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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을 불타게 하라 (눅 24: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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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은 후 3일이 지났을 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두 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글로바라는 사람이요 한 사람은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제자였습니다. 그 두 사람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약 11Km의 길을 걸으면서 예수님의 아주 비참하고 끔찍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 했을 지도 모릅니다. “이보게 글로바, 자네 예수님의 몸을 보았는가? 나는 너무나도 끔찍해서 차마 눈 뜨고 그 몸을 볼 수가 없었다네. 도대체 그 로마 놈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채찍으로 때렸으면 등의 이곳저곳이 찢어지고 파여 있었겠는가?” “그러게 말일세. 자네는 예수님의 어깨를 보았는가?  지치고 피고한 몸으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어깨에 지고 언덕을 올라가는 동안 넘어지고 무릎이 깨지고, 그 십자가 나무에 몸이 짓눌려 어깨와 몸이 퍼렇게 멍들었던 것을 보았는가?”“참으로 악날한 로마 놈들일세.... 그분이 입고 있었던 헤롯의 빛나고 화려한 옷은 온통 그분이 흘린 피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있었지...” “이보게 글로바, 십자가에서 그분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네.  십자가를 세우기 전에 그분의 다리와 팔에 못을 박는 순간 얼마나 많은 피가 솟아 올랐고, 사방으로 튀었는가? ” “어디 그뿐인가? 길고도 뾰족한 가시 면류관을 그 로마 병정 놈이 인정사정없이 머리 위에서 아래로 푹하고 내리 씌울 때 그분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았는가? 나는 그 순간 머리에서부터 검붉은 피가 흘러 얼굴로 흘려 내리는 것을 보았다네” “이보게, 먹은 것을 다 토할 것 같았던 그 역겨운 피 냄새는 어떻고.... 어찌 되었든 멍들고, 찢겨지고, 터진 온 몸이 흐르는 피로 뒤범벅이 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소망을 잃어버렸다네.”“나 역시 그분이 메시아요 우리를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하실 구원자라는 사실을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믿고 따랐던 것을 후회했다네...” “그런데. 글로바 자네 마리아라는 여자가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죽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는가?” “음 베드로 사도가 급히 무덤으로 달려갔을 때 그곳에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고 천사를 만났다고 하더군...” “도대체 이 모든 일들이 어떻게 된 것일까?”

이 두 사람은 이처럼 지난 며칠 동안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누군가 한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두 분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심각하게 하고 있습니까? 두 사람의 얼굴을 보니 안색도 안 좋아 보이고, 무슨 큰일이라도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것입니까?”“아니 당신은 예수에 관한 일도 들어 보지 못했습니까? 우리가 볼 때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뛰어난 선지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람이 반드시 우리를 속량할 사람으로 믿었는데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을 내리고 십자가에서 그를 죽였답니다.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이 있습니까? 그분이 죽은지 3일이 되었는데 글쎄 오늘 아침에 마리아라는 여자가 하는 말이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어요!’라고 제자들에게 말했고, 제자 중에 어떤 사람은 천사를 그 무덤에서 만났다고 하기에 우리가 이 믿음을 수 없는 놀라운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랍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람이 입을 열어 “당신들을 보니 참으로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말씀을 마음에 더디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고 말한 후에  모세의 글과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해 예언된 모든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들으며 길을 걸어 갈 때에 어느덧 엠마오라는 마을이 가까워졌고, 그들은 동행한 그분을 붙들어 자신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쳐준 그분이 축사를 하고, 떡을 때어 그들에게 주자 그들의 눈이 열려 그분이 누군지를 알게 되었지만, 그 순간 그들은 다시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서로 말하기를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불타지 않았더냐?”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길고 멀고 힘든 여행이 있다면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을 보면서 예수 믿는 현대인들의 믿음의 방식과 습관을 보게 됩니다. 오늘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같은 믿음으로 예수를 믿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두 제자는 자신들은 과거 자신들이 인생의 구세주로서 예수라는 분을 만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왜 가슴은 뜨겁게 불타지 않은 것일까요?

  여러분, 우리들도 예수님은 구세주요 메시아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유일한 분이시며 나의 죄를 도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의 가슴은 어떻습니까? 불타오르고 있습니까? 왜 불타고 있지 않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을 잘 못 받아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은 머리로는 예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분이 선지자요 자신들을 구원할 분이라는 사실은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신의 이성으로는 예수님을 받아들였지만 아직도 머리에서 인정하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가슴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머리에서만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머리에서 완성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가슴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가슴으로 받아 들여야 행동이 되는 것이고, 믿음의 체험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체험은 이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것이기에 가슴으로 느끼고 가슴으로 받아드리고, 가슴으로 순종할 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에 대해서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과거에 교회로부터 받은 상처들이 있기 때문에 저는 거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신다는 것을 머리로는 인정했지만 지금 누리고 있는 생활과 직장과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당장 다음 달부터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라는 생계의 문제도 달려 있었습니다. 아내의 동의도 얻어야 했고, 가족들의 동의도 얻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 마음이 뜨겁게 불타지 않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던 중 1993년 1월 포천에 있는 청소년 중앙 수련원을 취재하기 위해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과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갑자가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불타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온 몸을 감싸 안았습니다. 정말 거부할 수 없는 힘이었습니다. 이성적으로는 서원 한 것도 있고, 주님께서 나를 부르신다는 것도 알았지만 가슴은 그것을 감당할 만큼 자신도 없었고, 뜨거움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부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주님께서 나를 책임져 주십시오. 목회자로서 살 때에 주님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할지 알지 못하지만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시오”

  주님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5절을 읽겠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주님은 우리들의 가슴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이성을 지배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을 지배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에 안주하시며 우리를 그분의 성전으로 삼고 있습니다.

  머리로 예수님을 받아드리고, 머리로 예수님을 이해하고, 머리로 생각하고 머리로 고백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에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불탈 것이 아니라, 가슴이 불타야하고, 머리가 뜨거울 것이 아니라 가슴이 뜨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머리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불타오르는 심장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8절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믿음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형제와 자매를 사모해야 합니다. 머리로 믿고, 머리로 사랑하고, 머리로 생각하기 때문에 미움과 다툼과 분쟁과 시기와 질투와 불신과 악의와 음란과 악한 육체의 정욕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어둠의 일에서 벗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나는 기도할 때에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삼상 1:15)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시 5:1)고 했습니다. 그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한 후에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고 통회할 때에 말하기를 “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51:10-12)라고 했고, 또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고 했습니다.

  가슴에 불이 붙어야 합니다. 가슴이 찢어져야 합니다. 가슴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머리가 아님 가슴으로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이제 가슴이 불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견딘 수 없는 성령의 불이 가슴에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리들의 가슴이 불타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안이 닫혀서 주님께서 함께 동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근심 중에 길을 갈 때에 주님은 그들 중에 그들과 함께 그곳에 계셨습니다. 그들이 장래의 문제와 미래의 문제는 놓고 인생의 문제와 나라의 문제를 놓고 근심 중에 서로 대화 하는 중에 그분은 그곳에 함께 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밥을 먹을 때에는 그들을 축복하시면서 그 밥먹으며 떡을 떼는 그 자리에 함께 하셨습니다. 말씀을 강론하실 때도 그들 중에 그곳에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그들이 있는 그곳에 함께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영적인 눈이 닫혀 있었던 것입니다. 가슴이 뜨겁지 않은 것은 영안이 열려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지금 함께 하시고 계신 주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우리와 함께 하시며 기적을 일으키시는 성령님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를 돕는 천사들의 권능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여러분은 왜 예수 믿어도 가슴이 뜨겁게 불타오르지 않습니까? 눈이 감긴 맹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눈이 감겨 있기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고. 인생의 근심에 붙들려 사는 것입니다. 가시밭에 떨어진 씨앗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때문에 말씀이 막혀 인생이 결실하지 못한다(마13:22)고 했습니다. 영안이 열려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나려면 세상의 염려에서 벗어나고, 재물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90% 이상의 사람들이 세상의 염려와 돈 문제 재물의 문제에 묶여 자신과 함께하시며 자신의 인생길을 동행하고 계신 주님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눈이 밝아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가슴이 뜨거워지고 불타오른 제자들처럼 이 말씀을 들을 때에 가슴이 불타오르고 뜨거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말씀의 체험이 있어야 가슴이 불타오르고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30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라고 했습니다. 음식을 잡수실 때라는 것은 주님과의 교제하는 삶을 의미한다면 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는 것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상징하며 그분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체험이 없는 사람, 말씀에 순종하여 그 일을 행하지 못한 사람에게 어떻게 주님이 함께 하심의 기적이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가슴이 뜨거워지고 불타오를 수 있겠습니까?

종교개혁자 루터가 말씀을 체험하지 못할 때는 종교개혁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불타는 뜨거운 마음으로 성령에 붙들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 된다는 로마서 강해를 기록했고, 그 강해를 통해 종교개혁의 불이 타오르도록 했습니다. 그후 약 200년이 지났을 때에 미국 선교에 실패자로서 영국으로 돌아왔던 요한 웨슬레이에게 전달되었습니다. 1738년 5월 24일 저녁에 그는 꺼진 등불처럼 믿음의 회의와 절망의 마음을 붙들고 올더스 게이트에 있는 어느 교회의 저녁 예배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의 예배 도중에 어떤 사람이 일어나 루터가 불타는 마음으로 쓴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듣는 순간 성령의 불이 그 마음에 불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슴은 말할 수 없는 뜨거움으로 불타올랐고, 그 후부터 그는 완전히 변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이었지만 마음이 뜨거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선교사였지만 가슴이 불타는 선교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 하나님의 말씀이 마른 장작이 되고, 성령님의 뜨거운 불이 붙자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의 냉냉한 가슴을 녹이고도 남는 열정적인 설교자가 되었고, 불붙는 은혜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가슴은 왜 불타오르고 있지 않습니까? 왜 뜨겁지 않습니까? 바로 말씀의 체험이 없고, 함께 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려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뜨거워지기 원합니다. 말씀으로 불타고 심장이 뜨거워 견딜 수 없는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가슴이 뜨거워진 사람이면 반드시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자신들이 경험한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33절에는 곧 즉시로 그들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발걸음이 멈추고 이제 즉시로 예루살렘 믿음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첫 신앙의 자리로 즉시로 돌아가야 합니다. 첫 사랑이 즉시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35절의 말씀처럼 뜨겁고 불타는 가슴으로 예수님께서 떡 떼실 때에 자신들에게 알려주신 그 말씀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증인이 즉시로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가슴이 아직 뜨겁지 않습니까? 아직 불타지 않습니까? 성령의 역사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능이 여러분들의 영혼과 심장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가슴이 뜨겁습니까? 불타오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엠마오라는 세상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주님의 도성 저 예루살렘을 향해, 주님의 나라를 향해 즉시로 일어나 앞으로 전진해 가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간증하고 증거하는 증인된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용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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