 위해 성전 기물 바치는 비굴한 일을 합니다.(왕하12:18) 그렇다고 그가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중상을 입었습니다.(25) 결국 병상에서 자신의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25) 은혜를 망각하고 여호야다의 아들을 죽였는데 자신도 똑같이 당하는 것입니다. 선왕의 무덤에도 안장되지 못했습니다.

파멸로 가는 가족 시스템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파멸의 고리를 끊어 버리지 못했습니다. 바알 신을 섬기다 아버지가 23살에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형제들이 모조리 죽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바알 신을 섬기다 비참하게 중병에 걸려 40세에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이 정도 되었으면 고리를 끊을 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한지 모릅니다. 꼭 바로 왕의 마음 같습니다. 중독증이 강합니다. 무엇이든지 중독에 걸리면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9가지 재앙이 내려와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장자가 죽는 열 번째 재앙을 맛보아야 마음에 결단을 합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결단합니까? 아닙니다. 다시 추격하는 것입니다. 죄의 중독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이 그렇게 어렵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단번에 보혈의 은혜에 참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은혜로 시작했다가 비참한 인생으로 마치면 안됩니다. 은혜로 일하다가 은혜로 인생을 마감해야 합니다. 변화에 이끌려 가는 인생이 아니라 변화의 중심에 서서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로 갚은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은혜받고 은혜로 시작했으니 은혜로 일하다 은혜로 마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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